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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성령충만함을 구해야 합니다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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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걷지 못하고 구걸하던 한 장애인이 나옵니다. 본문 말씀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단서들이 나오는데, 먼저,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구걸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걸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그는 남의 도움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날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전 문 곁에 있었다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이 어떠했다는 것에 대한 정보는 제공해 주지 않지만, 다만, 그곳이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어서 소위 말하는 명당 자리라고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그 사람이 거지 중에 왕초가 아니었나 하는 얘기도 합니다. 성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미문에서 기도하러 올라가는 사람이 많이 있는 그 좋은 자리에서 40년이나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런 그에게 그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그가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 시간에 맞춰서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중이었는데,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성령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선 2장에서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성령강림을 체험했고, 베드로는 성령의 임재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 날에 3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걷지 못하던 그 사람은 그렇게 성령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됐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그 사람은 성령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로, 그는 그날도 그곳에서 늘 해오던 대로 돈을 구걸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려던 베드로와 요한을 발견한 그는 납작 엎드려서 “선생님들, 돈이 있으시면 조금만 도와주십쇼.”라고 얘기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 사람을 눈여겨봅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십시오.”라고 얘기합니다. 그 걷지 못하는 사람은 뭘 주려고 그러나보다 기대하면서 고개를 쳐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이 말과 함께 베드로는 그의 오른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한 번도 일어나서 걸어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가면서 걸을 뿐만 아니라, 뛰어다닐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미했다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충만한 사람과 그렇지 못했던 사람의 극명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성령충만과는 거리가 멀었던 걷지 못는 사람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그가 원하고 그가 기대했던 것, 그의 꿈은 무엇입니까? 그는 그저 동전 몇 닢 얻기를 원하고 기대했습니다. 그의 꿈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더 많은 동전을 적선해 주고, 그래서, 보다 잘 먹고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앙이 있어서 성전 문 곁에 앉아 있었다기 보다는, 그곳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기 때문에, 동전 몇 닢이라도 더 얻기 위한 육신적인 생각으로 거기에 앉아 있는, 육신의 사람이었습니다. 은과 금을 구해봐도 그것으로는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지, 자신의 병이 고침을 받거나 영적인 문제도 전혀 해결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그와 같이 동전 몇 닢이나 구했겠습니까? 그것은 그는 성령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충만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꿈과 환상을 보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기대하고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드리면서 살아가게 될텐데, 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무엇이냐면, 우리의 모습이 그 걷지 못하던 걸인의 인생과 비슷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장애인이고 거지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사람과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은과 금을 추구했던 것처럼,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은과 금이 아닙니까? 이것은 곧 우리가 돈 돈 하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이것을 목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은과 금은 무엇입니까? 은과 금은 내 자아실현이 될 수도 있고, 학업과 직장에서의 성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좋은 배우자와의 결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은과 금이 됐든지 그 걷지 못하던 사람과 같이 우리는 은과 금을 더욱 소중히 여기면서 그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아닌 것 같습니까? 아닌 것 같다면 이 이야기를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존 하이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인도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이었고, 이제 선교를 위해 배를 타고 인도로 갈 때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목사님이었고, 그는 젊어서부터 선교사로 헌신해서 아주 훌륭하고 위대한 선교사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의 야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으로 잘 위장되어 있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자아 만족과 명예욕이이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은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친구 목사님이 보낸 편지에는 짤막한 몇 마디만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은 “사랑하는 존, 네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까지 너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을 거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그 편지를 보고서 화가 치밀어 올라서 편지를 구겨서 바닥에 던졌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까지’라는 말은 그가 지금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는 보통 선교사가 아니라 최고의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인도에 가고 있는데, 이런 나는 당연히 성령충만한 사람인데, 나를 성령충만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고, 어처구니 없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분노 가운데서 한참 동안 번뇌하다가 그는 구겨서 던져버렸던 편지를 다시 집어 들고 편지를 다시 읽고 또 읽었습니다. 