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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성령충만한 가정 (엡 5: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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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한 가정 (에베소서 5:15-33)


   
5월 가정의 달에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주제로 말씀을 오늘 한 번 더 나누기로 합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바램을 찾아보고 그 말씀 안에서 우리 가정을 진단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만들어가기 바랍니다.   

벌써 오래 전에 나온 말이지만 미국 교회에서는 설교시간에 이혼과 낙태, 동성애, 알코올과 마약 중독에 대한 주제를 언급하기 거북할 때가 되었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일은 교회 안에서도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일로서 알면서도 모르는 체 넘어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2008년도 미국 장로교단(PCUSA) 총회에서 동성애자 목사 안수를 허락하자는 의안이 부결되었다고 합니다.  2001년도에 이어 2008년에도 동성애자 안수 허락 안이 부결되기는 하였지만 문제는 미국장로교의 내부 여론이 '동성애자 안수'를 허용하는 쪽으로 점점 옮겨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동성애자 안수 허용'안을 지지하는 비율이 2001년에 비해 20% 가까이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 장로교 총회에 속한 173개 노회가 안수 자격 수정안을 놓고 찬반 투표를 벌인 결과 2001년에는 46개의 노회가 동성애자 안수를 지지하였는데, 2008년에는 77개의 노회가 지지를 하여 전보다 더 많은 지지율을 보였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한국 사회와 교회가 그렇게 모델로 삼고 따라 하기를 좋아하는 미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요즘 우리 나라의 이혼율 통계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물어볼 필요 없이 세계 최고라고 하니까…   남녀가 너무 가볍게 만나고 헤프게 교제하다가 요즘 젊은이들 말로 쿨하게 헤어지고 있으니 이런 가벼운 성 개방 풍조가 가정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막 심각한 문제가 터진 가정, 한창 전쟁이 벌어져 곧 깨어질 위기에 있는 가정, 이미 와장창 무너져 내린 가정…  여기저기에 상처 난 가정들의 탄식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런 사회에서 결혼의 신성함이란 오래 전부터 그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결혼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속물적이고 이기적으로 되어버린 사회에서는 결혼을 신분상승의 기회로 여기는 사람도 있고, 배우자로부터 뭔가 얻어내려는 기대심리도 강합니다.  그러다가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앞뒤 주위도 상관치 않고 쉽게 갈라서버립니다.   거기에는 막장으로 몰아가는 TV 드라마나 영화, 연극 등 소위 예술을 빙자하여 불륜과 패륜을 조장하는 대중매체의 공헌이 대단한 몫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런 얼빠진 드라마를 보면서 나에게도 저런 로맨스가 찾아올까 상상하다가 어느새 그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요지경 세상입니다.  

여기저기 유혹의 덫이 놓인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무책임하고 무감각하게 살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정이 깨어지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어린 세대들과 젊은 세대들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혼란한 가치관 속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10대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 어른들에게 돈 몇 푼을 얻어내려고 소위 원조교제라는 것을 합니다.  그것이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죄라는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어쩌다 발각되어 가정으로 보내지면 재수가 없이 걸렸다고 툴툴거리는 아이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자유롭다 못하여 추잡한 성 개방 풍조에 휩쓸려 사는 젊은이들의 연애관, 결혼관은 갈수록 난장판이 됩니다.   대학가의 임대 주택에는 대학생 남녀가 월세를 나누어 부담하고 한 방을 쓰는 유행이 일고 있다는 소식을 벌써부터 듣고 있습니다.  부모님 보기에는 아직도 미숙하고 어리기만 한 대학생 아들 딸들이 생활비도 아끼고 데이트 비용도 아끼고 외로움도 달래는 다목적으로 방 한 칸을 공동 사용하는 계약 동거 커플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계약기간 동안만 시험 삼아 동거해보고 서로에게 편하면 더 연장하고 아니면 다른 상대를 찾는 이런 쿨한 세상에 우리의 자녀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시험 삼아 함께 지내보고 이만하면 함께 살만 하니까 결혼하겠다는 인간답지 않은 생각을 어찌 보아야 될까요?   그런 행동을 보고 ‘쿨’ 하다고 해야 할까요?   사람이 생각 없는 짐승이 아닌 이상 그런 행동을 합리적이라거나 멋있다고 박수 쳐주는 정신 나간 사람들은 우리 중에 없길 바랍니다.  지나가다 만난 사람에게 맘이 끌려 정을 주고 받다가 실증 나고 기대에 안 차면 훌훌 털고 떠나 또 다른 상대를 찾아 기웃거리는 것은 짐승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의 세계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아닙니까?   이 모든 현상이 바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풍속이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세상 충만, 쾌락충만, 자아도취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어떤가요?   여기에서 자유롭고 당당한가요?

