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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패와 회복 (행 1: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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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와 회복 (행 1:15~20)

 
성공주의는 성숙하지 못한 가치관입니다. 

우리 인생을 되돌아보면 영광과 치욕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에게 영광과 치욕이라는 두 가지의 삶의 굴곡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거나 놀라고 슬퍼하는 반응을 제공할 것입니다. 학창시절의 작은 시험 앞에서도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런 작은 경험들이 우리에게 성공과 실패를 너무 일찍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의 경험에 대하여 지나치게 속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패는 나쁜 것이고, 성공은 소중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대학 진학에 실패한 사람을 실패자로, 진학에 성공한 사람을 성공자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는 사랑에 관하여서도 성공과 실패를 나눕니다. 

이런 성공주의 가치관은 성숙하면서 점차 존재의 가치관으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살아있고, 생각하며 서로 관계하고 무슨 업적과 결과를 얻었는지 스스로 만족하는 가치관으로 성숙합니다. 

성공주의는 이미 우리에게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누가 일을 더 잘하나, 누가 더 생산성이 높은가, 누가 더 큰 업적을 세우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그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성공주의는 사람을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곧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못하는 거짓의 시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으로 반응하게 하며 서로의 가치를 폄하하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발을 붙이고 대지 위에서 호흡하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들은 소중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혹 무시하며 평가하고, 업신여기던 사람들은 주님께서 ‘천하보다 값지다’고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존재들입니다. 

가룟 유다는 성공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이 성공주의와 업적주의에 끊임없이 시달린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인생의 최대 특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다 드렸습니다. 자기의 가족과 재물, 시간과 노력을 다 드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헌신할 만한 괜찮은 인물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예수님의 길과 가룟 유다가 생각한 자신의 길이 조금씩 다르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가룟 유다 자신의 이상과 딱 들어맞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에 자기 기준과 맞지 않는 이상한 누더기가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제자들을 평가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오늘 이 시대의 평가에 적합한 인들이었을까요? 경영 컨설턴트의 눈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분석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런 제자들이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은 성공주의 입장에서 평가한다면 쓸모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컨설턴트들의 평가를 소개합니다. 

나사렛 예수 귀하.

귀하가 의뢰한 열두 명의 이력서를 검토하고 심리테스트와 직업 적성 검사를 모아 컴퓨터에 넣어 결과를 뽑았습니다. 그들은 거의 다 귀하가 새롭게 계획하는 공동체의 간부 사원으로서 자격 부족입니다. 한 명만을 제외하고는 학년이 너무 낮고, 경험도 부족합니다. 그들은 단체관념도 없고 협력정신이 약하여 경영관리자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시몬 베드로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성격이 너무 과격합니다. 안드레는 한 마디로 무능력자로서 남을 지도할 사람이 못됩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공동체의 이익을 제쳐놓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사람입니다. 
도마는 매사 부정적이고 질문뿐이며 추진력이 없습니다. 
마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무슨 짓이나 할 사람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이 사람들은 사회 혁명을 노리는 과격한 불온 사상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귀하가 추천한 열두 명 중 긍정적인 사람은 가룟 유다뿐입니다. 그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고, 사회 지식도 풍부하며, 에민한 실업인의 감각과 판단력도 예민합니다. 사교성도 있어서 상류권력층과 접촉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강한 동기와 의욕에 차 있습니다. 따라서 본 경영컨설팅회사는 유다 한 명 만을 추천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찾아보도록 권고합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다른 열 한 명의 제자들이 어리석고 이기적이며, 욕심쟁이고 문제투성이임을 알려주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학적으로 조언하는 컨설턴트의 말대로 가룟 유다가 진정한 예수님의 동역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많은 가능성과 야심은 오히려 예수님이 보여주시며 함께 가고자 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게 했습니다. 그의 철저한 분석력과 판단력, 현실적 사고는 오히려 그를 계속해서 추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약점 있는 사람들은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허무함과 좌절감에 싸여 하루를 마감하는 어부들에게 가셔서 그들의 상처를 보시며 마음의 곤고함을 싸매시려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문제투성이의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세리, 배운 것 없는 어부, 정치에 실망한 몰락한 정치가들도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주인공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보다 그의 능력과 기적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런데도 가룟 유다는 왜 파멸의 결과로 끝났을까요? 우리 인생에도 실수와 실패가 있고, 넘어질 때와 조롱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실패를 경험하고서도 툭툭 털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좌절의 구덩이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실수와 실패를 경험했지만 곧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파멸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요?

