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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 (창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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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 (창 12:1~4)


어떤 사람이 최고급 승용차를 구입해서 운전을 하고 가다가 그만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지는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운전자가 튕겨 나가면서 팔이 하나 잘려 나가고 말았습니다. 정말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인 그런 대형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 팔이 잘려 나간 줄도 모르고 땅을 치면서“내 자동차, 내 자동차”하면서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몰려든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안타까워하며 “당신 팔이 하나가 없어졌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자기 팔을 쳐다보더니 더 큰 소리로 통곡을 합니다. “아니, 그러면 내 금시계도 없어졌잖아! 내 금시계, 내 금시계!”하면서 통곡을 하더랍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무서운 욕심이 있고 그 욕심이 이성을 누르고 있을 때는 그 욕심 외에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그 무엇도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오래전에 미국[위스콘신 대학]에서 우수한 문학 지망생들이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남학생들로만 구성하여 정기적으로 모여서 각자가 쓴 소설이며 시의 결점들을 가차 없이 서로 비평만하는 그런 모임이었습니다. 칭찬은 없고 비판만하는 그것이 자신들의 창작에 도움이 되는 듯 보여서 시작한 모임입니다. 한편 여학생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에서는 혹평은 일절 피하고 좋은 부분만 칭찬했습니다. 10년 후, 그 여학생들 중 대부분이 훌륭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유망하던 남학생들 중에서는 단 한명의 뛰어난 작가도 나오지 못했다는 재밌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보통 95%의 좋은 점과 5%의 좋지 않은 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100%로 완벽하게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95%의 좋은 점을 인정해 주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5%의 좋지 않은 점만 비판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완전한 사람도 없고 또한 스스로 완전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가진 95%의 좋은 점으로 상대방의 부족한 5%쯤은 채워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행복입니다. 

언젠가 권사님이 유산균을 주었습니다. 그것에다가 우유를 부어서 봉해두면 하루만 지나도 눈에 보일 정도로 쑥쑥 자라서 야쿠르트로 먹을 수 있습니다. 희한한 것은 이 유산균의 정해진 양이 일정한 크기까지 자란 뒤에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반으로 나누어주면 또 자랍니다. 이렇게 계속적으로 나누어주면 나누어주는 원래의 크기로 자라가는 것이 유산균입니다.

우리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행복이란 나누어 줄 때 그것이 또 다른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삽니다. 재물을 더 가지게 해달라고..., 성공하게 해달라고..., 좋은 집을 사게 해달라고..., 그러면 내가 행복하겠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의 소원 가운데는“베푸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라는 소원이 적습니다.“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거나 그것을 행복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행복에 대해서 잘못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가장 큰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인데 그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부족한 것을 내가 가진 것으로 나누어 주고 보태주고 도움이 되는 삶을 산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많아서가 아닙니다. 남아서도 아닙니다. 다만 그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 이런 차원의 행복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이 다중요하겠습니다만 창세기 12장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십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시면서“너는 복이 될지라.”는 말씀을 덧붙여 하십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자면 복덩어리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복덩어리라는 말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말을 주로 언제 사용합니까? 예로부터 집안에 며느리가 잘 들어오면 복덩어리가 굴러 들어왔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한 집안에 새로 들어 온 며느리로 말미암아 가정이 화목하고, 평안하고, 좋은 일이 생길 때 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또 다른 행복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린다는 의미로 복덩어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게 얼마나 큰 복입니까? 

교회에도 이런 복덩어리가 필요합니다. 내가 교회에 나옴으로 말미암아 전도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내가 있는 곳마다 평안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가는 곳마다 불화가 생기고,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에 상처만 준다면 이런 사람을 복덩어리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합니까? 죄송한 표현입니다만“웬수 덩어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가정이든, 교회든 어떤 곳에든지 웬수 덩어리가 아니라 복덩어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는 겁니다.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복 받는 것이 곧 내게 복입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 것까지 생각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내가 먼저 누릴 만큼 복 받고 보자 합니다. 그래야 남을 돌아 볼 여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평생 발붙일 만큼도 땅을 얻지 못하고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부자도 아니고 자식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남에게 내 세울 만한 출세를 한 사람입니까? 남을 호령할만한 권세를 가진 사람입니까? 그런 게 없습니다. 한평생 천막 걸머지고 유목민으로 이리 방황하고 저리 방황하고 심지어는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사실 바뀐 성경에 “너는 복이 될지라.”고 했습니다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부분은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표현이 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어쨌건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모든 민족, 모든 나라,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깊고 귀중한 말씀입니까? 

