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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길이 어려워질 때 (시 1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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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길이 어려워질 때 (시 121:1~8)

 
우리는 온갖 두려움에 둘러 쌓여 살고 있습니다.  세계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우리도 내면 깊은 곳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크고 능하신 하나님을 내 인생에 든든한 후원자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두려움에 맞서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두려움이든지, 아니면 재정적인 문제에서 오는 두려움이든지, 삶의 어떤 곳에서 오는 고통과 불안에 의한 두려움이든지 믿음의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고 이기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소중한 인생입니다.  오늘이 가면 다시는 없습니다.  인생은 재탕을 할 수가 없습니다.  2라운드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삶입니까?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 하나님이 주신 이 축복의 삶을 사랑도 즐거움도 없는 그런 공허한 인생으로 그냥 시간을 속절없이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천하보다 귀한 삶인데 삶의 즐거움도 사랑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그냥 속고 속으면서 속절없이 그 많은 날들을 고통과 두려움과 불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혼돈과 혼란 속에서 끝없이 묶여서 뭔가 반짝하는 싱싱한 날개도 한 번 펴보지 못하고 늙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목회자가 여러 사람을 보면서 안타깝고 슬픈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보다 더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시도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똑같은 방법, 똑같은 길, 똑같은 판단으로 가면서 그 소중한 삶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건강과 즐거움과 기대와 행복이 넘치는 다른 삶을 찾기 위해서 여기에 왔습니다.  주님 안에 길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고 모든 분노와 공격적인 행동과 자기 속에 내재되어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봉독한 시편은 그 앞부분에 시작하면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글이 붙어 있습니다.  특별히 이 부분을 가리켜서 순례자의 노래라고 불리워집니다.
 
옛날 이스라엘 순례자들이 이스라엘의 3대 명절이라고 일컬어지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과 같은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국내에도 각처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게 되면 예루살렘 꼭대기에 있는 시온산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당시 대부분 남쪽 지역에서부터 여행을 해서 오는 순례자들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유대 사막입니다.  이곳 유대 사막을 통과해서 예루살렘 도성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성서학자들은 아마도 그때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 난관이라고 볼 수 있는 사막의 뜨거운 열기를 참고 견디면서 이제 조금만 올라가면 예루살렘 도성에 도달한다는 기쁨을 가지고 그들이 아마도 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목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혹은 '순례자의 노래'라는 별명들을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봉독한 시편 121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절부터 2절까지는 한 순례자의 독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순례자가 자기 자신의 어떤 생각을 마음에 담아서 독백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3절부터 8절까지는 또 다른 순례자가 앞에서 노래했던 순례자의 노래에 대한 화답 형식으로 노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절과 2절의 첫 번째 부분에서는 한 순례자의 독백 가운데 일종의 자문자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1절은 질문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내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대답을 합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첫 번째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1인칭 대명사입니다.  이것이 일종의 독백이고 자문자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나'라는 단어입니다.  '나', '내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래서 1절과 2절에서는 일인칭 대명사가 매우 중요한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부분을 보면 이것은 다른 순례자가 화답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중요한 단어가 2인칭 대명사인 '너'라는 단어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이것은 다른 사람이 노래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부분은 내가 노래를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러면 옆에서 함께 가던 다른 순례자가 나를 쳐다보면서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본문 시편 121편의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바벨론 포로 후기에 쓰여졌을 가능성이 많다고 성경학자들은 생각합니다.  포로 생활이 끝날 때 포로의 고달픈 아픔과 고난의 역정을 기억했던 그 사람들이 이제 인생의 새로운 소망을 시온의 언덕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감격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올라올 때 불렀던 이 노래, 그것은 그들이 순례의 길을 행하면서 이제 마지막 유대 광야 사막을 지나가면서 불렀던 노래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삭막한 사막을 지나고 광야를 지나 이제 시온산을 바라보면서 그 모든 설움과 고통과 한과 아픔을 뒤로 하고,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순례자들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당시에 순례자들에게는 이 노래가 얼마나 커다란 은혜와 힘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도 여러분과 저는 인생의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순례자들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그 나라가 우리의 영원한 나라, 우리가 사모할 나라, 우리의 진정한 나라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걸어가는 이 순례의 길이 어려워 질 때 특별히 인생의 길에서 우리가 사막을 통과할 때, 열사의 태양이 내려 쪼이는 그래서 우리의 숨을 허덕이게 만들고 갈증 나게 만드는 그런 고통스런 사막의 길을 지나갈 때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노래, 위로의 노래가 바로 시편 121편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자주 접하는 시편입니다마는 시편의 내용을 좀 더 깊이 묵상하면서 이 시편의 내용이 우리 인생의 순례 길에 힘이 되고 소망이 되고 또 기쁨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길이 어려워질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째로,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이 어려워질 때, 또 우리가 삶의 스트레스를 느낄 때, 곤고함을 느낄 때 우리는 종종 산을 찾고 싶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찾은 모처럼의 산길, 혹은 산자락 어느 모서리에서 우리는 그 자연의 품에서 안식을 느낄 수가 있고 어느 정도의 회복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시편의 순례자도 그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유대 사막을 지나서 이제 시온의 언덕이 그들의 눈앞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산들은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예루살렘 자체가 높은 언덕 위에 있기 때문에 산들이 보입니다.  그 산들을 보았을 때 그 산에 안기고 싶은 그런 마음들을 아마도 이 순례자들은 느꼈을 것입니다.  산들을 바라보는 자체만으로도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능력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가 마침내 깨달은 진리는 도움은 그 산 자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산을 지으신 여호와께로서 온다는 사실을 시편 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시편의 순례자가 정말로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연에 압도가 되면 그 자연을 숭배하고 싶은 그런 충동을 느낍니다.

