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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보혜사 성령님 (요 14:16~1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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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 성령님 (요 14:16~18, 26)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실 때가 가까웠다. 이별에는 슬픔과 아픔이 따른다. 두려움도 따른다. 예수님께서 이제 곧 세상을 떠나신다는 말씀을 했을 때, 제자들의 가슴에는, 근심과 슬픔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고,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했다. 

“다른 보혜사”는 성령 하나님을 말한다. 보혜사(保惠師, 지킬 보, 은혜 혜, 스승 사)이다.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라고 하면, 보혜사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가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쥐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보혜사의 일을 하신다. 

(요일2:1下)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다. 여기서 ‘대언자’라는 말과 ‘보혜사’라는 말은, 원어로 ‘파라클레토스’라는 동일한 단어로 되어 있다. 예수님은 범죄 한 우리를 보호하고, 끝까지 지켜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연약하여 죄를 범할 때가 참으로 많다. 그래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처럼, 돌에 맞아 죽을 위기, 지옥에 던져질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못 자국 난 손을 내어놓으면서, 우리의 대언자, 보혜사가 되어주신다. 

그런데 다른 보혜사라 했다. 다르다는 말은 알로스(ἄλλος)로, “같은 종류이지만 다른”이란 말이다. 다른 종류(ἕτερος)가 아니다. 예수님과 같이, 인격도 사랑도, 능력도, 같은 분이지만, 예수님과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시다. 

보혜사 성령님도 하나님이시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오셨으므로, 눈으로 볼 수 있었지만, 보혜사 성령님은 영으로 오시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음이 다르다. 따라서 신천지의 이만희는 인간의 모습으로 왔기에, 절대로 보혜사가 될 수 없다. 

성령님은 바람과 같이, 불과 같은 모습으로도 오시고,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도 오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면서, 아버지께 구해서 성령님을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고 말씀했다. 

프랑스가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던 땅에, ‘마요즈’라는 선교사가, 성경을 번역하면서 선교를 하고 있었다. 선교사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보혜사라는 어려운 단어로 고생하게 되었다. 그 말을 어떻게 원주민 말로 바꿀 것인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좋은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어느 날 도와주던 사람에게, 성령은 이런 분이라고, 자세히 설명하면서, 어떻게 번역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한참 고민하다가 “우리 옆에 구부리는 사람”이 좋겠다고 했다. 그 뜻을 물어 보니 아프리카에서는 한 번 여행을 하면, 3-4개월 정도 여행을 한다. 

그때 많은 짐꾼들이, 짐을 지고 대열을 지어, 그 여행을 따라 나선다. 그 짐꾼 중의 병에 걸려서, 더 이상 여행을 못하게 되면, 그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도록 하고, 병든 사람은 여행에 방해가 되니까, 그냥 버려두고 가면, 이 사람은 굶어 죽던지, 밤에 얼어 죽던지, 맹수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그를 불쌍히 여겨, 그를 업고 마을까지 가서, 구해 주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병든 사람을 업기 위해, 그 사람 옆에 구부리는 사람을 말한다고 했다. 참 좋은 단어라고 생각해서, 그 번역자는 “옆에 구부리는 사람, 성령”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한다. 

우리가 죄에 빠져 지쳐 쓰러져 죽어갈 때, 악령의 포로가 되어 있을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친히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엎드려서 허리를 굽히시고, 우리를 업고 가시는 정말 좋으신 분이시다. 이런 주님을 환영하고 있나요? 그러면 보혜사 성령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시는가? 

1.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세상은 성령님에 대해 알지 못한다. 

세상은 성령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세상의 선한 사람들에 대해선 이야기한다. 선한 사람이 대학이나 병원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면, 세상은 그의 선행을 알아준다. 만일 어떤 의사가 나병환자를 위한 진료소를 운영한다면, 그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그에 관한 책들도 출판된다. 

세상은 선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지만, 성령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 그들의 자존심이 상하게 된다. 자선단체 같은 곳이,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패한 것들이다. 

진리의 성령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성령님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만이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만, 성령님이 그 속에 거하게 된다. 성령님이 거하신다는 말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성령님이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진리를 따라가게 된다. 

