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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튼튼한 가정을 세우는 10가지 가치(6) (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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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튼튼한 가정을 세우는 10가지 가치 제6편 
본문 : 출애굽기 20:13

설교자: 릭 워렌 목사
  

오늘은 튼튼한 가정을 세우는 10가지 가치 중 여섯 번째 가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20장 13절은 매우 간단히 두 마디로 되어있습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 계명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아마도 고속도로에서 운전할 때 외에는 살인의 충동을 별로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측하건대, 우리 교인들 중에는 전문적으로 암살을 하시는 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메시지가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클래런스 대로우’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아무도 죽인 적은 없지만, 수많은 부고를 읽으며 기뻐했습니다.” 평균적으로 미국 어린이는 6학년이 될 때까지, 텔레비전을 통해 8,000건의 살인을 목격한다고 합니다. 또한 텔레비전을 통해 십만 건의 폭력을 목격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폭력으로 얼룩진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22분마다 한 명씩 누군가가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거나 구타당하거나 목이 졸려서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세계 최고의 살인 발생률입니다. 질병으로 죽는 것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폭력으로 인해 죽고 있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라는 명령은 매우 간단명료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너무나 자주 잘못 이해되고, 잘못 적용되고, 잘못 이용되고, 잘못 해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이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지에 대해 이 시간 함께 나누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I. 이 명령이 의미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1. 동물을 죽이는 것은 금지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로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신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모순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곳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고 다른 곳에서는 다른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불분명한 구절은 분명한 구절에 비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동물을 죽여도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9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당신이 원하지 않는 한, 억지로 채식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채식주의자가 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은 괜찮습니다. 


2. 사형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여러 곳에서 사형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죄들은 사형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기 24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이것은 매우 분명한 말씀입니다. 살인처럼, 어떤 죄는 사형이 요구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하나님께서 정부에 권위를 위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정부의 설립을 허용하셔서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범죄자들을 처벌하게 하셨으며, 거기에는 사형까지 포함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정부들을 세웠다. 내가 그들을 허락했다. 완전한 정부는 없고, 정부가 하는 일마다 다 옳지는 않지만, 그들은 법과 질서를 유지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NIV 번역에서는 정부를 정의의 집행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정의가 이뤄지길 원하십니다. 그것도 신속한 정의의 집행을 요구하시지만, 우리의 항소 제도는 그것을 우습게 만들었습니다. 윌리엄 맥킨리 대통령이 암살되었을 때, 암살자는 잡혀서 유죄 선고를 받고 53일 후에 처형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여성들을 살해한 테어도어 번디가 2년 전(역주-1989년)에 마침내 처형되었는데, 그것은 범죄 후 11년만이었습니다. 그 11년 간 소요된 비용을 누가 지불했습니까? 바로 여러분 같은 납세자들이 지불했습니다. 그것은 정의롭지 않습니다. 올리버 웬댈 홈즈는 “정의의 실행을 지연시키는 것은 정의를 부인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혹자는 “나는 사형제도가 범죄를 예방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형된 범죄자가 저지르는 범죄는 막을 수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다른 누구를 강간하지 못할 것이고, 다른 누구를 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참고로, 종신형 선고를 받은 죄수가 실제로 형을 사는 기간은 평균 8년이라고 합니다.
 

3. 참전을 금지하지 않는다.   

전도서 3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할 때가 있고.” 어떤 것들은 싸워서 지킬 가치가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은 옳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옳습니다. 악의 확산을 막기 위해 싸우는 것은 옳습니다. 악이 이기는 데 필요한 것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의 가족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 가정 안에서는 어떠한 살인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첫 살인은 가정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가인이 그 형제를 죽였습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폭력적 범죄들과 살인은 가족 간에 일어납니다. 어쩌면 당신은 살인이란 시카고나 도시빈민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틀 전 오렌지 카운티 리지스터 지의 헤드라인으로 이런 기사를 다루었습니다. “오렌지 카운티의 가정 폭력이 급격한 증가 추세에 있다. 지난 달에만 아홉 명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바로 여기, 우리 새들백 교회가 속한 오렌지 카운티 지역의 주민 아홉 명이 자기 가족에게 살해되었습니다. 


