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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 (마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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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 (마 19:3~9)


제가 5년 전에 우리나라에 갓 왔을 적에 '아내들이 남편들에 대하여 용서할 수 없는 세 가지'에 대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편 못생긴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머리 벗겨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남편 키 작은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배 나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남편 돈 못 벌어오는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유머감각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마지막 말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남편들이 꽤 많이 있을 것입니다만, 이것을 '아내는 자기를 즐겁게 해 줄 줄 아는 남편을 원한다.'는 말로 바꾸어 보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과거에 클린턴 대통령이 방탕한 여자관계 때문에 국회에서 탄핵을 받는 등 온 미국에 한창 물의를 일으켰을 때에 어느 기자가 힐러리 여사에게 "당신은 왜 이런 남편과 이혼을 하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힐러리 여사의 대답이 "그래도 나를 웃겨 줄 수 있는 남자는 클린턴밖에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는데, 우리나라의 아내들도 그처럼 남편에게서 돈보다는 유머감각을 더 원한다는 말에 저는 상당히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그 말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합니다. 
바로 '뭐든지 다 용서해 줄 테니까 그저 돈만 잘 벌어 와라.'입니다.
워낙에 경제불황이 오래 계속되다 보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은 오로지 '돈 잘 버는 것' 이것 한 가지만으로 축소되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아내에게 있어서 남편이라는 존재는 인생의 반려자로서 자기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돈 벌어다 주는 기계'로 전락해 버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 반대로 '남편 쪽에서 아내에게 바라는 것'에 대한 말로서 제가 들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이 역시 여러분 대부분이 다 잘 아시는 이야기이겠지만, "미인(美人) 아내와는 3년을 살 수 있고, 성격 좋은 아내와는 10년을 살 수 있고, 요리 잘하는 아내와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저로서는 이 말만큼은 완전히 공감되지 않습니다.
저는 '얼굴 예쁘고 마음씨도 착하지만 요리는 그다지 잘하지 못하는 아내'와 20년이 넘도록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간에 이런 이야기들은 부부가 함께 행복하게 해로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남편과 아내 사이에 평생토록 진실하고도 뜨거운 사랑을 나누면서 살기 위해서는 '유머감각'이든지 '요리 실력'이든지 간에 그 사랑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그 어떤 강력하고도 영속적인 동기나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5월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지만, 사실 부부라는 것은 그 가정을 유지시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날'이나 '어버이날'은 잘 지키면서도 2007년부터 제정되었다는 '부부의 날' 5월 21일, '둘'이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21'일로 정했다는 그날은 사실 저부터도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아마 부부는 '일심동체의 사이'인 까닭에 부모자녀 사이보다는 의례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남편과 아내들이 부부 사이에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기독신자 부부들 중에서도 심각한 시험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일단 부부관계부터가 흔들리게 되면 그 여파가 그 자녀들의 교육이나 그 부모들을 봉양하는 문제에 어떤 필연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이 가정의 가장 기본 단위인 부부의 관계를 바로 유지하고 평생토록 변함없는 행복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딱 한 가지만 꼽는다면 과연 무엇이 되겠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평생토록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함께 행복한 삶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부부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한 몸'인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3절부터 9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당시 바리새인들도 크게 두 학파로 나뉘어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비교적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에서는 아내가 간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혼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에, 보다 자유주의적이었던 힐렐 학파에서는 아내에게 사소한 잘못이 있는 경우뿐 아니라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는 경우까지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한 바리새인들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즉 '무엇이든지 이유가 있기만 하면'이라고 한 것은 바로 힐렐 학파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지 간에 둘 다 '남편이 아내에 대하여 이혼하는' 경우뿐이며 '아내 쪽에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는 아예 배제되어 있었으며, 이것은 여자를 경시하고 있던, 아니 사실상 거의 아버지나 남편의 재산처럼 취급하고 있던 당시 유대 사회의 풍토를 고스란히 반영해 주는 일면이기도 합니다.

그런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라고,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입각한 남편과 아내의 가장 근본적인 관계부터 일깨워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애당초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 다시 말해서 역할은 구별되면서도 존재론적으로는 동등한 '남자 사람'과 '여자 사람'을 각각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남편의 무슨 소유물처럼 취급하면서 '남편이 어떤 경우에는 아내를 내버릴 수 있는가?'라고 이혼 규정을 순전히 남편의 일방적인 권리로만 써먹으려 하는 그 자체부터가 이미 크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남자와 여자를 각각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창세기에서 읽지 못하였느냐고 그 바리새인들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임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둘이 한 몸이 됨" 즉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서 부부가 되는' 일부일처에 입각한 결혼은 그저 동물적인 본능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이 여러 가지 '사회적인 관계'들을 시도하다가 정착시킨 제도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애초에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법이요 제도'입니다.
