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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돔을 닮아가는 예루살렘 (렘 2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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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을 닮아가는 예루살렘 (렘 23:13~15)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을 읽으면 그냥 느낄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읽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당신의 혼신을 다하여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얼마나 최선을 다하였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루를 안식하셔야 하시리만큼 진을 뺀 창조를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진을 빼시도록 창조를 하셨으니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완벽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보면 볼수록 놀랍습니다. 아름답고 완벽합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잘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그토록 아름답고 완벽하게 창조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 즉 우리 인간을 위함이셨습니다. 당신을 닮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은 사람을 당신의 자녀로 창조하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는 얼마나 우리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셨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큰 아들 가족이 미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잠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미국 집회 간 김에 다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지난 5월 하순 경에 미국에 가서 둘째 손녀를 처음 보았습니다. 둘째 손녀가 저를 참 많이 닮았습니다. 혈액형도 저와 똑같고 생김새가 정말 저를 많이 닮았습니다. 사람을 많이 대하지 못하고 평소 제 엄마하고 많이 있어서 조금 낯가림을 하는 편인데 그래도 핏줄을 아는지 유심히 처다보더니 순순히 안겨 주었습니다. 손녀가 저를 닮지 않고 제 엄마나 할머니를 닮았다면 훨씬 더 예뻤을 터인데 저를 닮아 손녀 딸 아이가 어떻게 보면 사내아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저는 저를 닮은 손녀가 너무 신기하고 예쁩니다.

핏줄이라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핏줄입니다.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 이하의 말씀을 보아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의 뜻과 소원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소원이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천국 즉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주시기 위하여 하신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포도원 주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마음은 자신의 포도원에 있지 않습니다. 장터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품꾼들에게 있습니다. 혹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마음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장터를 기웃거립니다. 오전 9시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정오 오후 세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세상에 오후 3시에 일꾼을 찾으러 장터로 가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자기 포도원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늦어도 오전 9시로 끝이 났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자기 포도원보다 일자리를 얻지 못해 빈 손들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가난한 노동자들이 눈에 밟혀 정오에도 나가보고 오후 세시에도 나가봅니다. 그 비유의 극치는 오후 5시에 나가서 일꾼을 자기 포도원으로 들여 보내는 것입니다.

참 감동적입니다. 세상에 오후 5시에도 장터에 일꾼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저는 오후 5시 장터에 남아 있던 일꾼들이 참 감동적입니다. 그 절망적인 순간에 어떻게 그 장터에 남아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감동적인 것은 그 절망적인 시간, 마치 게오르그의 25시와 같은 오후 5시 장터에 삯를 주어 집에 들여보내려고 그 장터를 찾아가는 포도원 주인입니다. 그 포도원 주인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포도원 주인의 마음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사랑입니다. 오후 5시 장터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 사랑의 극치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셔서는 마다하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고서라도 꼭 우리는 구원해 내야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고 그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만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의 면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사랑하는 우리가 불의를 행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공의로 우리를 채찍질 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에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마다 채찍질 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징계가 없다면 사생자요 하나님의 참 아들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징계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사랑하시는 세상과 사람들을 위하여 심판도 행하십니다. 불의한 세상과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 또한 의로운 세상과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징계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사람을 심판도 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전인수격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하여 무조건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은 분으로 오해하여 범죄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사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 때 하나님은 세상과 사람을 홍수로 쓸어 버리셨고,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불로 심판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동안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아 많았지만 요즘처럼 위험한 때가 없지 않나 싶습니다. 북한이 제2차 핵실험을 하고 장거리 미사일과 단거리 미사일 발사 시험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한국보다 미국을 위협하자는 것인데 그 위협의 도가 지나치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그와 같은 행동을 통하여 어느 정도 효과를 본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북한이 상식적인 나라라면 지금 쯤에서 멈추고 협상 테이블로 나와야 할 것입니다.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도가 지나치게 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위기에 몰리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북한은 상식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세 번째로 나라를 세습하겠다고 하는 나라입니다. 모든 정보와 언로가 통제되고 있는 나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정상적으로 발전된 군주국가입니다. 독재군주의 특징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정확한 정보 부재로 인한 판단착오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동행한 남한 기자가 김정일에게 통일이 언제쯤 어떻게 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 김정일이 대답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그것은 ‘내가 결심하면 되지’였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비정상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보다 강하고 무서운 사람이 없다는 착각을 하기 때문에 지나친 행동을 하다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그 하루 강아지가 바로 북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위험합니다.

