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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화목 하라 (막 9:4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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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화목 하라 (막 9:45~50)


지난 시간에는 우리 교회 금년 표어인 “사랑으로 일하는 교회”에 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으로 인간 만사의 원동력이 될 만큼 귀한 것입니다.

사랑 없는 가정이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가정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아무리 웅장한 건물과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많은 교역자와 많은 성도가 모인다 할지라도 거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가정에 사랑이 있고 교회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반드시 여러 가지 결과가 나타나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 봉독한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입니다. 제아무리 크고 아름답고 좋은 저택에서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이 산다고 할지라도 그 가정에 화목이 없다면 그것은 불행한 가정입니다.

잠17:1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저 일용한 양식만 있고도 온 식구가 화목하게 산다면 그 가정이야말로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러나 저택에 최신 시설을 갖추고 없는 것 없이 호화로이 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화목하지 못하고 그저 이런 일 저런 일로 번번이 싸우고 다툰다면 가정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옛말에도 보면 “가화 만사성”이라고 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면 만사가 잘됩니다. 그러나 가정이 불목 하면 만사가 불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화목을 이루어 가정도 화평하게 되고 사회도 화평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화평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유엔(UN)이 세계 평화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우였으며, 얼마나 많은 재물을 투자했으며,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과 피 흘림의 연속입니다. 평화의 근본은 사람들의 정책과 수단과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랑은 화목을 낳고 화목은 평화를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본받지 않고는 절대로 화목을 이룰 수 없으며 화평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떠난 어떤 인간의 구호나 노력도 결국은 무지개를 잡으려는 허사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보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이 반드시 화목과 화평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 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의 화목 제물로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려 죽으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롬5:10절에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이상은 화목은 절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진정한 화목이 있고 하나님과 화목케 된 성도들 가운데 진정한 사랑과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 가운데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욥22:21절에 보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과 속죄의 피를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와 진정으로 회개할 때에 누구든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진정한 평안과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들이요 화목을 얻은 복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롬5:11절에 보면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였고

고후5:18-19절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유엔의 어떤 기구도 화목케 하는 직책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화목을 얻은 성도들만이 화목케 할 수 있는 직책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금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 보면 제물을 드릴 때에 소금을 뿌려서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레2:13절에 보면 “네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제물을 드릴 때에 소금을 치라고 하였습니다.

“소제”란 채소나 식물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 물에는 반드시 소금을 처야 하고 양이나 짐승을 드릴 때에는 반드시 죽여서 드려야 합니다. 산채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산것을 죽여서 드립니다. 그러므로 죽인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제는 곡식이나 채소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채소나 곡식을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죽이는 대신에 소금을 치는 것입니다.

소금을 침으로 채소의 숨을 죽일 수 있습니다. 뻣뻣한 채소가 소금이 들어가면 숨이 죽어 누굴 누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채소든 소금을 치면 다 숨이 죽어 부드러워집니다. 소금을 치는 의미는 내가 죽는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안목과 정욕과 자랑과 교만, 그리고 죄악을 그대로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온전히 죽어야 합니다. 내 육신의 욕망을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아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금을 처야 합니다.

“네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언약의 소금”이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아주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약속의 소금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스스로가 소금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1: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어린 양으로,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피 흘려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마음속에 영접하는 자마다 그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소제 물에 소금을 치듯이 우리 심령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자신은 죽어지고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살아 역사 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을 치라” 하나님의 희생이 여기 있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소금은 녹아 없어지는 것 같으나 그대로 입니다. 그러나 채소는 다 숨이 죽고 맙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의 약속이 “소금”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소금은 이렇게 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소금은 뻣뻣한 것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소금되시는 그리스도, 소금되시는 복음에 접할 때에 그 인격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됩니다.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직도 온유를 배우지 못했고 아직도 겸손에 이르지 못했다면 소금이 덜 처져서 그렇습니다. 아주 깨끗하게 녹아 저야 온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들 자신의 인격이 아닙니다. 복음이 주는 효과입니다. 십자가가 주는 효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갈 때에 그 인격이 아주 뼈가 없는 것처럼 유순한 인격으로 변하게 됩니다. 바보처럼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소금은 사람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겸손하게 만듭니다.