사람은 태어난 후에 어린 시절에는 부모에게 의존하여 살게 되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그 부모를 떠나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가 되어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는 반려자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는 예수님의 이 지당하신 말씀에 무슨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이혼은 원칙적으로 불가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남녀를 짝지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일이지만 '부부가 나뉘는 것'은 그처럼 하나님께서 맺어 주신 관계를 사람이 깨뜨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원래 하나님께서 어떤 두 사람을 짝지어 주셨을 때에는 '같이 한 번 살아 보고 맞지 않으면 헤어져도 된다.'는 차후 선택권을 함께 주신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응답은 바리새인들을 당황시켰습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 이혼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러저러한 경우에는 이혼을 해도 된다.'라고 대답해 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는 결혼을 사람이 이혼으로 나눌 수 없다.'라고 아주 단호하게 선언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면 왜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내어버리라고 명했습니까?"라고 자기네들로서는 상당히 유력해 보이는 반론을 예수님께 제기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신명기 24장 1절에 "1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는 엄연한 율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그랬지만 더 고대로 올라가서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남자들은 그 도덕적 수준이 이방인과 거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는 상호보완의 동등 관계'로 깨닫지 못하고 순전히 '남편이 아내를 소유하는 관계'로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이혼이라는 것도 남편으로서는 단지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것을 '내어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아내 쪽에서는 이런 부당한 이혼으로 인하여 일방적인 피해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그처럼 이혼을 당한 여자는 재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자 혼자서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길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그 당시 사회에서는 사실상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처럼 이혼이라는 것을 남용하고 악용하던 '완악한 남편'들로 하여금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아내)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내게" 한 것은, 이혼 증서를 만드는 합법적인 절차도 없이 함부로 아내를 내버리는 악습을 견제하는 동시에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나마 여자로 하여금 다른 남자와 재혼할 수 있는 길을 합법적으로 보장해 주기 위함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앞서 인용했던 신명기 24장에서 계속 이어지는 2절의 부가설명 "2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라는 말씀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바리새인들이 '이혼할 수 있는 근거'로 내세웠던 모세의 율법의 참된 의미를 그들에게 일깨워 주시면서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강력히 선포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본래는" 다시 말해서 '원칙적으로는'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라고 재삼 강조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시면서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즉 '배우자의 간통'과 같이 결혼의 순결성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혼을 할 수 없다고 분명히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을 잘 새겨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혼은 가능한 것'이라는 전제 하에 단지 '어떤 경우에 이혼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결혼은 원래 이런 것이다.'라는 대원칙을 일깨워 주시면서 '따라서 이혼을 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대답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가운데 부부가 되고 그 후에도 평생토록 그 점을 늘 자각하면서 살고 있는 남편과 아내에게는 이혼이라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될 리가 없는 '논외의 주제'나 마찬가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결혼을 그처럼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는 두 사람 사이의 독점적이며 영속적인 관계'로서 시작하고 또한 유지시켜 주는 '믿음'과 '자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결혼서약'입니다.
결혼서약문은 교회의 예식서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다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제가 결혼주례를 할 때에 사용하는 서약문은 이렇습니다. 
"신랑(신부) 아무개 군(양)은 신부(신랑) 아무개 양(군)을 아내(남편)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형통할 때나 어려울 때나 변함없이 이 여자(남자)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존경하고 위로하며 도와주고 보호(순종)하여 진실한 남편(아내)으로서 일정한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이 세상에 사는 평생토록 굳게 지킬 것을 하나님과 모든 증인들 앞에서 신실하게 서약하십니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대부분의 부부들이 결혼식 할 때만 딱 한 번 듣고서 '아멘' 한 마디 하고 나면 깨끗이 잊어버리고 마는 이 결혼서약이야말로 우리 기독신자 남편과 아내들이 평생토록 행복한 부부로 살기 위해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결혼생활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 서약에 보면, '기쁠 때'나 '건강할 때'나 '부할 때'나 '형통할 때' 뿐 아니라 '슬플 때'나 '병들 때'나 '가난할 때'나 '어려울 때'에도 "변함없이" 일정한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지킬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실 결혼이라는 것이 미혼 청년처녀들이 장밋빛 꿈을 그리고 있는 대로 마냥 '깨가 쏟아지게 재미있고 둘 다 내내 건강하고 돈 걱정은 전혀 없고 만사가 다 형통하기만' 하다면 어느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살지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인생의 현실이라는 것은 신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닥쳐오기 시작하면서 '서로 간의 성격 차이나 배우자의 중병이나 실직으로 인한 생활고를 비롯한 온갖 어려운 일들'을 그 어느 부부나 크든지 작든지 간에 맞이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때야말로 진짜로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이 세상에 사는 평생토록 굳게 지킬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서로 서약했던 것을 기억해내고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때인 것입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서 신자 부부와 불신자 부부의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신자 부부들도 '만사형통'할 때야 누구든지 행복하게 살 줄 압니다.
