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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성령의 역사 (행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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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 (행 2:1~4)


2천 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참혹하게 죽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3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40일을 거하시다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육체로 하늘로 올리어 가셨다.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아버지가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시겠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던 120여 명의 제자들 가운데,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셨다. 그래서 교회는 시작되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교회가 탄생되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확산되었다. 

이는 오순절부터, 영혼의 대 추수인 맥추절, 이방인을 향한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말할 때, 꼭 2가지는 말해야 한다. (1)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2) 성령이 이 땅에 임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말하지 않고, 거짓이라고 한다. 또 성령을 말하지 않는다. 이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하지 않고,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살면서,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는데, 그렇게 인생을 살다가 죽어서, 알라 신 앞에 가면, 그들의 행위를 저울로 달아, 악행이 많으면 지옥가고, 선행이 많으면 천국 간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죄를 떠날 수 없기에,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성령님을 바람, 불, 비둘기, 생수로 비유하다보니,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래서 마술사 시몬처럼, 성령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어떤 힘으로 생각한다(행8:18-19). 

그러면 잘못된 이단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령님을 인격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성령은 전지전능하시며, 언제 어디에나 계시고, 지정의를 가지신 영원하신 하나님이다. 따라서 성령의 도움만 바라지 말고, 성령을 인격적으로 높이고 찬양해야 한다. 성령은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가? 

(1) 창조의 사역 :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예수님과 더불어, 성령께서도 창조사역에 함께 하셨다.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욥33:4)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고 했다. 천지를 지으시고, 우리를 지으신 분이다. 

(2) 죄를 깨닫게 하심 
(요16:8) “그가(성령)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다. 성령님께서 역사 하셔야,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된다. 

(3) 영생을 얻게 하신다. 
구속의 길은 예수님이 이룩해 놓으셨지만, 영생을 얻도록 역사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빌1:19)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4) 거듭나게 하신다(요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했다. 오래 교회에 다녀도,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5) 살아나게 하신다(겔37:10, 롬8:11).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 대언하여 “생기야 들어가라” 명령할 때,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 큰 군대를 이루었다.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6) 인치는 역사를 하신다(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다. 심령에 확신의 도장을 찍어준다. 

(7)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하셨다. 

(8) 위로하신다(요14:16). 
성령을 ‘보혜사’라 하는데, 위로자라는 뜻이다. (요16:33)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셨다. 

(9) 죄와 마귀를 이기게 하신다(마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했다. 

(10)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 

(11) 능력을 주신다(슥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하셨다. 모든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너무나 많은 일을 하신다. 기쁨을 주고(롬14:17), 분별력을 주신다(롬12:2). 열매를 맺게 하신다(갈5:22-23). 삶을 변화시킨다. 사사기를 보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위대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위대하게 쓰임 받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 사람에게 있지 않다. 

  여호와의 손이 그에게 임하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부어졌기 때문이다. 성령의 기름 부음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한 사람이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 부음만 있으면, 쓰임 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으면, 우리는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난다. 

2.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은? 

(1) 바람 같은 성령 : 보통 바람을 말할 때, 2종류의 바람을 말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시는 뜨거운 ‘진노, 분노, 화’의 바람이 있다(렘4:11-12). 

둘째, 하나님께서 불어주시는 ‘생명의 기운, 숨, 호흡, 생기, 영감’의 바람이 있다. 
그런데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 불어온 이 바람(πνοή)은, (행17:25) “만민에게 생명의 호흡을 주는 영적인 바람”이다. 생명이 바람이 불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① 오염된 공기를 정화시킨다. 
오염된 공기로 꽉 들어찬 방에, 바람이 불어오면, 오염된 공기가 다 물러가고 맑고, 신선한 공기로 채워진다. 이처럼 성령의 바람이 불면, 우리 주변에서 악령들이 오염시킨 것들을 다 물리치게 된다. 

악령은 사람의 마음과 환경을 추악하게 만들지만, 성령의 바람은 이런 것들을 깨끗이 몰아낸다. 그래서 미움, 시기, 질투, 분노, 음란과 방탕, 도적질 등, 더럽고 악한 것들이 모두 추방된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우리 마음이 상쾌해진다.  

② 마음이 상쾌해진다. 
바람이 불면, 몸도 마음도 상쾌해 진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염려 근심, 슬픔과 괴로움이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이 가득하여,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게 된다. 우울증에 빠져, 자살하는 일은 없다. 