이런 신자가 될 때에 자신이 또한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가 있는 곳마다 화목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화목은 내 자신이 희생과 온유와 겸손으로 대할 때에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화목케 하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늘 생각나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젊었을 때에 신천 장터를 주름잡던 깡패요, 불량배였습니다. 악명 높은 것으로 유명하게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장보러 오는 사람들이 성황당 나무에 대고 오늘 김익두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겠습니까? 김익두 만나는 날이면 그날은 망치는 날이 되고 맙니다.
무엇이던지 집어 가면 그만입니다. 아무 소리도 못하고 뺏기고 맙니다.
그런 사람 김익두가 예수 믿고 중생하여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교통 수단이 변변치 못하던 시절입니다. 그가 부흥회를 인도하러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재를 넘어가다가 인적이 뜸한 길이라 윗통을 훌훌 벗어버리고 앉아서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때 술이 잔뜩 취한 청년 하나가 건들건들 올라옵니다.
가까이 오자 청년이 김익두 목사님을 보더니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냐”하고 다짜고짜 주먹질을 합니다. 이리 때리고 저리 때리고 툭툭 치는데, 남달리 크고 뼈가 굵은데다가 주먹 쓰기로 말하면 남에게 뒤질 사람이 아닌 이 양반이 그저 고스란히 맞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먹질 발길질에도 반응이 없고 욕지거리에도 대꾸가 없습니다.
 
맞는 쪽이 조금이라도 반항을 해야 때리는 놈도 재미가 나지, 이건 아무리 해도 시비가 되지 않고 보니 나중에는 때리는 녀석도 지레 지쳐 가지고 씩닥 거리며 우둑커니 서 있습니다. 그제야 김익두 목사님은 청년의 손을 꽉 잡으면서 입을 엽니다. “형님, 다 때렸소?” 사실 김익두 목사님은 당시에 장사였습니다. 악수만 한번 해도 으스러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손에 꽉 잡힌 것이니 알 만하지요.

기가 팍 죽으면서도 짐짓 목청을 짜내서 대꾸합니다. “다 때렸다 어쩔래?” 목사님은 정색을 하고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는 청년이 멍해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 목사님은 또 한마디 입을 엽니다. “내가 김익두야.” 순간 청년은 머리끝이 쭛삣해지면서 등줄기로 식은땀이 쫙 흘러내립니다. 무너지듯 두릅을 꿇고는 살려 달라고 싹싹 빕니다.

“내가 뭐라고 했던가?”하고 김익두 목사님은 청년을 일으킵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이었다면 너는 오늘 이 자리에 뫼를 썼다. 장사될 뻔했다. 그러나 내가 예수 믿는 덕에 네 명이 남아나게 되지 않았느냐? 그러니 복은 네가 받은 거지 뭔가?” 가까스로 반정신을 수습한 청년이 목사님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때 목사님은 “어떻게 하긴..... 날 따라와야지”하고 청년을 부흥회에 데리고 갔는데, 그 청년은 후일에 그 마을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제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 온유하십니까? 사람들이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 이런 저런 것은 잘 참아 내다가 한가지 못 참는 것이 있습니다. 기분 나뿐 일은 못 참습니다. 기분 나쁘면 천당도 포기하고, 예수 믿는 것도 포기합니다.

여러분! 기분 나쁘더라도 교회에는 나와야 될 것 아닙니까? 기분이 나쁘더라도 예수는 믿고 봐야 할 것 아닙니까? 말씀은 가까이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기도는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기분 나쁘면 기도도 하지 않고 교회에도 나오지 않고 천당도 안가겠다고 합니다. 기분이라는 것은 그렇게 맹랑합니다. 그 몇 푼 안돼는 기분---온전히 소금을 쳐버려야 합니다. 숨을 콱 죽여 버려야 합니다.