특별히 고대인들, 그리고 구약시대 이스라엘에는 바알 숭배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바알의 신전은 산꼭대기에 세워집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그 산의 정기를 느끼며 산의 아름다움에 도취하고 압도당할 때 그들은 산을 숭배하고 싶은 어떤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또 다른 어떤 신들의 제단을 산꼭대기에 만들어 놓고 신을 숭배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많은 다수의 강력한 자연 숭배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뉴에이지 운동가들입니다.  소위 뉴에이지 운동가들에게는 여러 가지 사상이 있지만 그 사상의 가장 중요한 핵심 가운데 하나가 자연을 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자연을 찬미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또 자연을 잘 관리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연에 대한 청지기적 책임 가운데 하나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 숭배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자연이 아름다운 나머지 자연을 예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연을 숭배하게 되면 자연이 신이 됩니다.  그것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망각한 채 피조물을 신으로 착각하는 우상 숭배자들의 일종의 생각의 구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 기자는 산이 아름답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산이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의 진정한 도움은 저 산이 아니라 저 아름다운 산을 만드신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자가 비로소 우리의 삶에 완벽한 구원자가 되실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인생에서 우리가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비로소 완벽한 도움이 되실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나를 만드신 분, 그 분보다 나를 더 잘 알고, 더 잘 도와줄 수 있는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아름다운 산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진정한 내 인생의 길에 도움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인생의 길에서 도움이 필요하거든 사랑하는 여러분, 우상을 찾지 마십시오.  인간에게 의지하지 마십시오.  돈에 내 인생의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 속에서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참되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보다도 눈에 보이는 우상을 찾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급해지면 어디 가서 뭐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아니하는 참되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만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길에 진정한 도움이 되신다는 사실을 오늘 이 순례자와 더불어 함께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인생의 길이 어려워 질 때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면서 더 엎드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우리 인생의 길이 어려워질 때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길에서 고난을 당할 때에 고난 그 자체보다도 더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외로움일 것입니다.  이 고난의 길을 나 혼자 걸어가야 한다는 뼈저린 외로움….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이 고통을 대신할 수 없다는 뼈저린 외로움이야말로 고난 이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함께 인생의 길을 같이 걸어가 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더불어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순례의 길을 훨씬 더 잘 견디며 걷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시편의 구도에서 1절과 2절에서 강조된 단어는 "나"라는 단어였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그러나 3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두 번째 부분에서 강조된 중요한 단어는 "너"였습니다.  나와 더불어 대화할 수 있는 너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  나에게 너라고 불러주면서 나를 격려해 줄 수 있는, 나를 너라고 불러줄 수 있는 친구가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크다란 축복입니까? 

