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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성된 평신도 (느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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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된 평신도 (느 2:1~10)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에 레드 우드 국립공원(Redwood National and State Parks)이 있습니다. 붉은 나무가 있는 공원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최고 112m나 되는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 밑둥치에 두 대의 차가 왕래할 수 있는 터널이 있을 정도입니다. 나무의 둘레는 20여명이 손을 잡고 둘러서야 하는 굵기이며 높이는 까마득합니다. 그래서 식물학자들은 나무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파 헤쳐 보았는데 보통 나무의 깊이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상히 여겨 조사해 보니 나무의 뿌리가 옆의 나무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나무를 '더불어 사는 나무' 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평신도는 영어로 레이맨(Laymen)입니다. lay는 헬라어 laicos에서 나온 말로서 어원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는 99%의 평신도가 있습니다. 세상에 교회를 알리는 일에 있어서 평신도는 1%미만의 성직자보다도 역량이 훨씬 더 크고 중요합니다. 평신도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맡겨진 역할을 다할 때 교회의 존재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의 협력 없이는 교회의 부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목회자와 평신도는 별개의 관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서로 돕고 보완해 가는 밀접한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교권주의자 같이 평신도를 무시해서는 안 되며, 교역자를 견제하는 세력으로서 나서는 평신도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교역자와 평신도는 하나입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과 싸우는 부대의 전사들입니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느혜미야는 큰 일을 시도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일입니다. 그는 포로의 몸으로 이국 땅까지 끌려왔지만 출세하여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고향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만 느헤미야는 그 일을 시도하여 이루어냅니다. 이 일을 이루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하기 이전에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려는 운동이 이미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닥사스다 왕은 건축하는 일을 무력으로 막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면 유대 국민들이 힘을 합쳐 메대와 바사 왕국과 연합하여 바벨론을 공격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왕에게 예루살렘 성벽건축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동안 쌓아온 업적과 지위를 다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가능함을 믿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충성된 평신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충성된 평신도가 되려면, 
 
첫째로 거룩한 근심을 해야 합니다

흑인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는 어렸을 때부터 미국 내에서 흑인들이 인종차별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자라왔습니다. 아버지도 목사입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대학원에서 간디를 연구하고 산상수훈을 중심한 무저항주의 신앙을 계승하였습니다. 흑인들의 인권과 지위향상을 위해서 12번이나 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마지막 암살 당하기 직전에 아이들에게 "내가 오늘 돌아오지 못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용기있게 살아야 한다"고 유언을 하듯이 말하고 나가서 38살의 나이에 흉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당시에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흑인들의 권익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아무리 감옥에 넣어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그를 막지 못했습니다. 낙심이 되고 절망이 될 때 더 하나님께 기도하고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갔습니다. 결국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헌신을 통하여 흑인은 인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킹 목사의 능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그는 근심가운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한 가운데 더욱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혼자 힘으로 싸웠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근심 중에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절망가운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낙심될 때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느헤미야의 얼굴에는 수색이 마음에는 근심이 있었습니다. 본디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근심거리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큰 나라인 바사에서 다니엘에 버금가는 고위직에 있었습니다. 그는 수산궁에서 왕의 술관원으로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의 벼슬은 높았고 낙천적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느헤미야에게 자기를 위한 근심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 평소와는 다른 근심의 빛이 있었습니다. 형제 하나니에게서 들은 불길한 예루살렘의 소식때문이었습니다. 소식은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소식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세상적인 근심을 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지위나 재산에 괘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인 거룩한 근심은 성도들의 삶을 바르게 인도합니다. 거룩한 근심은 가지면 가질수록 유익합니다. 충성된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일을 위한 거룩한 근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육신을 위한 염려는 많이 하면서 거룩한 근심을 하지 않는 영적 난장이가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둘째로 헌신을 결단해야 합니다