하지만 그런 '결혼생활의 위기'라는 것이 찾아오고 '부부지간의 갈등'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면 이들은 아주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우리 두 사람이 이처럼 서로 맞지 않는데, 이렇게 평생을 피차 불행하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헤어져서 각자 새로운 인생을 찾아나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하면서 합의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자 부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는 '하나님의 성혼선포'를 받고 남편과 아내가 된 신자 부부에게는 그런 이혼이라는 것이 어떤 '선택 사양'(option)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 부부는 결혼한 이후에 서로가 정말 '맞지 않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제도라는 틀' 때문에 그 '불행한 결혼생활'을 평생토록 어쩔 수 없이 지속해야만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질문에 대하여 우선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제도'나 '율례'를 명하셨을 때에 그 말씀을 불순종하여 자기 마음대로 이혼을 하는 불신자들은 '새로운 인생의 행복'을 찾게 되고 반면에 그 말씀을 순종하여 지키는 신자들은 오히려 불행하게 되도록 만드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그럴 리가 만무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는 말씀을 순종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맺었던 '결혼서약'을 끝까지 지키면서 사는 신자 부부의 참된 행복은 이렇게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신자 부부에게도 결혼생활의 '어려움'이나 '위기'는 똑같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불신자 부부들이 '이럴 바에서 서로 헤어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그런 난관에 봉착해서도 우리 신자 부부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기도하면서 노력하게 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이혼은 아예 선택의 여지도 될 수 없으니까 그런 기도와 노력은 더욱 간절하게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런 부부에게 그 난관을 함께 헤쳐 나갈 길을 반드시 열어 주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불신자 부부들로 하여금 쉽게 이혼하게 만드는 그 '위기'라는 것이 신자 부부들에게는 오히려 그 둘의 관계를 더욱 탄탄하게 다지는 성장의 기회로 전화위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자세로 평생을 살아가게 되면, 서로에게서 '육신적인 매력'이라는 것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부부 사이도 절로 금이 가고 더 멀어질 수밖에 없는 불신자 부부들과는 달리, 우리 신자 부부들은 함께 먹어가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사랑하고 더 존경하고 더 아끼는' 그래서 점점 더 행복한 남편과 아내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대로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지키는 신자부부들만 누릴 수 있게 해 주신, 신혼 때만 아니라 평생토록 '깨가 더 많이 쏟아지는' 행복한 결혼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결혼주례를 하게 되는 예비 신랑신부들을 결혼식 한 주일 전에 미리 만나서 이러한 결혼서약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이제 결혼식 때까지 남아 있는 6일 동안이 마지막 기회이니까 잘 생각해 보시고 만약에라도 이 서약을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맺고 그대로 살 자신이 없다면 이번 토요일 결혼식장에 안 나오시면(?) 제가 결혼 취소된 줄로 알겠습니다."라고 다짐을 해 둡니다.
하지만 그 말 듣고서 그 6일 사이에 마음이 바뀐 사람은 지금까지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결혼 주례했던 신랑신부들은 다 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는 말씀에 따를 각오가 분명했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반드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계실 것이며, 또한 앞으로 평생토록 점점 더 행복해질 것을 저는 100퍼센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 신자의 결혼식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하는 예식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진실한 마음과 진지한 자세'로 행해야 마땅합니다.
