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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도자의 죽음 (빌 4: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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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죽음 (빌 4:21~23)


빌립보서 4:21-23
(2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문안하라

빌립보서 마지막 강해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의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21절에서 먼저 믿는 성도들 간에 서로 문안할 것을 명령합니다. 문안의 대상은 모든 성도들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이 명령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순두게와 유오디아에게(2절) 서로 인사하며 화해할 것에 대한 요청이기도 합니다. 사이가 나쁘면 인사조차 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인들이 작은 이해 때문에 인사조차 하지 못하다면 어찌 그것을 참 신앙이라 하겠습니까?

이어서 바울과 함께 있는 형제들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문안한다고 전합니다. 아마 그 형제 중 한 사람은 디모데일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 그곳이 에베소든 로마든, 그 지역 교회 성도들이 빌립보 교회에 문안한다고 전합니다. 그중 특별히 가이사의 집 사람을 언급합니다. 여기 가이사의 집 사람은 로마 황제 권력 편에 있는 유력한 사람을 일컫는 단어가 아닙니다. 로마 전지역에 있는 황제에 속한 모든 공무원들을 말합니다. 고급 권력층도 있지만 하급 직원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당시 가이사의 집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이 사람들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을까요? 복음이 가이사의 집사람들에게도 전파되었다는 승리의 소식을 전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빌립보 성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외로운 처지에만 있지 않고 그를 도울 수 있는 유력한 사람도 있으니 안심하라는 뜻입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의 처지에서는 그가 비록 말단이라도 유력한 가이사의 집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됩니다. 물론 바울은 하나님을 믿기에 두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배려입니다. 염려하고 있는 빌립보 성도들을 안심시키려고 바울은 ‘특별히’라는 단어를 써 가며 가이사의 집 몇 사람의 문안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짧은 문장에서 세 번씩이나 ‘문안하라’, ‘문안한다’, ‘문안한다’고 명령하거나 전하고 있습니다. ‘문안(問安)한다’는 말은 ‘안부를 묻는다’는 뜻입니다. 잘 지내고 있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물음으로서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이 단어가 새삼스럽기조차 합니다. 인생이란 것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하거나, 병원에서 암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거나, 회사에서 퇴직 당하는 일들이 곧잘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서로 안부를 물으십시오. 매일같이 물으십시오. 평안한지 잘 지내고 있는지. 직접 만나거나 전화를 못하면 기도로 하십시오. 우리 사랑하는 사람들이 평안하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어떤 분이 문밖을 나서면서 우리가 인사로 건네는 “다녀오겠습니다.” 란 말처럼 믿음의 말도 없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집에서 나가는 것은 확신할 수 있지만 무사히 돌아올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단지 잘 돌아오겠다는 믿음의 말이요, 그런 소망을 표현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요즘처럼 교통사고나 유괴나 아니면 건강이나 불의의 사고가 많은 시대에는 아침에 헤어질 때가 불안합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면 그것이 반갑고 감사할 정도입니다.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나 친지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올 때 우리는 다시금 “안녕하십니까?” 라는 인사가 새롭습니다. 

어제 노무현 전대통령이 자살이라는 충격적 방법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온 국민들도 그러했겠지만 저도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무심코 TV를 켰다가 뉴스 속보 자막으로 노무현 대통령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냥 가볍게 ‘저런 것도 속보가 되나?, 스트레스가 심하셨나 보군.’ 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서거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것도 자살이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대통령도 자살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제 짧은 역사 지식을 뒤져 봐도 대통령이라는 한나라의 지도자가 전쟁에 패배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비통한 심정으로 연이은 뉴스 속보들을 보다 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통령도 자살할 수밖에 없었나?” 작년에는 국민 배우로 통하던 ‘최진실’씨가 자살을 해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실 이런 유명한 분들 외에 지금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무수한 우리 이웃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율 1위입니다. 해마다 1만 2천여 명이 자살합니다. 하루 약 34명 꼴입니다. 자살 시도자는 약 35만 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한국은 자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힘든 사회입니까?

