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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행복한 가정 (출 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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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 (출 20:8~11) 


윌리엄 펜은 "노동을 사랑하라. 음식을 얻기 위해 노동하지 않으면 약을 얻기 위해 노동하게 될 것이다."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말하기를 "노동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죽는 일은 없다. 그러나 빈둥거리며 놀고 지내면 신체와 생명이 망쳐지고 만다. 왜냐하면 새는 날도록 태어난 것처럼 인간은 노동을 하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노동'이란 일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일'이란 고귀한 것이며 복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일을 명령하신 이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아더 하디는 "노동은 위대한 축복이다. 악이 세상에 들어온 후 노동은 형벌이 아니라 해독제로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라로슈푸크는 "가난한 자들의 행복을 형성하는 것은 노동"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행복한 가정'의 조건은 

Ⅰ. 바른 노동관이 있는 가정입니다. 

1) 반(反)성경적인 노동관이 있습니다. 
이것은 non christian들이 보는 노동의 견해입니다. 

(1) 저주설(詛呪說)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범죄하기 이전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노동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개발하는 문화인으로서의 선지자적 사명을 주셨습니다. 문화인으로서의 왕적인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문화인으로서의 제사장적인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이 저주라고 하는 말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에덴동산에도 노동의 신성한 법칙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2) 천노설(賤努說)이 있습니다. 
이 사상은 헬라의 이원론(二元論)에서 유래한 노동천시 사상입니다. 헬라인은 육체적인 노동을 천시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육체적 노동을 하는 사람은 고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물질세계는 악하고 정신세계는 선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헬라인들의 물질개악설(物質皆惡說)이 노동을 천한 것으로 여김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도 육체적 노동보다는 정신적 노동을 더 고상하게 보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을 좀 더 접근해보면 이론과 실제라는 차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론이 없는 실제가 있을 수 없고 실제가 없는 이론 또한 공론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에 가치의 차등을 둔다는 그 자체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3) 본능적 욕구설(本能的 欲求說)이 있습니다. 
생존수단의 방법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4장 4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빵을 구하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는 것이 유물론적 공산주의 사상체계입니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노동관은 크리스천 가정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2) 성경적 노동관이 있습니다. 
(1) 노동은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입니다. 
크리스챤 네스엘 보비는 "하나님의 신앙 다음은 노동"이라고 했습니다. 
① 엿새 동안 일하라는 명령입니다. 
엿새 동안 일을 할 때 힘을 써서 우리에게 각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엿새 동안 일할 때 게으름을 피운다든지 놀거나 침체해 있으면 이것은 곧 죄를 범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살후 3:10).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먹지 말라는 것은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먹지 말고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놀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노동 없이 사람은 휴식에 이를 수 없고 전투 없이 승리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② 하루는 쉬라는 명령입니다. 
본문 20장 10절에 『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은 결국 화를 면치 못합니다. 

③ 복되게 하겠다는 언약적 선언입니다. 
본문 20장 11절에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주일은 복된 날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이 날을 복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2) 노동은 예배의 한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 『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고 했습니다. 
G.M 홉킨즈는 말하기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기도 뿐 아니라 노동도 마찬가지이다. 나무를 베거나 대들보를 다듬거나 말을 끌거나 벽을 칠하거나 비질을 하거나 마루를 닦거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나의 책임이라고 느껴 행하는 것이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노동은 하나님의 요구인 동시에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와 같은 행위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칼라일은 "노동만이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3) 노동은 인간의 삶의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6-17절에 『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을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살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재능을 활용하여 진정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은 이 땅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요 자신의 가치를 찾는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실러는 "노동은 인생의 조건"이라고 했는가 하면 토마스 칼라일은 "노동은 생명이다. 노동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힘이 솟아나고 성스러운 하늘의 삶의 본질이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그에게 스며들어온다."라고 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Ⅱ. 바른 소득관이 있는 가정입니다. 

신명기 8장 18절에 『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1) 주의 계명대로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본문 20장 9절에 『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고 했습니다. 
불로소득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일한 만큼의 소득은 복된 것입니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하지 않는 자가 소득을 취한다거나 엿새 동안 힘써서 많이 일한 자가 일한 만큼의 소득을 취하지 못하면 불의입니다. 
마태복음 6장 11절에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했습니다. 잠언 30장 8절에 『 …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2) 의를 겸한 소득이 있어야 합니다. 
잠언 16장 8절에 『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얻는 정직한 소득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떳떳하고 당당한 소득입니다. 