저는 요즘 연예인들의 '진지함이 사라지고 있는' 결혼식이 우리나라의 청년처녀들에게 아주 좋지 못한 모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랑으로 하여금 신부를 등에 앉히고 팔굽혀 펴기를 시킨다든지 신부로 하여금 신랑의 만세삼창에 맞추어서 '아이구 좋다'라고 말하게 하는 따위의 온갖 유치한 순서들로 식순이 채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경향교회의 미혼청년들은 만약에 그처럼 온갖 흥청망청하는 순서들로 채워지는 결혼식이 더 재미있고 멋지다고 생각된다면, 제가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아예 목사는 주례로 청하지 말고 그저 여러분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결혼식은 '경사(慶事)'임에는 틀림없지만, 결혼식의 참된 기쁨은 그런 코미디 쇼 같은 유치한 진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짝지어 주심'을 신랑신부와 모든 하객들이 함께 영적으로 공감하게 됨으로써 나누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끼리 재미있게 하는 결혼식'의 들러리가 결코 아니라 친히 짝지어 주시는 신랑과 신부의 진정한 주례자이신 동시에, 그 두 사람의 평생을 진짜로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시는 영원한 '집주인'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부부 관계에 대하여서는 이 본문 외에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한 구절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의 온갖 복잡한 카운슬링들이나 목사들의 무슨 '부부의 십계명' 따위의 설교들 대신에 그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는 이 한 마디 말씀 안에 한 남편과 한 아내가 무슨 '권태기' 따위도 없이 평생토록 점점 더 깊고 뜨겁고 강렬하게 누릴 수 있는 사랑과 행복의 요령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혼상담원의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이며, 주례 목사의 보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부부 행복의 철칙'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금 이 자리에도 이혼을 하셨거나 또 그 후에 재혼도 하신 교인들이 계실 줄로 알고 제가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그 이혼은 남편의 폭력이나 아내의 부정(不貞) 등으로 인한 불가피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본인 쪽에서 '부당한 이혼'을 하신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 어느 쪽이든지 간에 그렇게 이혼을 하게 되기까지 그 당사자들은 '인간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겪으신 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비록 본인 쪽에서 '부당한 이혼'을 한 경우라 할지라도 자신이 저지른 그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만 했으면 지금까지 계속해서 마음에 부담으로 남겨둘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모든 죄가 다 그렇듯이 일단 분명히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으면 그 죄는 주님께서도 '기억조차 아니 하시는' 과거로 완전히 끝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혼 후에 재혼하신 부부 역시 현재의 결혼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며 최선일 뿐임을 꼭 깨닫고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의 부부들은 서로에게서 매력을 잃지 않고 서로를 향한 열정을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온갖 것을 다 해 봅니다.
많은 아내들이 자기보다 나이 어린 여자에게 남편이 끌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성형수술을 하는가 하면, '돈만 잘 벌어오면 다 용서해 주겠다.'는 아내에게 버림 받지 않기 위해서 '돈 버는 기계'처럼 죽도록 일해야 하는 남편들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육체의 미(美)'나 '재물'이 부부 사이를 정말 행복하게 유지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의 서약'을 기억하면서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신실하게 지키는 것만이 평생토록 행복한 남편과 아내로 함께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아내 여러분께서는 '머리 벗겨지는' 남편을 괄시하지 말고 '우리 가족 먹여 살리느라고 저렇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하시고, 할 줄 모르면 요리책을 펴 놓고 삼계탕이라도 한 그릇 끓여 드리면서 좀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 남편이라는 것은 아내가 자존심만 조금 살려 주면 뭐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편 여러분께서는 아내의 눈가에 '까마귀 발'이 생기고 손등이 거칠어진 것을 보시면 '지금까지 날 내조하고 애들 키우느라고 고생이 많았구나.'라고 깨달으시고, 요즘 텔레비전에서 '10년 전과 뭐가 다르지?'라고 선전하는 미용크림이라도 하나 사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 선물포장 안에 '현금봉투' 하나까지 넣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그런 '깜짝 이벤트'를 1년에 꼭 한 번만 해 주어도 아내들은 365일 내내 행복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은 '이런 식으로는 우리가 더 이상 같이 못 살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만약에라도 생기면, '이 사람을 그 어떤 경우에도 변치 않고 평생토록 남편/아내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돕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했던 서약을 기억하시고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여러분 두 사람을 친히 짝지어 주신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신 '더 깊은 사랑'을 맛보며 그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해 두신 '더 큰 행복'을 반드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그녀를 향하여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삼상 1:8)라는 기가 막히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남편이나 그런 말을 듣게 된 아내나 그 얼마나 행복한 부부이겠습니까?
사실 '자식 사랑'과 '부부 사랑'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부모자녀 사이는 '1촌'이지만 부부 사이는 문자 그대로 '0촌'입니다.
'사람이 나누고 돌아서면' 남남이 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맺은 서약을 지키고 살면' 피차 '열 명의 아들보다 더 나은' 남편과 아내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결혼을 통하여 서로를 '더 나은 반쪽'(the better half)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진정 행복한 부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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