사람은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 주었다거나, 아무 조건 없는 무조건적인 봉사, 아무 바람도 없는 희생적 봉사를 할 때 정신이 가장 맑고 또 몸이 건강해 질 수 있다고 합니다. 희생적 자원 봉사를 할 때는 대뇌에서 아주 높은 질의 엔돌핀이 쏟아져 나온다고 합니다. 의사의 말입니다. 베푸는 만큼 평안하지만 베풀지 아니하고는 절대로 평안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너무 슬픈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온 나라가 비통에 빠지고 가슴아파해야하는 현실이 우리를 결코 평안하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더욱 마음이 아프고 씁쓸한 것은 이 일을 두고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더 시끄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인데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시끄럽습니다. 

여러분, 애도라는 말은 말 그대로 슬퍼하며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다른 말들이 필요하겠습니까? 죽은 사람의 허물은 덮어주어야 하고 업적은 기리는 것이 애도기간의 가장 올바른 예의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사람이 살면서 100%완전한 사람도 없고, 100%불완전한 사람도 없습니다. 살아 있을 때는 얼마든지 비판도 할 수 있고, 욕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 앞에 놓고는 욕하는 거 아닙니다. 적어도 애도기간에는 모든 것을 덮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업적만 기려 주는 것이 옳습니다. 이제부터가 문제입니다. 

이 사건을 가지고 왈가왈부 혹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하면 안 됩니다. 이건 나쁜 것입니다. 죽은 자의 명예도 지켜 주어야합니다. 그런데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당한다면 이건 안 될 일입니다. 제발 이제 나라가 평안했으면 하는 바람이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괜히 정치한다는 사람들, 경제 한다는 사람들 물고 찢고 싸우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시기 질투 중상모략 언제까지 이래야 됩니까? 정말 목불인견입니다. 

[모택동]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칼이 없는 전쟁이 정치요, 칼이 있는 정치가 전쟁이다.” 이런 전쟁을 하고 있는 이 땅에 어떻게 복이 임하겠습니까? 이렇게 답답하고 괴로운 세상을 보시면서 한편으로 생각하면 천지개벽을 해서 당장 문제를 처리해야 될 것 같으나 하나님은 그리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방식이 나옵니다.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통하여 서서히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선택의 도리입니다. 

하나님은 만백성을 구원하려고 한사람을 먼저 선택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선택받은 자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증인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구원하시기를 좋아하셨습니다. 물리적이고 기회 적이고 운명적이고 무슨 천지개벽을 하는 이런 방법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한 사람 한사람을 감화하고, 중생케 하고, 가르치고, 바로잡고 그리고 그 역사가 파급되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 위대한 일의 출발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복의 근원 되게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감당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이 나라를 행복하게 해야 하고 복되게 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나로 인하여 나라가 복을 받고 민족이 복을 받도록 내가 복의 근원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감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로마로 가는 배 한 척이 있습니다. 276명이 타고 있는데 그들의 행동으로 보아서는 이 배는 파선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장도 백부장도 선주도 못됐어요. 그러나 그 가운데는 바울이라는 사람 하나가 있는데 이 바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배를 무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이“너 때문에 그 사람들을 살려준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런 사람들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장이라도 이 땅을 멸하실 수 있지만 우리를 향하여“너 때문에 살려준다.”하신다면 이것이 곧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 시대에 복의 근원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이 살아야할 바입니다.  

또 생각해 봅시다. 소돔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도 하나님은 의인 열 명을 찾았습니다.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인 열 명이 없었습니다. 렘 5:1절에도 보면 유다백성들의 허물로 인하여 예루살렘을 멸하시려 하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참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복의 근원입니다. 망하는 세상 가운데 이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의와 그의 믿음과 그의 진실과 그의 순종을 보시고 전체를 사하십니다. 

순종의 출발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떠나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보면 그것은 아브라함이 일찍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버리고 떠나야했던 세상적인 가치에 불과한 것인지 모릅니다. 아니 우리에게는 그렇게 보여야 됩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복의 근원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로 보자면 아브라함이 버린 그것들이 결코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욕먹을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어느 것 하나 욕먹지 않을 만한 것이 있습니까? 특히 우리들의 정서로 보자면 능지처참 형을 받아야 할 죄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버린 것의 몇 갑절을 받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주목할 점입니다. 인간적으로는 가장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고, 지켜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의 근원으로 살려고 하는 데는 무가치한 것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복은 근원으로 사는데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게 하시고 부르시고, 동행하시고, 채워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이 어둡습니다. 보이고 들리는 것은 다 못마땅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세상만 탓하겠습니까? 문제는 나 하나의 문제입니다. 내가 복의 근원이 될 때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의 근원이 된 것을 알고 그 사명을 지켜 나갈 때 이 민족 앞에 하나님께서는 큰 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이 시대에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함께 하셔서 그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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