성령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면, 생명이 넘치게 된다. 그러나 성령님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 교회 속에 있지만, 성령님의 역사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사람이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기에, 어떤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1) 종교적인 주일 신자들은, 성령 충만을 싫어한다. 
종교적인 주일신자들은, 부흥이 일어남이 오히려 불안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그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말씀과 분리되어 있다. 

주일이 되면 교회에 가서, 자신의 종교를 닦고 열심을 내지만, 교회를 떠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교회에서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기에, 성령 충만한 삶을 원하기 않는다. 

(2) 안락을 좋아하는 신자들은, 성령 충만을 싫어한다. 
종교 때문에 불편해짐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원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교회나 종교나 신앙이, 그들의 계획이나, 신나는 일들을, 방해할까봐 그렇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인생을 설계한다. 자기 마음대로 계획을 세운 다음, 하나님이 축복을 부어주기 원한다.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헌신도 하지만, 자기 욕심으로 세운 계획을 바꿀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 계획을 바꾸어 놓음을 명심하자. 

(3) 재미를 추구하는 신자들은, 성령 충만을 싫어한다. 
주님으로 인한 기쁨이 아니라, 오락적 즐거움을 기독교에서 찾으려고 함은, 참으로 황당한 노릇이다. 예배적인 기쁨을 누려야지, 오락적인 예배가 되면 안 된다. 

(4) 문화적 신자들은 성령 충만을 싫어한다. 
교회의 문화적 가치가 유익을 준다고 믿으며, 문화적 분위기속에서 성장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에서 취미활동과, 자녀양육 같은 것들에 대한 강좌를 듣고, 좋은 책을 소개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영적 성장에 관심을 쏟는, 자들이 있으면, 문화적 신자들은 참 불편함을 느낀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진리에 순종하는 자들이 성도들이다. 성도가 되자. 진리와 불의는, 함께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성령은 진리이다. 성결이다. 

그래서 세상과 함께 할 수 없다. 성령님은 오셔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시고, 세상에서 우리를 분리하게 한다.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살았던 옛사람을 벗어버리게 하고, 사망으로 이끌고 가는 사단의 권세를 꺾어 버리신다. 

2. 보혜사 성령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엡1:14)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18) “내가 너희를 고와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인 고아다. 

성령님이 없으면, 우리의 영적인 교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성령 하나님을, 바람이나 물이나 불같은 무생물로 생각하는데,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고 계신다.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 

성령님이 오심으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살게 되었다. 가족이란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가장 친밀하게 살아야 가족이다. 교제가 없는 가족은 올바른 가족이 아니다. 성령님은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만들어 주신다. 

두 유형의 성도가 있다. 한 사람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반면에, 한 사람은 고아같이 산다. 모든 고민을 혼자 다 하고, 모든 계획을 혼자 다 짜고,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다 하려고 한다. 고아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이루어간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이다. 우리에게는 구하기만 하면, 능력을 주시는 아버지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구하기만 하면, 마귀의 일들을 멸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자세이다. 이런 자녀의 권세를 활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중국에 임어당이라는 사람이 있다. 하버드대학에서 40년 동안 강의를 했던 석학이다. 대만 양명산 밑에, 임어당의 무덤과 그가 살던 집이 있다. 그 집에 가보면 많은 문집들이 있다. 지금도 그 문집들을 읽을 수 있다. 그 문집 중에 이런 글이 있었다. 

“그리스도 없이 보낸 40년은 나에게 있어, 완전히 고아와도 같은 삶이었다.” 그 말이 인상적이다. 임어당은 예수님 없이 살았던 인생을, 고아와 같은 인생이었다고 표현한다. 자신이 많은 공부를 하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자신의 정신 상태는 고아였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다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평안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함으로, 고아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회복하기 바란다. 