③ 운동력이 생긴다. 
바람은 정지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공기가 흘러 움직임을 말한다. 이처럼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운동력이 생긴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만일 성령께서 임하지 않았다면, 죄 용서함이나 사랑을 체험할 수 없고, 치료, 축복, 영생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성령께서 임하실 때,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나타났다. 성령님이 강림하자, 제자들은 삽시간에 새롭게 변화되었다.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었다. 

예루살렘을 변화시키고, 유대와 사마리아, 온 인류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이 나타났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인데,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 인간의 말로만 전하면, 변화의 역사를 가져오지 못한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어느 교회든지, 어떤 성도들에게든지, 운동력이 생긴다. 

운동 못하는 운동선수가, 말이 되지 않듯이, 잠잠한 성도들과 교회들은, 말이 안 된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역사가 반드시 나타난다. 마귀는 이 세상 풍속을 지배하는 자이다. 마귀는 먼저 사회 구조를 부여잡고, 우리를 무너뜨린다. 

그러면 이 세상 악한풍습과, 공중권세 잡은 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나? 하나님의 은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이길 능력을 주셔야 한다.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생명이다. 이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모든 이기는 힘이 생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의 생명이 들어왔기에 이길 수 있다. 기독교인은 변화시키는 자다. 우리는 이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미 능력이 있다. 공중권세 잡은 자를 산산조각 낼 수 있고, 이 세상 풍속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다. 

우리의 심령에, 마가 다락방에 있었던, 성령의 바람이 불기 바란다. 그래서 악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권능을 받아, 마귀의 악한 궤계를 파하는, 강력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2) 불같은 성령 
① ‘불’은 태운다. 
성령님께서 불같이 임하신 이유는, 우리의 모든 죄악과 불신앙을 태워서,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다. 

성령님의 불이 임하시면, 우리의 세속적인 것들이, 다 소멸된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일군으로 만들게 만든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무너지고 만다. 성령을 떠나서는 진정한 교회, 살아 역사하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 

터키를 방문했을 때, 가장 가슴 아픈 일은, 그렇게 왕성했던 교회, 그렇게 많은 순교자를 내었던 일곱 교회들이, 왜 터만 남고 다 무너졌을까? 그 이유는, 성부 성자의 교리만 붙잡고 있었지, 능력의 원천이 되고,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게 하시는, 성령을 무시하고, 

성령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았다. 성령의 역사가 끊어지니까, 형식적인 교회가 되고 말았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면, 세속 물결을 따라 흘러가지 않고, 조류를 거슬러가는 능력이 생긴다. 죽은 고래는 물결을 따라 흘러가지만, 살아있는 송사리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크기인가? 아니다. 생명이다. 생명이 있으면, 이 세상풍속을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교회의 핵심은 생명에 있다. 덩치가 크다고 강한 교회가 아니다. 생명이 있으면, 세상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권능이 생긴다. 

우리 성도의 능력은 ‘얼마나 돈이 많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생명을 크기로 맞바꿔버렸다. 그래서 힘이 없다. 변화시키는 힘이 없다. 성령의 능력이 넘쳐나기 바란다. 

② 불은 어둠을 밝혀 준다. 
캄캄한 방에 불이 들어오면, 어둠이 사라진다. 이렇게 성령님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신다. 1904년에 영국 웨일즈 일대에, 큰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이반 로봇’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부흥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수개월간 회개와 기도에 전념한 결과, 성령의 폭발이 일어났다. 그 결과 술집, 당구장, 극장, 경마장이 비고, 유치장이 비어, 경찰들이 할 일이 없어졌다. 광산의 직공들이 훔쳐간 물건을 되돌려 와서, 따로 창고를 지을 정도였다. 

대대적인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증오와 불만에 찬 광부들이, 석탄차를 끄는 당나귀를 회초리로 치던 일이 없어졌다. 오히려 찬송을 부르며, 당나귀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하므로, 당나귀도 성령 충만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성령이 오시면, 그들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 준다. 

사람은 무엇을 먹고 마실까? 하면서 부귀와 영화만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왜 살며, 무엇이 죄이며, 의인지 안다(요16:6-11). 싸움의 대상이 악령임을 명확히 깨닫게 되기에,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악령과 싸우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면, 사람이 똑똑해진다.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성령 충만해서 기도하면, 기도가 또렷해진다. 교회가 성령 충만하면 사람들이 똘똘 뭉쳐,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아,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이런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③ 불은 동력의 근원이다. 
비행기도 불의 힘으로 가고, 자동차도 큰 기선도 불의 힘으로 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는 불같이 임하셔서, 우리의 신앙에 동력을 주신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 마음속에 힘이 생겨난다. 