우리는 함께 동행하는 순례자의 필요성의 중요성에 관해서 전도서 4장의 유명한 교훈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서 4장 9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에서 함께 동행하는 순례자의 중요성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인생의 길에서 함께 할 수 있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소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내 인생의 모든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수 있고, 함께 내 인생의 미래를 더불어 꿈꿀 수 있는 한 사람이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크다란 축복일까요?

저는 인생의 순례 길에서 친구의 선택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 부부는 특별한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남편이나 아내는 일종의 아주 특별한 친구입니다.  서양의 아주 고전적인 결혼 주례가들이 결혼 주례를 하게 되면 꼭 하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함께 하므로 앞으로 슬픔은 반으로 줄어 들 것이고 기쁨은 배나 더할 것입니다."
그것이 부부생활의 축복입니다.  부부가 정말 마음으로 함께 하는 친구가 될 수 있을 때, 함께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은 반으로 줄어들고 기쁨은 배나 더 증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하기 위해서 부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지 못할 때 그것처럼 인생에서 고통스러운 사건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어느 잡지에서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미식 축구의 감독을 하던 사람이 2년째 성적이 계속 부진합니다.  그러니까 친구가 없어집니다.  자꾸만 인기가 떨어지고 사람들한테서 "왜 성적이 그 모양이냐?"고 계속 비판만 받습니다.  주변에서 격려해주는 사람들도 없어지고, 친구들도 다 떨어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지나가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이 언제 해고되느냐 그것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너무너무 비참했을 겁니다.
 
그때 보니까 자기를 따라다니고 자기를 환영하고 반겨주는 것은 꼭 하나밖에 없더랍니다.  자기가 길러주는 개 밖에 없더랍니다.  개만이 여전히 꼬리를 치면서 자기를 환영하는 유일한 존재였다는 겁니다.
 
어느 날 자기 부인도 싫어하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부인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여보, 인생에서 나는 정말 내 마음을 알아주고 외로움을 알아주고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그 친구 하나를 발견했소.  내가 이런 일을 당해보니까 정말 이 개 밖에는 나의 친구가 없소"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슬쩍 부인을 쳐다보면서 "내가 이런 친구를 또 하나만, 내 인생의 길에서 친구 둘만 얻을 수 있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극복해 나갈 수가 있을 것 같소"하면서 부인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웃더니 "알았어요. 알았어요" 그러더랍니다.
그러더니 그날 저녁에 개 한 마리를 더 사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에서 진정한 친구가 누구일까?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진정한 친구의 자격이 있다면 세 가지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내가 실족하여 넘어질 때 나를 비판하지 않고 일으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입니다.  내 인생의 길에서 가다 보면 내가 돌을 차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실족할 때 나를 비판하지 않고 다시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사람, 그가 진정한 친구의 자격이 있습니다.
두 번째, 내가 그를 필요로 할 때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그냥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친구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로 하나만 더 첨부한다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늘 좋을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낙담하여 방황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 수 있는 사람, 그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편의 순례자는 그런 의미에서 행복한 순례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는 친구와 함께 그들은 험난하고 삭막한 순례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겁니다.  아마도 이 순례자가 이제 거의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면서 그 동안 걸어왔던 그 먼 장정 때문에 피곤을 느끼고 그의 발걸음은 흔들리기조차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가 아파하고 피곤해 하다가 갑자기 눈을 들었을 때 예루살렘 언덕에 둘러싸고 있는 병풍처럼 둘러싸인 시온의 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가 꿈에도 그리던 그 시온산을 바라보았을 때, 어쩌면 그는 이렇게 탄식처럼 노래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향한 도움을 구하고 싶었을 때 옆에서 함께 가던 순례자가 그를 쳐다보면서 노래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그 분은 졸지 아니하신다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편입니까?  그렇게 함께 화답할 수 있는 순례자가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인생의 길에서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이 신앙의 순례의 길에서 이런 친구의 도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에게 역설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에 흘린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이제부터 우리 일생은 하나님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여정, 인생의 길은 결국 내 삶의 주인 되시고 내 존재의 고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여정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동안에 혼자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친구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필요합니다.  인생의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내가 실족하고 넘어질 때 나를 비판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그 분은 당신이 일어나기를 원하신다고, 그 분은 당신을 지키시는 분이시라고, 여기까지 동행하셨다'고 말하면서 다시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그 순례자의 친구를 갖는다는 이 행복.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교회 공동체의 가장 커다란 축복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이런 친구들을 만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친구들을 가지는 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 인생의 어떤 고난도, 고통도, 슬픔도 넉넉히 견딜 수가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길이 어려워질 때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인생의 길이 어려워질 때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짤막한 본문에 보면 지킨다는 단어가 6번이나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짤막한 시편 가운데서 계속해서 함께 하는 순례자가 그에게 주고 있는 격려는 "하나님이 당신을 지키십니다"라는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지키시고 계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은 당신을 지켜주십니다.

