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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새 술에 취한 사람들 (행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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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에 취한 사람들 (행 2:1~13) 
  

미국 텍사스에 예이츠 풀(Yates Pool)이란 유명한 유전이 있습니다. 그 유전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 당시 예이츠(Yates)라는 목장 주인이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목장을 구입할 때 빌린 융자금의 원금은커녕 이자도 제대로 갚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생활은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이 이어가고 있었지만, 빚이 점점 늘어나면서 목장을 통째로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석유 회사에서 파견한 지질조사단이 그 지역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들은 석유가 나올 가능성을 발견하고 예이츠를 설득해서 시추 허락을 받아냅니다. 땅을 파내려 가던 중 1,115 피트(약 334 m) 지점에서 큰 유전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8만 배럴의 원유가 나왔는데, 나중에는 하루에 12만 5천 배럴이 나오게 됩니다. 지금 시가로 대충 환산해 보면 우리 돈으로 하루에 수십억 원어치입니다. 에이츠는 단박에 억만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그 사람 봉 잡았군!”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렇기도 하겠죠. 그러나 한편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자기 땅 밑에 엄청난 자원이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궁상을 떨었으니 정말 어리석었군!” 

어쩌면 이런 일이 우리 인생에 비일비재한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신앙생활 가운데 이런 일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풍성한 은혜가 있는데, 그 비밀을 모르는 채 힘겹게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땅 속에 어마어마한 원유가 매장되어 있는 것처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자원은 엄청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밀을 모르고 영적으로 궁핍하게 살아간다면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무지를 깨우쳐 주시고자 하나님께서 교회의 여러 절기 가운데 성령강림절(聖靈降臨節 Whitsunday)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오순절(五殉節 Pentecost)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구약의 절기로 오순절에 성령강림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활절부터 환산하면 7주째 되는 주일입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성령의 풍성한 은혜를 발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성령강림 : 성령의 내주와 충만의 역사 

본문은 잘 아시는 대로 성령강림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은 예수님의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일대사건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이 아무리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고 부활 승천하셨다고 할지라도 성령강림이 없었다면, 구원의 역사는 무효화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복음을 듣는 개개인이 믿음으로 반응하고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을 개개인에게 적용시켜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라는 겁니다. 

성령강림이 이렇게 중요한 일대사건이므로 하나님께서 선언적 의미로 특별한 사인(Sign)을 보여주셨습니다. 오순절에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 기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절~3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갑자기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 위에 불꽃같은 형상이 보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이 임하신 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시청각적인 사인입니다. 이런 현상은 항상 반복되는 게 아니라, 그때에 한번 있었던 사건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한번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성령이 한번 강림하신 겁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강림도 십자가 사건과 같은 구속사의 일환입니다. 이렇게 강림하신 성령은 계속 교회 가운데 성도들 가운데 임재해 계십니다. 

물론 성령강림 이전 구약시대에도, 영원 전부터 태초에도 성령은 계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3위 하나님이니까 당연히 영원 전부터 영원 끝까지 계십니다. 그러면 왜 이 사건을 구별하여 성령강림이라 부를까요? 그 이전에는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하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성령이 인간의 마음속에 임하게 된 겁니다. 4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모인 사람마다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을 말했습니다. 여기서 방언은 당시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던 ‘지역 방언’(만국방언)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 나오는 은사로서의 ‘신비방언’과는 다른 겁니다. 신비방언은 주로 기도할 때 하는 방언인데,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중요한 은사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지역 방언을 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때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그 때 모인 사람들은 천하 각국(5절)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각처(9절~11절)에서 오순절을 지키러 온 사람들입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모여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각처에 거주하던 유대인 교포들(Diaspora)도 있고, 또한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이방인 개종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 지역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갈릴리 사람들인 제자들이 자기들의 언어를 구사하니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때 그들의 반응이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이렇게 해서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 후로부터 성령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하셔서 믿음을 일으키시고, 믿는 자 가운데 내주하십니다. 이를 가리켜 성령의 내주(內住 Indwelling)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이 마치 집에 들어와 사는 거주자(Resident)처럼 믿는 자 안에 들어오셔서 거주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단순한 거주자가 아니라 왕으로 주님으로 거주하시면 그런 상태를 가리켜 성령의 충만(充滿 Fullness)이라 부릅니다. 