미국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도 설교시간에 깨어진 가정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할 때 교인들 사정을 살펴가면서 피할 것은 피하고 듣기 좋은 말만 전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파산된 가정은 그렇지 않아도 괴롭고 아픈데 괜히 상처를 건드릴 필요가 있겠느냐는 나름 이유가 있지만 그만큼 기독교인들 중에도 깨어진 가정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까지 구태여 치부를 드러낼 것 없고 그저 복 받고 잘 살라고 설교하면 되니까 괜히 아픈 곳은 건드리지 말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솔직하게 물어봅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모습일까요?   혹시 지금 갈라질 위기 속에 겨우 지탱하는 가정은 속히 정상을 회복해야 하고 이미 갈라진 가정은 다시 회복할 기회를 찾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전만 해도 한국 교회에서는 장로가 이혼을 하면 교회에서 장로직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이혼 사유가 무엇이 되었든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올바로 다스리지 못하고 갈라진 사람은 다른 교인들에게 모범이 안 되고 덕을 세울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집 일군으로 자격이 없다는 의미에서였습니다(디모데전서 3:1-5 참고).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습니다. 목사들도 당당히 이혼을 하고 보란 듯이 재혼도 합니다. 부부가 사별하여 홀로 된 것도 아닙니다.  한 쪽이 간음 죄를 범하여 두 사람이 더 이상 서로를 신뢰할 수 없어서 갈라선 것이라면 차원이 다릅니다. 목사가 바람을 피워 본처와 갈라선 후 재혼을 하고도 당당하게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하는 세상입니다.   남이야 뭐라 하든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대단히 이기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 목사의 교회에서는 성경이 말씀하는 부부의 하나됨을 어떤 식으로 선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그 부분은 건너뛰거나 평생 언급하지 않고 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목사가 결혼 주례를 할 경우 함께 살다가 맘에 안 들고 불편하면 나처럼 새로 시작해보라고 권면하지는 않을까 궁금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세상 충만이 주는 열매들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세대가 악하다는 증거입니다.  비참하고 어두운 세상의 모습을 지적하려면 한이 없으니 이 정도로만 합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무엇일까 말씀에서 찾아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정은 오늘 제목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가정입니다.   어떤 가정이 성령 충만한 가정인가요?   성령 충만한 가정은 성령 충만한 부부들이 만들어가고 성령으로 충만한 부모와 자녀들이 만들어가는 가정입니다.   

성령충만이 무슨 말입니까?  바울 사도는 성령충만을 술 취함과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이 술에 푹 취하면 제 정신이 아닙니다.   눈이 풀리고 혀도 꼬부라지고 걸음도 비틀거리며 길거리에서 방뇨를 해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져 밤새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흐트러진 행동을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술 취함은 문자 그대로 술 취함도 되지만, 세상적인 생각과 가치로 가득 찬 사람들의 생활 양식을 대표적으로 말함이라고 보면 좋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적인 것에 푹 빠져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사는 모습입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봅니다.  지난 번 런던에서 열린 목회자 세미나 강사 목사님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서 소개한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미국 한인교회의 어느 장로님이 TV 드라마 사극에 심취해 있었는데 주일 새벽이 되도록 몇 편을 연속으로 보다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주일 아침 예배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 장로님이 대표기도를 맡은 날이었습니다.  졸음이 얼마나 쏟아지는지 눈을 부릅뜨고 참고 참으며 예배를 드리던 중 대표 기도를 하는데 그만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졸음을 견디며 비몽사몽간에 기도를 하다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깜빡 넘는 순간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 그만 ‘하나님 아바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했답니다. 