며칠 전 ‘미네르바’라는 필명을 가진 인터넷 경제논객의 인터뷰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 기사 타이틀은 ‘한국을 떠나고 싶다’ 였습니다. 그는 몇 번의 경제 위기를 정확히 예측했다는 이유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물론 검찰은 거짓 사실을 유포해 경제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기소를 하였지만 그는 1심에서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현 정부의 경제실정을 우롱하는 것에 대한 보복과 비판적 언론을 잠재우기 위한 수사였다는 판단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를 싫어한 현 정부와 보수적인 견해의 사람들에게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변변한 학벌이 없는 전문대생이요, 실업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진보적인 사람들과 일부 네티즌들이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미네르바의 고백은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말은 미네르바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심심찮게 내뱉는 말들 중 하나입니다. 어린 자녀들은 지나친 경쟁과 학업에 지쳐 외국 길을 택합니다. 제가 아는 한 아이는 외국에서 학교 다니는 것이 너무 좋다고 합니다.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항상 약을 달고 살던 피부병도 이제는 약을 먹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한국사회는 왜 이렇게 삭막한 사회가 되었습니까? 심지어 전직 대통령이었던 사람까지 죽음으로 몰 정도로 자살을 권유하는 사회가 되었는지 심각히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도무지 매일같이 잘 지내냐고 ‘문안’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대통령의 죽음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여러 정치적인 이유와 역사적 의미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대통령이었지만 한 인간이었던 그의 고뇌를 나누며 우리 사회의 몰인정과 인간에 대한 예우가 없는 한국사회를 고발하고자 합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처음부터 노 대통령의 기소를 목표로 진행되는 듯 보였습니다. 마치 과학 실험에서 가설을 먼저 세우고 그 가설에 맞도록 모든 실험을 진행하듯이 수사가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미 시작 전부터 ‘노무현 대통령 뇌물죄’라는 가설은 세워졌고 여기에 맞는 증거들을 찾아나가는 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직접적인 증거는 박연차 씨의 말 밖에 없었고, 알지 못했다는 노 전대통령의 항변은 묻혀졌습니다. 연일 무슨 연예가 중계 하듯이 피의사실들이 검찰에 의해서 흘러나왔고 언론들은 이것을 대서특필하였습니다. 

그동안 노 대통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기회다 싶어 그에 대한 인격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결국 가족들과 지인들에 대한 피해를 견디다 못한 노 대통령이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모든 짐을 홀로 지고 가는 방식을 취하고 말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시에는 살아 있는 권력을 다 놓아버리더니, 퇴임 후에도 변변한 정치적 술수 한 번 쓰지 않고 결국 자기 목숨을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보 노무현’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 인생의 출발부터 마지막까지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단종애사 이후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재밌는 것은 당시에는 세조가 승리한 것 같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조보다 단종을 더 기억하고, 세조는 단종을 죽인 비정한 아저씨로만 기억될 뿐입니다. 약자를 더 높이시는 분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벨의 핏소리를 들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연약한 자의 탄식과 죽음이었지만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거대한 로마제국을 무너뜨렸습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한국사회의 광기를 보았습니다. 그래도 일국의 지도자였다는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도 무시된 채 권력과 언론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대통령이었을 때부터 매일같이 그런 공격을 받았습니다. 거의 왕따요, 이지매 수준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비난을 받을 정도로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했던가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요 착하고 인정 많다고 하는 우리 민족이 어째서 이렇게 각박하고 몰인정한 사회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까?