문제가 많습니까? 근심이 많습니까? 고민이 많습니까? 아직도 덜 죽서 그렇습니다. 소금을 한줌 더 쳐주어야 합니다. 한번만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데 뭐가 그리 복잡한지 모르겠습니다. 뭐가 대단한 기분이라고 말썽입니까? 뭐가 대단한 인격이라고 자존심이 상합니까? 소금은 깨끗이 숨을 죽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억울한 소리도 듣고, 그렇지 않은 소리도 듣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있는 말도 듣고, 없는 말도 듣는 것입니다. 좋은 말, 좋은 평판 듣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평판이 어떻게 정확할 수 있습니까? 좀 억울하면 어떻고, 좀 분하면 어떻습니까? 소금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화목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각자 각자가 소금으로 콱 저려야 합니다. 그래야 화목을 이루며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금은 값비싼 것이 아닙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값싼 것입니다. 대단치 않게 보이지만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모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소금을 처서 겸손하게 만듭니다. 온유와 겸손 다음에야 화해가 가능합니다. 화목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교만한 곳에는 화목이 없습니다. 서로 팽팽히 맞서 가지고 밤새도록 싸워 보십시오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낭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됩시다”아무리 외쳐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할 때만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유가 내 의지로 됩니까? 온유하겠다고 해서 온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해지겠다고 맹세하니 겸손해집디까? 아닙니다. 결국은 소금이 들어가야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만 온유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절대로 안됩니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만이 온유해집니다.

겸손하기 힘듭니까? 한번 더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땅을 들여다보고 옆 사람을 보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옆을 보면 경쟁심과 질투심이 나옵니다. 그러나 위를 보고 나를 위하여 주께서 죽으신 십자가를 보면 할 말이 없습니다. 뭐가 잘났다고, 뭐가 대단하다고 교만할 수 있단 말입니까? 교만한 가운데는 화목이 없습니다.

교만한 마음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다투면서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원망스러운 마음을 품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원한이나 원망을 품고는 안됩니다. 섭섭한 마음을 가진다던가 무엇이 속에 맺힌 마음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금을 두고 화해해야 합니다. 소금 안에서 하나 가되는 것입니다. 누구와도 그렇습니다. 남편과 아내도 그렇고, 친구와 친구도 그렇습니다. 소금을 두고 온유 겸손해질 때에 비로소 화목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화목 자체를 위한 노력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소금이 녹으면 형체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맛은 여전합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항상 살아 역사 합니다. 그런고로 화목이란 결코 타협이 아닙니다. 무조건 양보도 아닙니다. 다만 형체가 없어질 뿐입니다. 소금이라는 맛은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그러고도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금의 오묘한 역사입니다.
소금을 두고 화목 하라는 것은 죄와 타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의 길로 함께 가라는 말도 아닙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으라는 얘기도 아니오, 더러운 이득을 함께 취하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나 하나는 희생했습니다. 내 형체도 없어지고 내 고집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맛, 그리스도만은 그대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내 이득도 없고, 내 명예도 없고, 내 체면도 없고, 사람들이 볼 때에 바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소금입니다. 짠맛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내 형체는 없어져도 짠맛 예수, 그 예수 진리는 그대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금의 역할입니다.

소금은 자기 희생을 말합니다. 자기희생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처럼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앞에 다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자기희생을 완전히 하면서 신앙의 본질인 진리를 지켜 나갈 때에 그 앞에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화목은 둘이 앉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사과를 하고 사과를 받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치를 따진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소금을 두고 화목해야 합니다.

여행할 때에 그 길을 가로막는 것은 태산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발 속에 들어온 조그마한 돌 하나가 여행자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원수가 아닙니다. 신앙의 원수는 내 안에 있는 교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핍박이 많아서가 아니오 세상이 거칠어서가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교만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화목 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소금은 그리스도요, 십자가의 복음이요, 진리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어느 가정이든, 어느 직장이든, 어느 불화한 곳이든 정말로 소금된 한 인격이 있어서 거기에 들어가 녹아지고 본분을 다할 때에 문자 그대로 “소금을 두고”화평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금과 같이 화목케 하는 복된 사명을 다하여 가정이 화평을 이루고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화평과 사랑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금년이야말로 화목케 하는 전도의 직분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이 복음 화되고 소금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온 가정이 화목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이루는 복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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