기도와 전도의 힘이 생겨나고, 신앙의 힘이 솟구쳐나며,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길 수 있는 마음이, 속에서 생겨나게 된다. 성령님은 어떻게 힘을 주시나? 꿈과 환상을 통해, 불을 붙여주신다. 성령님이 임하면, 자녀들이 예언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했다(행2:17). 

예수님께서 택한 12제자들은 대개 어부였다. 그들은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고, 사회적인 지위나 부도 없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꿈을 심어주셨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비행기나 기차도 없고 전화, 전신 등 교통 통신시설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또 사마리아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실현 불가능의 꿈이었지만, 제자들은 그 꿈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300년 이내에, 전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꿈은 할 수 없는 일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성령님이 들어가면, 거룩한 꿈으로 뜨거워져,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성령님으로 거룩한 꿈을 꾸고, 뜨거워져 멋있는 삶을 살자. 

(3) 혀 같은 성령 
하나님께서 복음이, 온 천하 만민을 위한 복음이 되었음을, 방언을 통해서 선포하셨다. 이 방언으로 말함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차원의 교통이 열렸음을 뜻한다. 

하나님은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언어를 주셨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언어가 단절되었다. 언어가 단절되자 비극은 시작된다. 미움도, 살인도, 전쟁도…, 대화가 되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창11장의 바벨탑 사건은, 이 사실을 증명한다. 

대화가 단절된 인류역사에, 놀라운 이적이 나타났다. 오순절 사건의 핵심은, 즉 대화의 회복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대화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신앙생활은 예배드리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만 있지, 사람과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내 이웃과의 관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워야 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이 말은 지리적, 지역적으로만 적용하면 안 된다. 장벽, 막힌 담을 넘었다는 말이다. 

예루살렘은 종교의 도시다. 그곳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따라서 이런 두려움의 장벽, 의심의 장벽, 적대감의 장벽을 넘어서야 함을 보여준다. 유다와 사마리아는 지리적, 종교적, 사회적 장벽을 넘어섬을 말하며, 땅 끝까지는 모든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함을 보여준다. 

(행2장)에는 사람들이 방언을 하는데, 이 방언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방언과는,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방언인데, 구체적인 언어를 가진 외국어다. 오순절 날 여러 나라에서 온, 여러 부족출신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성령님이 임하시고,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게 되었고, 방언으로 설교를 했다. 

그때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단순한 언어, 외국어이다.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 

  낯선 지명이 많이 나오지만, 각 부족의 이름이거나, 나라나, 지방의 이름이다. 이처럼 오순절 날에 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난 곳의 언어로, 분명히 말하고 듣는 “대화의 이적”을 상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서 성령님이 불처럼 임하셨을 때, ‘불의 혀’처럼 갈라졌다. 

이 사건은 바벨탑의 비극을 극복한 사건이다.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쌓았던 바벨탑 때문에, 사람들의 언어가 서로 통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성령님이 강림하시자,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던 사람들 사이에, 언어, 인종, 학식, 명예, 문화를 뛰어넘어, 서로 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대화가 살아나서, 서로 이해하고 통할 수 있어, 적대감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방언으로 말하고 방언으로 듣기 시작하자, (11)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오순절에 탄생한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커다란 일을 증언하는 공동체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위해, 힘을 모으는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함께 꿈을 꾸는 새로운 공동체이다. 

연합하지 않고, 혼자만 나가는 교회는, 올바른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연합하지 않는 성도는 올바른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었다.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장소에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성령 충만을 받았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일치된 모습이다. 초대교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저마다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개인차를 뛰어넘어,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고, 복음을 위해서 함께 나아갈 수 있었다. 

성령님이 임하자마자, 그들은 하나님께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동의 꿈을 갖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려는, 목표를 위해, 개인차를 뛰어넘어서, 손에 손을 잡고 나갈 수 있었다. 

성령님이 우리를 주장하시고,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 있을 때, 우리의 모든 개인차를 뛰어넘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의 꿈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진해 나갈 수 있다. 성령 충만을 위해, 깨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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