이것이 바로 드라마 충만입니다.   기독교인들은 TV 드라마 보면 안 된다는 말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장로님은 TV 드라마 비디오 테잎을 빌려와 몇 일 동안에 몽땅 마스터하려고 사극에 푹 빠져 지내다 보니 외출도 안 하고 밤잠도 줄여가며 오로지 TV 앞에 붙잡혀 앉아있었습니다.   머리 속에 온통 사극의 줄거리 뿐이고 무의식 중에 나오는 말도 드라마 식 말투였습니다.   한 주 내내 드라마에 사로잡혀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벌써 오래 전에 다 들어 알고 있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입니다.   아파트 부녀회장으로 일하는 어느 권사님이 여전도회 회장으로 봉사 중이었습니다.   마침 헌신예배 사회를 맡은 자리에서 그날 성경본문을 찾아 읽는데 나온 멘트가 온 교인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온 교인들 앞에 나와 사회를 하느라 속으로는 가뜩 긴장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주 교양 있고 품위 있는 목소리로 하신 말씀이 ‘오늘 읽을 본문 말씀은 에베소서 제5동 15호부터 33호입니다’ 였습니다.  눈을 뜨면 날마다 아파트 주부들을 만나고 일을 하다 보니 입에 밴 것이 아파트 동 호수 부르는 일이었습니다.   이 권사님은 온통 아파트 부녀회 생각으로 충만한 분이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교수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축구를 무척 좋아하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한번은 국가대표팀이 출전한 게임이 마침 주일 저녁 예배시간과 겹쳐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녹화로 보는 것은 실감이 안 나고 실황중계를 보아야 직성이 풀렸던 이 목사님은 강대상으로 들어오는 옆방 기도실에 티비를 설치해 놓고 문을 열어놓은 상태로 기웃거리기로 하였습니다.  사회는 부목사님이 하고 목사님은 강대상 뒷자리에 앚아 고개를 돌려 숨을 죽이며 흘긋흘긋 축구관람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 국가대표팀이 슛을 하는 찰라 잔뜩 흥분하신 목사님이 얼떨결에 ‘슛 골인’하고 소리를 질러버렸습니다.   본래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온 교회가 다 알고 있지만 그 사건으로 목사님이 큰 곤욕을 치렀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를 들어봅니다.   낚시를 무척 좋아하시는 어떤 목사님은 틈만 나면 낚싯대를 매고 강가로 나갔습니다.   어느 수요일 오후 잠깐 기분전환으로 다녀온다는 분이 수요기도회 시간이 다 되었는데 나타나지 않고 교인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회는 다른 분이 인도하였고 그 목사님은 기도회가 다 마친 후에야 돌아왔습니다.   기가 막힌 일은 이 분이 얼마나 낚시에 푹 빠져있었던지 그날이 수요일인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물고기와 친구하다가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이 정도면 낚시가 취미생활이 아니라 본업이 되어야 했습니다.   

내일이 주일인데 주일 설교를 해야 할 목사님이 토요일 아침 골프채 들고 유유히 필드로 나가는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그런 분들 왈, 일주일 내내 말씀 묵상하고 토요일이 되기 전에 이미 설교 준비를 마쳤으니 토요일은 머리를 쉬게 해줘야 한다고 나름 그럴듯한 이유를 대는 목사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연초에 기도원에 들어가서 일년 치 설교를 벌써 다 준비했다는 능력 있는 목사님들이 간혹 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토요일 하루 종일 골프장에서 공만 치다가 돌아와 주일 아침 예배 시간에 눈을 감으면 넓게 펼쳐진 그린이 아른아른 하지 않았을까요?   

바둑을 처음 배우며 너무 재미있어하던 목사님이 주일예배 인도를 할 때 교인들이 예배당에 들어와 자리를 채워 앉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흰 머리 노인이 앉은 자리 주위로 검은 머리 교인들이 하나 둘 앉다가 마침 한 사람이 자리를 채우는 순간 ‘아다리!’ 했다는 이야기도 옛날에 한참 유행하던 에피소드입니다.   이 또한 성령충만하고는 아주 거리가 먼 다른 것들로 충만한 사례들입니다.   