다시 편지를 보면서, 그의 마음은 여전히 괴로웠지만, 아버지 친구 목사님이 옳다는 것과 자신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면서 그는 자신이 품었던 꿈이 이기적인 야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 자신은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는 성령충만을 구했습니다. 그는 배가 항구에 당도하기 전에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말리라는 결심으로 간절히 기도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봉사하는 무명의 선교사가 되어도 좋으니 다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이 영적 몸부림은 항해가 끝날 무렵까지 계속됐고, 그 일을 통해서 그는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위대한 선교사로 태어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선교사님이 구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돈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선교사가 되겠다는 고상한 비전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 역시 은과 금이었습니다. 위장되어서 잘 몰랐을 뿐이었고, 그가 추구했던 것 역시 은과 금이었고, 그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성령충만함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 성령으로 충만해 졌을 때에 그의 삶은 위대한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성령충만을 구하며 살아야 할텐데,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성령보다는 은과 금을 추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은혜의 자리에 있기보다는, 내가 있고 싶어 하는 자리에서, 내가 만나고 싶은 친구 만나서 즐기는 것이 더 좋고, 영적인 일에 열심을 내기보다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이 더 좋고, 성령충만함을 받는 것보다 은과 금이 내 안에 더욱 충만하기를 구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성령충만은 우리의 삶의 목표나 우리의 소원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고, 걷지 못하던 사람과 같이 고작 동전 몇 닢을 더 얻는 것만을 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백지수표를 주셨는데 거기에 30만원이라고 적고 고작 그것이나 바라고 있다면... 성령충만은 300억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인데 성령충만에는 관심이 없고, 30만 원짜리 인생을 살아간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성령충만 해야 합니까? 은과 금을 구하는 것보다도 왜 성령충만을 우리가 구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본문 말씀에 나오는 걷지 못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은과 금을 기대해봐야 그것이 헛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문제를 전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이 은과 금에는 없습니다. 은과 금을 구해봐야 임시변통의 것밖에 되지 않고, 영원한 것, 영적인 문제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과 대비되는 성령충만 했던 베드로와 요한을 이제 보겠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기대 이상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다만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을 뿐이었는데,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키는 기적을 체험했고, 그 사건을 통해서 5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어졌습니다. 

  성령충만했던 사람을 통해서 걷지 못했던 그 사람도, 그가 기대했던 그 이상의 것, 어떻게 보면 기대할 수도 없었던 귀한 것을 얻게 됐습니다. 그가 기대했던 것은 그저 동전 몇 닢뿐이었는데,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는 육신의 장애만 고쳐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는 사람으로 변화됐습니다. 육의 사람이었던 그가 영의 사람으로, 땅의 사람이 하늘의 사람으로 바뀌는 기대 이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사건 뒤에 감춰져 있는 핵심 주체는 누구이십니까? 바로 성령 하나님이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해야 이렇게 기대한 것 이상의 놀라운 일들이 우리 안에 일어나게 됩니다. 은과 금을 구하고 다른 것들을 기대하면 기대 이하의 일들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충만을 구하고,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게 될 때에 기대 이상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 주일에 총동원전도주일을 앞두고 있는데, 이 날을 앞두고 우리가 구하는 것이 어쩌면 은과 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것이 목적되어져 있다면, 그것이 은과 금이 되어버릴 수 있고, 그것은 결코 우리의 기대를 만족시켜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앞서서 성령충만하기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성령충만을 구하고,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에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우리 안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동시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성전 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걷지 못하던 사람은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과 금을 구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 성령충만했던 두 사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 왜 우리가 성령충만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하기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다른 것을 바라고 구할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을 바라고 구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대천덕 신부님의 할아버지 되는 토레이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성령 충만하다고 느끼지 않았을 때 나는 말을 조심한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하지 않을 때 내가 하는 말은 종종 실수일 수가 있고 실언일 수가 있고 이웃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성령충만 하다고 느끼지 않았을 때 중요한 결정을 유보한다. 내가 성령충만하지 않고 결정을 할 때 종종 내 결정은 잘못될 수가 있고 나는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의 이기적인 결정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모한다. 나는 목이 타도록 사모한다. 목마른 사슴처럼 사모한다. 성령충만을 사모한다." 

  이 말씀과 같이 무엇보다도 성령충만하기를 구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모든 것을 성령충만 한 가운데서 행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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