3) 불의한 소득은 멸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1)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면서 얻은 소득입니다. 
야고보서 5장 4절에 『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고 했습니다. 
레위기 19장 13절에 『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라고 했습니다. 
불의한 재물은 반드시 썩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5장 2절에 『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라고 했습니다. 

(2) 사기해서 얻은 소득입니다. 
아모스 8장 5-6절에 『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잠언 21장 6절에 『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3) 뇌물로 받은 소득입니다. 
출애굽기 23장 8절에 『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잠언 17장 23절에 『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4) 주의 계명을 범하고 얻는 소득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얻은 소득, 주일을 범하고 얻은 소득, 간음해서 얻은 소득, 도적질하고 얻은 소득, 남을 중상모략하고 얻은 소득, 불효하면서 얻은 소득, 이웃을 비방하고 얻은 소득은 반드시 불의한 소득입니다. 그것은 필경 썩는 소득이 될 것입니다(약 5:2). 
'행복한 가정'은 

Ⅲ. 바른 분배관이 있는 가정입니다. 

이것은 소득을 어떻게 분배하느냐 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신자들은 소득을 어떻게 써야 되느냐는 문제입니다. 곧 정의로운 분배 법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1) 재물을 하나님 섬기는 도구로 선용해야 합니다. 
잠언 3장 9-10절에 『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고 했습니다. 

2) 재물을 가지고 주의 것을 성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보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득 중에는 하나님의 것이 있고 내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꺼이 자신의 것을 표해 주시면서 인간 편에서 신앙하는 표로, 헌신하는 표로, 축복의 표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3) 재물을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로 사용해야 합니다. 
역대상 29장 14절에 『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4) 재물을 주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재물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벳세다 광야의 기적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적은 소득이 주님 손에 들려져야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요 6:5-14). 

5) 재물을 전도자를 접대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6절에 『 가르침을 받은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고 했습니다. 
사렙다의 성도는 엘리야를 공궤했습니다(왕상 17:13-16). 수넴의 여인은 엘리사를 공궤했습니다(왕하 4:8-13). 베다니의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신의 전부를 값있게 사용했습니다(요 12:1-3).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재물과 얻은 소득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습니다. 전도자 사도 바울은 전도의 격전지에서 성도들의 충성스런 접대를 받았습니다. 저들은 가난할 때와 시련이 겹칠 때 더욱 풍성한 연보를 드렸습니다(고후 8:2). 

6) 재물을 이웃 사랑의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 9절에 『 기록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노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칼빈은 말하기를 "나는 이웃을 위해서 이 재산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웃을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을 물질을 제공해주는 구제로서 끝난다고 하면 그것같이 쉽고 영광 받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소득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 사랑 전달의 센터는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지상 교회운동을 위하여 우리의 소득이 사용되는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일이요 복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지 아니하면 보내라(Go or Send)"는 슬로우건을 걸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을 땅 끝까지 전하는 사명에 오늘도 분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빅토르 위고는 "노동은 생명이며 사상이며 광영이라."고 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바른 노동관이 있어야 합니다. "힘든 일을 해서 죽는 일은 없다. 노동은 하나님이 주신 약이다."라고 로버트 맥아더는 말했습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입니다. 그래서 노동은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는 쉬라고 했습니다. 노동은 예배의 한 부분입니다. 노동은 인간의 삶의 의미 그 자체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바른 소득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재물은 주의 계명대로 얻는 소득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재물은 의를 겸한 소득이어야 합니다. 불의한 소득은 패망을 초래할 뿐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바른 분배관이 있어야 합니다. 재물은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것을 선별할 줄 아는 혜안이 있어야 합니다. 재물은 구원에 감사하는 표로 사용하여야 합니다. 재물은 주의 영광을 위한 의의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재물은 전도자를 접대하는 데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재물은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 운동에 기꺼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재물은 인간의 도덕적 가치나 지능적 가치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옛 말에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시 돈은 버는 것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중대하다는 말입니다. 

로하스는 "재물은 쓰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옛 말에 "재물이 모이면 인심은 흩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로하스는 또 말하기를 "나눠 가질 수 없는 재산은 재산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자크 피에르 브리소는 "독점 재산은 자연과 인류에 대한 도둑질"이라고 경고 했습니다. 
정의로운 분배는 개인을 살리고 가정을 번창하게, 사업을 왕성하게 합니다. 소학에 보면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자식에게 게으름을 가르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른 분배는 부강한 국가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재물은 분뇨 같아서 모아두면 악취가 나고 파리가 모여들지만 그것을 뿌리면 흙을 기름지게 한다."고 했습니다. 올리브 골드 스미스는 "재물이 행복을 줄 수 있는가 주위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물질과의 바른 관계는 곧 대신관계와 대인관계의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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