모든 목사님들이 그런 것은 아니고 이런 사례는 극히 비정상적인 예들입니다.  하지만 목사들의 부끄러움을 골라 소개한 것은 일반 성도들이라고 크게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교우들은 목사들보다 오히려 더 많이 세상에 노출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그래도 일 주일 내내 교회를 중심으로 살고, 교인들을 주로 만나고, 말씀 보고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가끔 바깥 바람을 쏘이지만, 교우들은 경쟁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몸싸움하고 머리 싸움을 하며 살다가 주일날 하루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 경계 구분이 잘 안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관계 없이 내 뜻과 내 욕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성령 충만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 입에서 아무리 고상한 말이 줄줄 흘러나오고 예수는 나의 주라고 거침없이 말할지라도 그 삶이 하나님의 영에 순종하지 못하고 말 따로 행동 따로, 제 중심, 자기 기분대로 사는 사람은 겉모양만 성령충만 흉내 내고 있을 뿐이고 여전히 세상 충만, 자아충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속세를 떠나 돈도 벌지 말고 여행도 하지 말고 오락도 하지 말고 멋진 옷도 사 입지 말고 수도승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동의하실 만한 일인가 먼저 물으며 살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내 의식 속에 가득 차 있는 그 무엇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행동으로 표출됩니다.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그것이 사람이든 물질이든 생각이든 그것이 나의 주인이 되고 있습니다.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자신하지만 사는 모양은 여전히 세상으로 가득 차있고 어쩌다 가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삽니다.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고 내가 우선이고 내 자식, 내 야망, 내 성공이 우선이며 그 다음에 하나님입니다.  내가 없으면 하나님도 없고 내가 있어야 하나님의 존재도 가능하다고 여기며 삽니다.   하나님은 그저 나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도우미와 보호자이고 수호신입니다.   나는 그 하나님을 필요에 따라 불러내어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인이지 하나님이 주인이 아닙니다.    그러고도 나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삽니다.   이거야말로 심각한 오해요 착각 아닐까요?    

그렇다면 성령 충만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에 꼭 붙들리어 하나님께서 기대하고 바라시는 방향으로 순순히 이끌림을 받는 상태라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에 붙들리어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혀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말과 생각과 행동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며 성령이 그 사람의 주인이 되도록 맡겨드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와 있는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고, 구원을 선물로 받아 누리는 사람이며,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의 참 모습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모양으로 나를 빚어가실 때 그 분의 뜻에 나를 맡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가정은 성령으로 충만한 아내와 남편이 성령으로 충만한 자녀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끌어가시는 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이 내 가정의 주인이 되셔서 가족들이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함께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는 가정입니다.   꾀꼬리처럼 목소리만 잘 내는 노래가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 찬송을 주께 드리고,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런 가정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받들고 섬기듯 부부가 서로에게 복종하고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며, 부모는 자녀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가정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의 주인이 남편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가정입니다.   누가 주도권을 쥐고 가정을 끌어가는가 이것 때문에 부부가 주도권 다툼으로 날이면 날마다 으르렁거리고 시끄러운 가정들이 많습니다.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에게 신혼 초장에 기선을 제압하지 않으면 평생 눌려 살게 되니 확실하게 잡아놓으라고 조언하는 무지한 선배들이 있습니다.  애초부터 싸울 작정을 하고 결혼을 하나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둘이 한 몸 되라고 만들어주신 가정인데 말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이해하고 협력하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 가난할 때나 부할 때 그 어느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이 서로 사랑하자고 약속한 결혼인데 누가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주 안에서 서로 복종하라 말씀하였지 한쪽이 일방적으로 군림하고 굴복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높여주고 존중하며 이해하고 사랑하는 부부가 피차 복종하는 모습입니다.  예수께 머리의 자리를 내어드리고 우리는 그 발 아래 내려 앉아 순종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성도의 가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지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다가 깨어져버릴 위기를 만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십시오.  지금 아슬아슬하게 깨어질 위기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속히 찾아봅시다.   문제가 언제나 상대방에게만 있다고 자신만만, 착각 충만하지 말고 먼저 자신에게 있는 원인을 찾기 바랍니다.  혹 인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함으로 깨어졌다면 다시 회복할 기회를 포기하지 맙시다.   대부분 이혼의 원인은 결혼에 대한 잘못된 환상과 서로의 이기심이 그 바탕에 깔려 있음을 무시하지 맙시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고전7:16) 하였고,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벧전3:1,2)  혹 안 믿는 사람과 살고 있을지라도 아내의 구원, 남편의 구원, 바로 그것을 위하여 배우자를 주셨다는 말씀이지요.  이런 거룩한 사명을 받은 우리들인데 이기심으로 충만하여 내 고집만 부리고 내 목소리만 높이다가 기어코 가정을 어려움으로 몰아가서야 될까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자신들의 결혼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청년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결혼의 신성함과 서로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알고 결혼에 골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가정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순종하여 성령 충만한 가정을 만들어 가겠다고 서로 동의하고 고백하는 사람과 결혼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이 부분에 이해가 안 되고 서로 동의가 안 되면 결혼을 서두르지 말고 피차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가정은 자존심 경쟁, 힘겨루기 시합장이나 싸움터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용서를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알고 있는 분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지난 5월21일이 ‘부부의 날’이었습니다.  가정을 가진 분들을 위하여 그리고 예비 부부들을 위하여 ‘부부’라는 제목의 작자 미상의 시 하나를 소개합니다.