저는 여기서 그 원인 중 하나를 짚고 싶습니다. 다름 아닌 분단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싫든 좋든 다시 한 번 한국사회는 진보와 보수로 갈리고 말았습니다. 진보와 보수는 결국 북한에 대한 입장차로 갈립니다. 한국사회는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수백만의 소중한 목숨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이후 계속된 남북대립은 한국사회에 이념의 골을 깊게 만들었습니다. 이념 갈등이 무서운 것은 어떤 것이 진실이냐 보다는 어느 편이냐가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편이면 거짓이어도 눈감아 주고, 다른 편이면 진실이라도 흠을 잡습니다. 적이라 규정되면 그들을 향해 무자비한 욕설과 비난, 왜곡을 자행합니다. 인터넷만 조금만 뒤져 보아도 이런 갈등들은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념의 골은 실상 언론의 책임이 큽니다. 언론이 확대재생산 시키고 있습니다. 조선 중앙 동아로 분류되는 메이저 언론들은 자신의 이념을 고수하기 위해 상대방에게는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 왔고, 인격 모독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진보는 이들을 고리타분한 수구와 반공의 광기를 가진 자들로 몰아세웠습니다.

양심이나 진실, 상식이 서기에는 한국사회는 너무 이념의 골이 깊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와 배려를 언급하기에 한국사회에서 이념의 칼은 너무 매섭습니다.

라이홀드 니버의 책 중에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인간의 양면성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책입니다. 사람은 한 개인으로서는 도덕적이고 착합니다. 매일 같이 대하는 우리 아버지는 자상하고 이웃집 아저씨는 온유합니다. 자기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사회적이며 집단의 일원이 될 때 그는 비도덕적이 됩니다. 자기 욕망을 교묘히 위장한 채 집단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광분합니다. 자상하고 온유한 아버지가 언론이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칼럼을 쓸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이데올로그가 됩니다. 히틀러 시대에 폭력과 광기를 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악마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는 따뜻하고 순수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집단이나 사회라는 이름 하에서 그들이 행했던 일들은 참으로 끔찍했습니다.

이제는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이런 갈등들을 끝냈으면 합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인 이명박 대통령의 조화가 장례식장에서 짓밟히는 일이 언제까지 반복되어야 합니까? 우리 사회가 이념보다는 인간에 대한 배려가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노선 때문에 싸우더라도 최소한도 인간에 대한 존엄과 예우는 지키는 그런 사회가 될 수는 정녕 없는 것입니까? 정치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한 사람에 대한 인격과 최소한의 배려가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몰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인격이 모독을 당하거나 자기의 신념이 무너질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여기에 경쟁과 결과만을 중시하는 물질중심의 가치관은 더더욱 사람을 소외시키고 있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내가 밟고 넘어가야 할 장애물이나 디딤돌에 불과합니다. 경쟁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원망과 분노만 쌓입니다. 모두가 타인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사람들은 외로움 가운데 죽어갑니다. 

우리 사회에 인간에 대한 예우과 배려심이 다시 살아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사회가 서로 이웃이 되는 따뜻한 사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언제까지 우리 사회를 이런 각박한 사회, 이념에 노예가 된 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이번은 좋은 기회입니다. 노 전대통령에 대한 장례에 최대한의 예우와 정성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갈라진 국민 여론을 하나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시청 앞 광장에 경찰 병력을 배치시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래서는 갈등을 강제로 누를 수는 있겠지만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온 국민과 함께 슬픔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반대세력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촛불과 시민 단체 노동 단체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검찰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비판세력을 억압하는 것도 그만두어야 합니다. 경제가 어려운 때 서로 하나가 되어도 힘든데 이렇게 뺄셈의 정치를 해서는 위기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장로 대통령답게 사랑과 신뢰로 반대세력을 껴안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통령은 한 나라의 아버지가 되어야지 특정 정파의 수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물질중심의 가치관에서 사람 중심의 가치관으로 정책기조를 바꾸어야 합니다. 사람이 희망인데 그 사람을 버리고 어디에서 무슨 동력을 얻겠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 위에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것이 교회를 참 곤혹스럽게 합니다.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무게와 자살을 금기시 하는 교회의 생명 윤리가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 강단에서 이상한 논리로 국민들의 마음을 또 한 번 아프게 하고 교회의 몰인정을 드러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자살은 안 되고 생명이 소중하다는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서가 증언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살이라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형식은 자살이지만 실상은 사회적 타살일 경우도 많습니다. 자살을 한 사람의 책임으로 몰아감으로써 그런 상황과 사회 분위기를 만든 우리들의 잘못은 곧잘 은폐하려 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 모든 사회가 다 공범입니다. ‘지못미’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입니다. 교회는 최소한 아픔을 함께 하고 그 책임을 공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삭막한 세상에서 그래야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서 위로를 얻을 것 아닙니까?  