'나는 다윗 왕보다 행복합니다' 의 저자는 천안중앙장로교회 심복순 권사입니다. 그녀는 일곱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일찍이 일본에서 제과기술을 배워 1934년 고향 광덕면의 특산물인 호도를 넣은 신제품을 만들어 일본과 만주 등지에 판로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기도를 끝낼 때부터 밤 열시까지 문을 열고 장사를 하여 거기서 번 돈으로 1979년 이후 예배당을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찾아온 기자에게 말합니다. "제가 벌어놓은 돈이 어디 제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물질 가지고 생색내고 으시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좋을게 없더라구요. 하나님이 일을 맡기실 때는 결단을 해야합니다. 헌신의 기회를 놓치면 모두 허사가 되고 맙니다." 호두과자의 주인공 심복순 권사는 수산궁의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 헌신을 결단한 자였던 것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느헤미야는 두려워하는 밤을 지냈지만 그 뜻을 말해야 하는 결단의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왕께서 얼굴의 수색을 문제 삼고 근심의 연유를 물어볼 때 기회를 포착하는 용기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어진 순간에 머뭇거리고 놓쳐버리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결단의 때를 포착하지 못하면 실패자가 되고 거룩한 뜻은 실종되고 맙니다. 

느혜미야는 붕괴되고 불타버된 예루살렘의 성벽건축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왕족이나 제사장, 선지자나 유지들에게 떠넘길 생각이 없었습니다. 힘든 일을 담당하고자 희생을 무릅씁니다. 그래서 편안한 수산궁의 자리를 버리고 고생이 뻔한 유다 총독의 직무를 자청합니다. 성벽건축이라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안일을 탐하거나 육신의 유혹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고 결단해야 합니다. 룻이 목숨을 걸고 나오미와 함께 한 것처럼 결단을 해야 합니다. 충성된 평신도가 되려면 느혜미야처럼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결단의 자리에 나가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열매를 안겨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희생으로 성취해야 합니다

1798년 제너(Edward Jenner)는 천연두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젖소에서 천연두의 면역성을 가진 우두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사람에게 주사하면 천연두 면역성이 생긴다는 것을 학회에 보고했습니다. 학회에서 마지막 실험 단계에 들어갔을 때 당시 유명했던 학계의 권위 있는 의사들을 위시해서 동료 의사들은 질투와 시기에서 그를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시골뜨기 의사가 하나님과 의학을 모독한다고 했습니다. 동물과 사람을 구별할 줄도 모르느냐고, 동물에게 실험한 것이 사람에게 적용이 될 수가 있겠느냐고 조롱하면서 통과시켜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학회에서 부결이 되면 당시는 인체 실험이 어려운 때이기 때문에 빛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몇 달 전에 사람에게 주사를 해서 듣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임상 실험을 가지고 되느냐며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제너는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얼마 전에 낳은 지 열 하루밖에 되지 않은 제 아들에게도 실험을 했습니다." 그때 장내는 숙연해졌습니다. 우두를 상용하기 위해 자신의 태어난 지 열 하루 밖에 되지 않는 아이에게 실험을 했다는 말에는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너의 희생적 실험이 있었기에 인류가 천연두로부터 보호받게 된 것입니다. 희생하려는 마음이 없이는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당시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크게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포도원을 전당잡혔으며, 과중한 세금에 신음하고 있었고 심지어 딸들을 종으로 팔아 연명하는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암시장의 고리채에 묶여 경제적인 곤경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의 희생적인 호소에 감동한 사람들은 자원하여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가난한 농부들이 추수를 제쳐놓고 시온성의 성벽공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역사하였습니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막중한 희생을 무릎 쓰고 불가사의한 헌신으로 필역을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건축은 저절로 되지 않았습니다. 왠만한 노력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극심한 고난을 이기고 거둔 보배로운 결실이었습니다. 충성된 평신도들은 느헤미야처럼 희생을 달게 여겨야 합니다. 

느혜미야는 사면초가의 어려움 속에서도 견디며 힘을 잃지 아니한 일꾼입니다. 홀로 믿음을 지키고 사명을 감당한 위대한 평신도였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충성된 의인이었습니다. 충성심을 보여야 할 때 한눈을 팔아서는 결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미루어서도 안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일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 일에 몸소 실천한 신실한 평신도였습니다. 부디 착하고 의로운 평신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을 위한 일에 힘을 다하는 충성된 평신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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