'부부' 

세상에 이혼을 생각해보지 않은 부부가 어디 있으랴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못 살 것 같던 날들 흘러가고 
고민하던 사랑의 고백과 열정 모두 식어가고 
일상의 반복되는 습관에 의해 
사랑을 말하면서 
근사해 보이는 다른 부부들 보면서 
때로는 후회하고 때로는 옛사랑을 생각하면서 
관습에 충실한 여자가 현모양처고 
돈 많이 벌어오는 남자가 능력 있는 남자라고 누가 정해 놓았는지 
서로 그 틀에 맞춰지지 않는 상대방을 못마땅해 하고 
자신을 괴로워하면서 
그러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귀찮고 번거롭고 
어느새 마음도 몸도 늙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아 
헤어지자 작정하고 
아이들에게 누구하고 살 거냐고 물어보면 
열 번 모두 엄마 아빠랑 같이 살겠다는 아이들 때문에 눈물짓고 
비싼 옷 입고 주렁주렁 보석 달고 나타나는 친구 
비싼 차와 풍광 좋은 별장 갖고 명함 내미는 친구 
까마득한 날 흘러가도 
융자받은 돈 갚기 바빠 내 집 마련 멀 것 같고 
한숨 푹푹 쉬며 애고 내 팔자야 노래를 불러도 
열 감기라도 호되게 앓다 보면 
빗길에 달려가 약 사오는 사람은 
그래도 지겨운 아내, 지겨운 남편인 걸 
가난해도 좋으니 저 사람 옆에 살게 해달라고 빌었던 날들이 있었기에 
하루를 살고 헤어져도 저 사람의 배필 되게 해달라고 빌었던 날들이 있었기에 
시든 꽃 한 송이 굳은 케이크 한 조각에 대한 추억이 있었기에 
첫 아이 낳던 날 함께 흘리던 눈물이 있었기에 
부모 喪 같이 치르고 무덤 속에서도 같이 눕자고 말하던 날들이 있었기에 
헤어짐을 꿈꾸지 않아도 
결국 죽음에 의해 헤어질 수밖에 없는 날이 있을 것이기에 
어느 햇살 좋은 날 
드문드문 돋기 시작한 하얀 머리카락을 바라보다 
다가가 살며시 말하고 싶을 것 같아 
그래도 나밖에 없노라고 
그래도 너밖에 없노라고         (작자 미상) 

끝으로, 성령 충만한 가정을 이루어가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서로를 용서하는 법을 배웁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용서받은 것 처럼… 앤더슨이란 기독교 심리학자가 말하는 용서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째,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이름과 상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둘째, 자신의 상처와 증오를 직시한다. 
셋째, 예수님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신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도록 한다. 
넷째, 서로의 짐을 지기로 결정한다. 
다섯째, 용서하기로 결단한다. 
여섯째, 상처의 목록을 찢어버려라. 
일곱째, 상처의 목록을 하나님께 드리고 기도한다. 
여덟째, 용서한 사람을 이해하라. 
아홉째, 용서의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라. 
열째, 상처 받은 결과로 얻은 영적 성장과 그 교훈에 대하여 또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인한 모든 유익함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라.  

우리 연약한 인간의 판단 능력과 지혜는 용서를 수용하기에는 그 용량이 너무나 작아 완전한 용서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가정에서부터 아내와 남편에게, 부모와 자녀에게 실천하는 사람이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성령 충만한 남편과 아내로서 책임을 다하고 가정과 교회와 더 큰 사회의 행복을 만들어 갑니다.   성령 안에서 이런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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