한번은 지방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그 교회에서 호텔을 잡아 주었습니다. 방에 들어갔더니 액자에 예쁜 글씨로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귀하는 프레지던트(President)로 모십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게 성령 충만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단순한 거주자가 아니라 우리 마음과 인생의 프레지던트로 모실 때 성령이 나를 다스려 주시고 통치해 주시는 그 상태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오셔서 믿음을 주시고, 내주하시고, 충만하게 역사하십니다. 고전12:3 보면, 믿음은 공부해서 얻는 게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인해 생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또 고전3:16을 보면 성령의 내주를 이렇게 언급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령님이 나의 몸을 하나님의 집으로 삼고 들어와 영원히 사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성령을 받은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롬8:9 “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 한번 스스로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속에 성령이 와 계신지! 몇 가지 질문으로 진단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여러분 자신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음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장차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까? 이 질문들에 “예!”라고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다면, 이미 여러분 마음속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2] 새 술에 취한 사람들 :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 

그런데 단순히 성령이 와 계신 ‘내주’의 상태에 머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은혜입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성령 강림 당시 제자들은 성령의 내주에서 더 나아가 성령 충만의 상태였음 보여줍니다. 그 모습을 보고 무리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합니다. 13절.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그러자 베드로는 뭐라고 반박합니까? 행2: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제3시는 오전 9시입니다. 아침에 그것도 기도 시간에 무슨 술을 마시냐? 아니라는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이 처음에는 조롱의 뜻으로 사용되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성령 충만을 잘 설명해 주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연상했는지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을 설명할 때 술 취함과 비교해서 말합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바울이 왜 술 이야기를 꺼내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술과 성령은 정반대인데 말입니다. 그것은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이 현상적으로 비슷한 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술의 영향과 지배를 받습니다. 이런 말이 있죠. “사람이 술을 먹지만, 나중에는 술이 술을 먹고, 마침내 술이 사람을 먹는다!” 그래서 술에 취하면 인격(지, 정, 의)이 달라집니다.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고, 감정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고 그럽니다. 술이 그 사람을 지배하는 겁니다. 마찬가지 성령 충만하면 성령이 그 사람의 인격(지, 정, 의)를 지배하고 통치합니다. 

간단히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성령 충만은 성령의 지배(支配 control)이며, 성령의 통치(統治 dominate)입니다. 주권의 문제입니다. 누가 주인이냐 이겁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성령이 주인이 되어야 성령 충만의 상태입니다. 

위대한 전도 부흥사 D. L. 무디의 이야기입니다. 무디가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자, 곳곳에서 무디를 강사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어느 지역에서 여러 교회들이 연합 집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들이 모여서 강사 초청 문제를 의논합니다. 그러자 너도 나도 무디를 천거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시큰둥한 모습으로 말합니다. “아니, 무디가 성령을 독점했답니까? 모두들 무디, 무디, 무디 하니!” 그러자 찬성했던 한 사람이 이렇게 응수를 합니다. “무디가 성령을 독점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성령이 무디를 독점했기 때문이 그러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성령이 나를 독점하고 사로잡고 이끌어 가실 때 우리는 성령 충만을 경험합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 있는지 모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① 확신 :

첫째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확신의 사람이 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다 부활하신 것을 목격했지만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모여 기도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해진 후 어떻게 됩니까? 행2:14,36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무리들 앞에 나아가 담대히 복음을 증거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이처럼 담대해집니다.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의 순교 사건이 나옵니다. 그는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합니다. 당시 공회 의원들은 모두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위압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맞서다 천사처럼 순교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습니까? 그가 성령 충만함으로 확신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확신 가운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구원의 확신, 그리고 승리의 확신! 부디 이런 확신으로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② 능력 :

둘째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을 통해, 더 나아가 그들의 복음 증거를 듣고 믿음으로 성령 충만해진 사람들을 통해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놀라운 일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행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그 중에 대표적인 사건이 사도행전 3장이 나오는 앉은뱅이가 일어는 이적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이 구걸하다 베드로를 만납니다. 그때 어떻게 되죠? 돈이 없지만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외칩니다! 행3:5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을 일어나 걸으라!” 그러자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 이리 저리 뛰어다니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하면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자기 안에, 주변에 놀라운 일들을 일으킵니다. 치유의 역사, 문제 해결의 역사, 그리고 형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런 삶은 억지로 사는 게 아니라 저절로 사는 겁니다! 그러기에 세상 살면서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마음속에 기쁨과 평안의 솟아납니다. 극복합니다. 마침내 승리합니다. 이러면 됐지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어린 시절 탈 것이 별로 없던 때였습니다. 자전거이면 최고였죠. 평지를 달릴 때는 신나지만 언덕배기 올라갈 때는 허덕거립니다. 어느 날 자전거를 끌고 언덕배기를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언덕배기를 거뜬히 올라갑니다. 가만히 보니까 모터를 달았습니다. 모터를 다니까 힘들이지 않고 쭉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모터를 달은 겁니다. 고난의 언덕배기를 올라갈 때도 새 힘과 능력으로 승리합니다. 아무쪼록 성령 충만함으로 이런 승리를 날마다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③ 성결 :