저는 그런 쪽으로 조금 둔합니다만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들의 염려가 큽니다. 기도 중에 우리나라에 대한 위기를 많이 느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위기가 하나님의 진노와 맞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사회가 너무나 하나님과 멀어져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와 같은 말씀을 들으면서 ‘설마’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이 공감이 들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보지만 현재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소돔과 고모라를 닮았다고 할 수 있는 나라를 꼽으라면 우리 대한민국이 거의 탑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식년을 하면서 미국에서 일 년 가까이 생활해 보았습니다. 저녁이 되면 모든 도시가 조용해 집니다. 미국 시민의 대부분은 그 시간에 가정에 있습니다. 그것은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흥가는 어딘가 숨어 있어서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접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도시가 유흥가화 되었습니다. 우리는 유흥가와 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를 찾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유흥가 퇴폐문화는 거의 일반문화가 되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유흥가 퇴폐문화가 이렇게 발전하게 될 까닭은 이 문화가 접대문화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비즈니스와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비정상적으로 발전된 접대문화 단순히 기업을 넘어서 학계와 정치계 그리고 의료계까지 모든 분야를 다 정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퇴폐가 정말로 문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심하게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공의의 문제입니다. 정의의 문제입니다. 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되고 무능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의가 땅에 떨어지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로 가는 것이 능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고 경계하시는 것이 바로 공의가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정직하고 바르고 성실하면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을 가장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와 같은 죄를 짓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참고 기다리시지만 어느 때까지나 참고 기다려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 도가 심하면 그로 인하여 피해를 입게 되는 더 많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바로 그 시점에 다달았습니다. 다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났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유예기간을 살고 있었습니다. 심판의 때는 이미 지났고 심판을 잠시 유예해 주고 계시는 때를 살고 있었는데 돌아서지 못하고 계속 범죄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하시는 분들이 들으시는 하나님의 경고가 저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이해가 되어 집니다.

우리 사회의 심각한 두 번 째 문제는 성적타락입니다. 세상에 룸싸롱과 러브 호텔이 우리나라처럼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성적인 타락과 범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이제는 그것이 문화 즉 생활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 저는 박수웅장로님과 영국에서 함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 집회를 하였습니다. 박수웅 장로님은 마취과 의사로 지금은 전 세계를 다니시며 가정과 성에 대하여 강의를 하시고 집회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장로님은 식사 중에 저에게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목사님 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과 특히 젊은이들 중 상당수가 (그 장로님의 말씀으로는 절반 정도가) 한 주간 동안 어떤 모양으로든지 타락하고 부패한 우리 한국 사회의 성적문란에 접하여 있다가 예배에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고민하고 번민하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거의 화인 맞은 양심수준이 되어 별 가책 없이 예배와 왜곡된 사회생활을 병행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오래 동안 깊이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구약시대 유대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잘 읽어보면 지금 우리의 상황과 너무 흡사합니다. 당시 소돔과 고모라가 마치 오늘날 우리 한국과 같았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소돔과 고모라가 부패하고 타락한 것을 염려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마치 소돔과 고모라와 같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타락하고 부패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선지자들이 저들을 닮아가고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상황이 바로 우리들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이제는 교회에 까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물론이고 교역자들의 성적타락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들이 교회를 정복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있으면 그 의인 열 명을 인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니누웨에 보내시어 40일 후에 니누웨를 멸망하시겠다는 예언을 전달하십니다. 그 말씀은 40일 후에 멸망시키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40일 안에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니누웨를 멸망시키시기 위하여 요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 멸망의 메시지를 통하여 니누웨를 구원하시고 싶으셔서 요나를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니누웨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대로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합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회개를 보시고 니누웨를 사하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남한 사회는 이 시대의 소돔과 고모라요 하나님의 심판이 40일 앞으로 임한 이 시대의 니누웨입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하여 저와 여러분이 의인이 되십시다. 그러기 위하여 남을 탓하고 권면하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하십시다. 만일 세상에 살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 식에서 벗어나 세상을 닮아 있다면, 거기에 젖어 있다면 그것을 통렬히 후회하고 후회할 뿐만 아니라 벗어 버리고 돌아서십시다. 잘못된 습관을 끊어버리십시다. 그리고 영적인 순결과 육적인 순결을 회복하십시다. 우리의 모든 잘못된 생활과 습관을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어 놓고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으십시다. 그리고 순결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나님 앞에 나가십시다.

많지 않지만 우리 높은 뜻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통렬히 회개하고 그 죄에서 과감히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높은 뜻 교인들의 그 회개를 보시고 이 민족을 향하신 심판의 칼날을 거두실 것입니다.

시인 이해인 수녀의 시 ‘큰 소리로 말씀치 않으셔도’라는 시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죄는 많으면서도 뉘우침조차 사무쳐 오지 않는 불모의 사막. 돌같이 차가와진 타성은 미약한 나의 기도마저 그늘 속에 잠재우고 다신 돌이킬 수 없는 오늘을 그대로 삼키려는가? 어느새 뿌리를 내린 이기의 습관은 소중한 나의 자유를 노예로 만들었더니-시간마다 오열하여 가슴을 뜯는 소리. 종을 치세요. 종을 치세요. 한 방울의 겸허한 눈물로 답답한 이 가슴을 적실 때까지. 용기를 내어 울자. 사막의 뜨거운 모래밭을 걷기로 하자.>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도 보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오늘날 삶은 해인 수녀의 표현과 같이 죄는 많으면서도 뉘우침 조차 사무쳐 오지 않는 불모의 사막과 같습니다. 세상에 죄가 너무 넘쳐나고 있기 때문에 웬만한 죄는 죄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과 삶이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죄에 민감한 사람이 되십시다. 그리하여 윤동주 시인과 같이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과 같이 살지 아니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살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오늘 이 시대 우리 민족을 향하여 품으셨던 심판을 돌이키시게 하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니누웨 사람들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 부족한 사람의 설교를 요나의 설교처럼 들으시고 회개함으로 구원의 축복을 받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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