이 시간 옆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 위로의 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따라 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지키시고 계십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순례자의 친구는 공동체의 고백을 개인적 고백으로 적용시키고 있는 것을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4절에서 5절로의 전환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4절에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 민족의 공동체입니다.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지키시는 하나님이 5절에서는 "너를 지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또한 우리 개인의 인생의 길에서 우리 개인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지키심의 영역이 본문에 보면 얼마나 포괄적인지 모릅니다.  먼저 모든 때에 지켜 주십니다.  6절에 보면, 낮의 해가 너를 상하지 않고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않도록 낮에도 밤에도 지키시는 바로 그 분이십니다.

7절에서는 모든 형태의 환난에서 지키시는 그 분이십니다.  8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들어가는 일도 나오는 일도, 모든 경우에서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모든 기간 동안에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하나님, 언제나 깨어 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주무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게 언제나 우리를 항상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면제한다는 약속은 결코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다면 내 친구에게 왜 이런 어려움이 생겼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런 고통이 생겼습니까?  어쩌면 이렇게 질문을 하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가만히 읽어보면 이 순례자도 이미 고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왜 지키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어떤 고난은 허용하십니까?  그건 모릅니다.  저한테 묻지 마십시오.  그 분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고난조차도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판단하신 하나님이 어느 정도의 고난은 아마 허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반드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십시오.  뜨거운 사막의 태양은 여전히 내려 쪼이고 있습니다.  이 태양 앞에 나는 아주 질식해 버리는가 했더니 어느새 드리우고있는 그늘을 보는 순간 이 순례자는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우편에서 그늘이 되신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준비하시고, 사막의 그늘을 준비하시고,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길은 확실히 고통이 있습니다.  환난이 있습니다.  눈물도 있습니다.  아픔도 있습니다.  어둠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 다가오셔서 다시 나를 붙드시고 위로하시고 지켜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낮에 태양이 나를 공격하는가 하면 밤중의 달까지도 우리를 공격할 수가 있습니다.  사막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정신병에 걸리는 것은 달빛의 공격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달을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태양도 때로는 무섭고 달빛조차도 무서울 수가 있습니다.  인생의 어느 한 순간에 우리를 둘러싼 삶의 환경이 다 나를 공격하는 세력처럼 보여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넉넉한 그늘로 나를 품에 안아주시는 그 분, 그 분이 있는 한 환난은 있지만 그 환난 속에서 지키심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당당하게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본문이 약속하는 궁극적인 지키심은 단순히 환경이나 육체에 대한 지키심이 아닙니다.  영혼에 대한 지키심입니다.  이 단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7절을 다같이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기에 보면 "네 영혼"을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때로 하나님이 우리의 육체 가운데 고통을 허용하시는 이유, 육체의 질병을 허용하시는 이유, 환경의 혼란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그 환난과 고통을 통해서 내 영혼을 순결하고 아름답게 빚어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어떤 고난을 허용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허용되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 영혼만은 견고히 지키십니다.  내 영혼이 순결하도록, 내 영혼이 아름다워지도록,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빛나고 아름다운 영혼으로 설 수 있도록 환난을 허용하시고 환난 속에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은 인생의 순례의 길에 어둠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노래하는 자들이 될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스페인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돌이 많은 시내가 아름다운 노래를 만든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돌이 없는 시내에 가면 노래가 없습니다.  그냥 졸졸졸졸.  그러나 돌이 많은 시내는 아름다운 노래를 만듭니다.

때로는 역경이 우리의 아름다운 영혼을 선물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서 역경이 올 때 그리고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그런 시련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할 때 시편 121편을 펼치십시오.  이 시편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이 시편을 노래하십시오.  그리고 이 시편의 주인이시고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넉넉한 도움을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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