부모 있는 아이와 고아의 차이점이 어디서 나타나는가? 같이 놀 때는 모른다. 그런데 부모 없는 자식과 부모 있는 자식이 언제 구분되는가? 저녁이 되면 구분된다. 해가 지면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서둘러서, 엄마 아빠를 만나러 돌아간다. 그러나 고아는 돌아갈 곳이 없다. 그래서 방황한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구분될 때가 언제인가? 죽을 때 보면 안다. 불신자는 죽을 때, 불안과 괴로움 가운데 떤다. 반면에 신자는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평안함 가운데 또 확신 가운데 아버지의 집에 찾아갈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신분은,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고아가 아니다. 

하나님의 일들을 다 이루고 난 다음, 우리는 돌아갈 장소가 있다. 평안히 거할 장소가 있고, 영광의 장소가 있음을 꼭 기억하시고, 생명을 바쳐서,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 바란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말씀해 준다. 

세상 사람들이 왜 어리석은가? 생명을 걸어야 할 가치가 없는 것들에, 생명을 거니까 어리석다.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했는데, ‘그리스도’라는 말 대신에 다른 것들을 대입해 보시기 바란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돈이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돈이 유익한가? 죽으면 끝이다. 그리스도 대신 쾌락을 대입해하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쾌락이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쾌락이 사는 것이 목표였던 사람들은, 나중에 죽으면 지옥이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명성이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나이 오십이 넘으면, 이제 심각하게 살아야 한다. 

몇 년 안 남았다. 예수님 앞에 서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준비하셔야 한다. 하나님 앞에 겸허한 자세로, 내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지, 내 안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살아야만 한다. 우리 남은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디 한눈 팔 수 있는가?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가도록 만들어 주신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만 하는지, 말씀하신다. (엡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고 했다.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란다. 

3.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쳐 주신다(26).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무엇을 가르쳐 주십니까? 

(1)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르쳐 주신다(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도 가르쳐 주신다. 

(롬8: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친자소송을 하면 반드시 유전인자를 조사한다. 아무리 내 자식이라고 해서, 아이에게서 유전인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부모가 아니듯이, 우리 가운데 보혜사 성령님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고전12: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하였다. 우리가 아무리 큰일을 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안 된다. 

(2) 성령님은 우리에게, 성경 말씀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것을 신학적인 말로 “성령의 조명”이라고 한다. 성령의 조명이 있을 때, 우리는 성경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된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해 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생생히 듣게 되고, 뜨겁게 느끼게 되고, 분명히 깨닫게 되고, 마음을 활짝 열고, 모두 받아먹게 된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읽을 때에, 이렇게 기도한다. (시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그러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성경 말씀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는지, 도저히 해석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오시자, 십자가 사건을 마음속에 해석해 주셨다. (행2:22-24) 베드로가 성령을 받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바대로, 내어준바 되었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계획과 뜻을 따라, 그리스도가 죽으셨지, 우연하게 또한 무능력해서, 할 수 없어서 죽으신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놀라운 대속의 은총임을 깨달았다. 

(3) 성령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성령님의 감동을 받을 때, 기도할 말이 저절로 생각난다. 성령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때로는 우리 대신 기도까지 해 주신다. 간절하고 뜨겁게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나에게 기도의 영을 부으시고, 부르짖음의 영을 부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4) 성령님은 우리에게 전도를 가르쳐 주신다(요15:26-27).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가장 큰 일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이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증언하도록 도와주시는 일이다.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저 팔레스타인의 한 구석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으로 끝나고 말았고, 사람들에게 잊어버린바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오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 역사적 인류적, 전 세계적 구원 사건으로 만들어 버렸다. 

베드로에게 성령님이 임했을 때, 힘 있게 주님을 증언했다. 스데반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 돌에 맞으면서도 힘 있게 주님을 증언했다. 빌립에게 성령님이 임했을 때, 빌립은 세계 곳곳을 찾아다니며, 힘 있게 주님을 증언하였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권능을 주셔서, 주님을 힘 있게 증언하도록 하신다. 

이제 말씀을 맺겠다. 보혜사 성령님이 누구신가? 예수님과 꼭 같이,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위로해 주시는 분이다. 성도들 가운데 와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위로하시고, 도와주시고, 변호하시고,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 고마우신 분이다. 

우리는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을 높이 경배해야 한다. 보혜사 성령님이여 우리 가운데 항상 충만히 임하여 주셔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이런 은혜와 축복이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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