세째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결의 사람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그 영이 들어와서 내 인격과 사람을 통치하고 지배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루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수 믿고 성령 충만해지니까 주위 사람들이 놀랄 만큼 공장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습을 보고 감화 받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인간은 죄인인지라 이중성을 갖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죄악으로 일그러져 있습니다. 나름대로 거룩하게 바르게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잘 안 됩니다. 죄성 때문이죠. 그래서 앞에서는 거룩한 척하고 뒤에서는 추악한 짓을 하는 이중성을 갖게 됩니다. 영국의 소설가 스티븐슨의「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지킬 박사는 의학박사요, 마을의 고아 과부 가난한 자들의 보호자요 아비입니다. 칭송 이 자자합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밤에 하이드라는 흉악범이 가면을 쓰고 나타나 마을을 휘저어 놓는 겁니다. 살인하고, 여자들을 능욕하고, ... 마을 사람들은 그를 잡으려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붙잡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그의 가면을 벗깁니다. 그 순간 아연실색합니다. 지킬 박사가 밤에는 그 짓을 하고 다닌 겁니다. 여기서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이중성입니다. 이게 인간의 실상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별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성령 충만해지면 죄성이 제어됩니다. 그리고 변화됩니다. 죄인의 모습을 인위적으로 감추는 가면을 벗게 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나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렇게 되면 정말 행복하고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④ 증거 : 

네째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증거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인격과 삶 속에 저절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심령이 기쁨으로 넘쳐 저절로 입이 열립니다. 복음을 증거합니다. 삶이 증거가 됩니다. 행1:8 말씀 그대로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 저절로 증거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은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가장 큰 축복이 무엇입니까? 큰 돈 벌고 성공하는 겁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죠.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믿어야만 얻는 축복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그렇게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가장 큰 축복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모든 게 좋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내주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은혜입니다. 한번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거주하며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과 나와의 관계가 때로는 서먹서먹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령의 소멸 상태입니다. 성령이 완전히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있으나 마나한 존재처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간헐적입니다. 업(Up)과 다운(Down)을 반복합니다. 내가 성령님을 왕으로 주님으로 모시고 그의 다스림을 받는 성령 충만의 상태로 고조되어야 합니다. 
  

[3] 성령 충만의 비결 : 비움, 채움

그러면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고 그 상태를 지속시킬 수 있을까요? 간단히 소개하면, 비움과 채움입니다. 컵이 있다고 합시다. 컵 안에 오물이 있으면 어떻게 맑은 물을 채웁니까? 먼저 깨끗이 비워야 합니다. 그래서 비움과 채움입니다. 성령 충만도 마찬가지입니다. 

① 비움 :

먼저 내 마음 속을 비워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고 무시하는 것들을 비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죄를 제거해야 합니다. 죄는 절연체입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멀어지게 합니다.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 ” 그러므로 항상 스스로를 살피고 죄악을 회개해야 됩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 때문에 기도했지만 거절당합니다. 섭섭했지만 주님의 설명을 듣고 기뻐합니다. 고후12:9 “ ...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겸손하게 자기를 비웁니다. 이게 바로 바울이 항상 성령 충만함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프로 골퍼 최경주 선수 아시죠. 그의 간증을 보니까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내가 빈 잔이 될 때 새로운 게 채워지더라. 골프도 그렇고 신앙 생활도 그렇다!” 그렇습니다! 비우면 됩니다. 

② 채움 :

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채우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새로운 것으로 채우지 않으면 아무리 비워도 옛 것이 다시 자리를 잡습니다. 우리 마음 속을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죄악과 욕심이 다가오지 못합니다.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 ”(엡5:18 쌍둥이 구절) 말씀 충만이 곧 성령 충만입니다.

알코올 중독자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되었는데 술을 끊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어느 날 술집 옆을 지나가는데 쇼윈도에 진열된 술병들을 보고 침이 넘어갑니다. 고민하고 있는데, 반대편에 가게 쇼윈도에 게시문이 있습니다. “1달러만 내면 우유를 마음껏 마십니다!” 거기 들어가서 우유를 실컷 마셨더니 술집을 쉽게 지나칠 수 있었습니다. 좋은 것으로 채우면 나쁜 것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공격은 최선의 수비입니다. 공격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게 좋습니다. 말씀으로 마음속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함으로 성령의 충만을 구하십시오. 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 ”   

여러분! 가장 좋은 성령 충만의 축복을 구하십시오. 세상에 취하면 망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흥합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에 다시 한번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면서 성령 충만을 회복하고 계속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의 은혜로 범사에 승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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