죽음 이후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도 함부로 판단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우리 생명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단지 교리적인 판단으로 죽은 자들을 더 욕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신앙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도 저렇게 냉정하고 무자비할 수 있는지 그것이 더 끔찍해 보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누가 자기 믿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산상수훈에 보면 “주여, 주여” 하며 선지자 노릇하던 자들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7:23)는 주님의 냉혹한 판단을 받지 않았습니까? 어떤 의로운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고난만 당했던 거지 나사로는 오히려 하나님 품속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런 사람들도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다고 한편으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극을 막는 가장 빠른 길은 교리를 강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광기와 몰인정을 없애는 데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를 향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말씀은 23절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전 인류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떤 사람은 자존심으로 산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존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해도 살 수 있습니다. 고통이 아무리 극심해도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옳다는 확신, 그것 하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사상가나 성인들이 그랬습니다. 우리 조상인 선비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나물과 쑥만 먹으면서도 옳다는 확신만 있으면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어떤 환경에서도 살 수 있게 만드는 자존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존심으로 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존심 때문에 죽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존심이 무너진 순간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양심으로 사는가? 이것도 맞습니다. 양심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양심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양심에 어긋나면 자신이 괴로워서 못삽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양심의 고통을 느끼게 되면 자살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온갖 잘못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양심의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취하는 방법은 양심을 외면하거나 자기 나름대로 합리화 하는 방식입니다. 양심을 똑바로 보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이 공무원으로서 뇌물죄를 지고 감옥에 갔습니다. 대법원까지 해서 유죄 확정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끝까지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진실은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모습을 보며 그를 비양심적이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인간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합리화 하지 않고는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양심의 무서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이 무엇으로 살기를 원하시는가? 사도 바울의 마지막 간구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은혜로 살기를 원합니다. 은혜는 무엇입니까? 은혜는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입니다. 우리가 잘못했음에도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한쪽 눈을 감고 계십니다. 감은 쪽 눈으로는 우리의 악행을 보시고 뜬 쪽 눈으로는 우리의 선행을 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의롭지 못하며 양심껏 살만큼 강하지 못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부모로서 자식들의 허물을 덮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인간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이제 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삽니다.

바울이나 베드로의 삶이 은혜로 사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바울은 죄인 중 괴수라 할 정도로 교회를 핍박하고 주님의 몸에 대못을 박았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자기 양심껏 산다면 결국 죽음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양심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하였기에 이제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이 되어 새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잘 알기에 사도 바울은 편지의 처음과 끝에 항상 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언급합니다.  

은혜로 사는 힘을 체험했던 자들 중에는 사도 베드로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가롯 유다에 못지않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심문을 받으실 때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이것인 가벼운 죄일까요?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박해를 당할 때 신앙을 부인하는 자를 배교자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살았고 초대교회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올바른 사람이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양심껏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였기에 그는 살아서 자기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항상 실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수 했을 때 포기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저와 성도 여러분들에게도 말씀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심령에 충만히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용서하신다고 하였으니 이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정치영역이나 타인에 대한 관계에서도 이 은혜로 대하시길 원하십니다.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정치사에서도 이 포용과 은혜의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북한을 향해서도 이 은혜의 정치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용서와 포용, 곧 은혜는 모두를 살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심령 위에와 또 이 민족 위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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