유다라는 이름은 ‘찬송’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이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그만큼 좋은 이름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며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것이 싫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그런 칭찬 속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좋아하면서도 예수님이 가진 능력과 축복, 예수님이 가진 기적을 예수님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대인관계 상으로도 큰 문제가 있는 가치관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좋아했습니다. 자기의 생활과 소유를 내놓고 예수님을 따라 삼 년을 다닐 만큼 열정적으로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헌신은 예수님에게 그저 ‘투자’를 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성숙하지 못한 자세로 예수님을 능력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드리고 받게 될 것을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들이 가져올 이익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병 고침이 어떤 회복과 구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자기의 꿈과 야망을 위한 투자대상으로 보았을 뿐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드렸던 헌신과 수고는 다만 예수님을 이용할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자기의 야망이 스승의 꿈과 비전보다 더 화려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가룟 유다가 변화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목표와 야망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고 변질시키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자기가 의도한 방향으로 바뀌지 않자 좋아하며 따르던 마음이 미움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마음이 우리에게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투자의 대상으로 여기며 헌신하고 수고하는 것에 보상해 주시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드리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내게 주시는 축복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어느 날 축복이 사라진 것 같이 보일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눈 녹듯 사라지고 원망과 분노가 싹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삶을 붙잡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돈의 가치를 영적인 성숙보다 우선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가진 문제가 두 번째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물질의 가치를 영적이고 정신적인 성숙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룟 유다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현실주의는 필요한 것입니다. 현실에 발 디디고 사는 이상, 우리는 모두 치열한 현실을 감지해내고 대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주의자로 끝마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큰 약속과 꿈을 가진 피조물입니다. 현실주의만으로는 인생이 광야같이 살벌해지고 말 것입니다. 현실주의는 우리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 꿈틀대는 욕망에 의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충족시키려는 야망을 위해 현실주의와 결탁하고 끝마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마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바로 그런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의 인생은 철저하게 현실주의로 결말지어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돈과 권력에 대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권력자로서가 아니라 속죄물로서 나가게 될 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능력자로서가 아니라 저주의 십자가를 지게 될 때 허탈함에 무너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 자체로 만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깊이와 넓이, 사명과 꿈을 깨닫거나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따라왔던 가룟 유다만의 이유가 하나씩 하나씩 없어지면서 그는 예수님을 팔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스승을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인생을 배신의 길에 걸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고 여러 번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에서 입맞춤으로 군호를 짜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의 입맞춤에도 불구하고 “친구여”라고 그를 부르십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배신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가룟 유다는 자만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세 번째 문제는 자기 인생에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은 목표를 향해서 성공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실수는 있을지라도 실패는 없다고 호언장담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어떻게 자살이라는 파멸을 맞은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위로의 말씀을 할 때 그는 자신만만했습니다. 자기는 그 말씀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일생동안 이 말씀에 의지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마지막에 정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죄책감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때 자기가 무시하고 남의 일처럼 생각하던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큰 짐이 올 때 자기를 폭파해 버린 것입니다. 

자신감 때문에 가룟 유다는 자기의 실수와 실패를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팔고 돌아서면서 걷잡을 수 없이 후회가 밀려왔지만, 실패를 받아들이기에는 자기의 오만함이 너무 컸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의 후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후회한다고 해서 가슴 속에 있는 미움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후회하면 할수록 실패의 감정은 되살아나고 분노는 더욱더 쌓여갑니다. 

후회와 회개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후회는 마음속에 분노와 미움을 더 만들어 냅니다. 회개는 분노와 미움이 사그라지게 합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회개 하지 않고 계속해서 후회하며 집착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찌꺼기와 같은 미움과 분노가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에게 분노하다가 자기 자신을 향해서 분노를 터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실패를 확인하는 순간 하나님 앞으로 나오면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인생에서 실수한 사람, 실패한 사람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좌절하고 신음하고 탄식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인생에서 다른 어느 것으로 위로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용납하셨습니다. 그들을 예수님의 품에 안으셨습니다. 

인간은 살아있기 때문에 실수합니다. 실수는 우리가 사람이라는,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실수와 실패는 인생의 필요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한 번의 실수, 혹 몇 번의 실패에 자기를 하나님 앞에 세워 회개케 하지 못하고, 끝없이 자책하며 후회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실수한 모습을 확인하면 실수하는 사람들을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더불어 나처럼 실수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성공과 실수로 평가하는 어리석은 행동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열릴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새롭게 펼쳐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 우리는 다시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용서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내 속에는 실수와 실패로 얼룩진 상처가 있습니다. 내 속에는 미움과 분노도 있습니다. 나도 이런 내 모습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 실패의 순간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서게 하여 주옵소서. 나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나를 받아주시고 고쳐주옵소서. 나를 새롭게 사용하여 주옵소서!” 

이 시대를 휘감는 어둠의 영을 말씀으로 새롭게 바꾸어 나아갑시다. 이 시대가 품고 있는 죽음의 영을 생명의 영으로 새롭게 바꾸어 나아갑시다. 이 시대를 미친 듯이 질주하는 미움과 분노의 영을 사랑과 용서의 영으로 바꾸어 나아갑시다. 그 길이 예수님의 길을 뒤따르는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가슴으로 안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룟 유다처럼 실수자이고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를 마지막까지 친구로 부르시며 기다리십니다. 다시 제자로 서기를 원하며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더 이상 후회에 몰두하지 않고 다시 사랑하겠습니다. 다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겠습니다. 다시 우리가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하겠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결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사람들인지 모릅니다.실수와 실패의 연속인 인생들입니다.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 인생에 패배자가 되지 않도록 다시 주님 앞에 용서받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사랑으로 일어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어둠과 죽음의 영이 가득한 이곳에, 생명과 사랑의 영, 빛과 진리의 영으로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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