II. 이 계명이 가정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 가치가 나의 가정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이 말씀의 진정한 가치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자살은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살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자살은 대학생 사망원인 2위입니다. 고등학생 중에서는 3위입니다. 교통사고로 죽는 학생 수보다 자살로 죽는 학생 수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내 생명은 내 것이니까 나는 살거나 죽을 권리가 있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니, 너는 그럴 권리가 없어. 내가 너에게 생명을 주었고, 오직 나만이 그 생명을 빼앗을 권리를 가졌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은 당신의 것이 아니므로 당신이 그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경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이 살 정확한 날수를 미리 정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욥기 14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가 살 날 수를 정해놓았고, 네가 그것을 중도에 끊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삶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암담한 시기를 여러 번 겪어 보았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자살을 고려해보았거나, 고려하는 중이라면, 당신은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당신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살피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절망에서 벗어나도록 도우실 수 있습니다. 

라구나 해변에 가보면 썰물이 밀려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썰물이 있으면 반드시 밀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삶은 썰물 때처럼 모든 것이 휩쓸려 나간 상태일 수 있습니다. 썰물 때의 해변은 추합니다. 부목과 쓰레기들이 널려있어서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다려 보십시오. 반드시 밀물이 밀려옵니다. 만일 당신이 “내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이 알아야 할 분명한 사실은 “당신은 하나님께 중요하며, 우리 교회에는 당신을 아끼고 당신을 돕고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알려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당신이 그 역경과 어둠의 시간을 통과하여 다시 당신의 삶에 햇살이 비취도록 도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살은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안락사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안락사는 기형이나 고령, 불치의 병이 걸린 사람에게 죽음을 유발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연의 순리에 의한 죽음을 허용하되, 생명을 인공적으로 연장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단지 불편하기 때문에, 혹은 그 삶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죽음을 유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욥기 12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내가 언제 삶을 중단해야 할지 결정할 권리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결정해두셨고, 당신에 대해서도 결정해두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쟁점이 되었습니다. 안락사는 의사에게 사람들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을 합법화합니다. 그러나 의사나 다른 아무라도 사람들의 죽음을 결정할 권리가 없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인공적 생명 유지 장치의 플러그를 뽑고 자연의 순리에 생사여부를 맡기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누가 살기에 적합하고, 적합하지 않은지 결정할 권리를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히틀러였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낙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39편 말씀입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이 성경구절에 나오는 모든 “내가”, “나를”, “나의”, “내”에 동그라미를 치십시오. 시편기자는 모태 속의 태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고, 나를 보셨다고 말/씀 합니다. 모태 속에 있는 것은 한 덩어리의 조직체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네 모든 날들을 계획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성경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당신의 성격까지 아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태 속에 있는 것은 인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계획하지 않은 임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잘못 일어난 임신은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고, 어떤 악의 결과로 이루어진 일이라도, 어쩌다 잘못 일어난 임신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것을 계획했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그의 날 수를 세었다. 나는 그 아기를 안다. 내가 그 아기의 유전자들을 조합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아기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기 하나, 하나마다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태아는 조직이 아니라, 내가 계획한 생명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의 모든 날들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정해졌다면, 낙태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근본적으로 중단시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낙태라는 현실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아십니까? 미국에서 임신되는 태아의 26%, 네 명의 태아 중 한 명인 3천만 명이 낙태로 살해되었습니다. 이 수치는 모든 전쟁의 전사자들 수보다 많습니다. 매년 낙태된 4~500명의 아기들이 낙태 후에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낙태의 97%는 강간이나 근친상간이나 산모의 생명이 위협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라면 적법한 이유가 되겠지만, 97%의 이유는 단순히 산모가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 아기를 낳지 않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지금 제 생활에 맞지 않기 때문이에요”라고 그들은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낙태를 권장하고 낙태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여권운동가들이 지금은 여아가 남아보다 많이 낙태된다고 불평합니다. 왜냐하면 태아 성별 감식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남아가 아니라서 낙태되는 아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낙태된 여아들에게도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범퍼스티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낙태는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믿고 싶지 않다면, 이 구절을 성경에서 오려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너무나도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기도 환영 받지 못한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의 오류는 부모는 아기를 환영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환영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환영 받지 못하는 아기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기가 태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수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당신은 다른 죄처럼 이 죄도 회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살인자였던 세 사람, 바울과 다윗과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왔고, 용서받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이 은혜의 메시지입니다. 당신이 과거에 어디에 있었는가 보다는 오늘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이제부터 어떤 자리에 설 것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원치 않는 임신을 해본 적이 없잖아요” 맞습니다. 저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의 수십 명의 여성들이 그런 경험을 해 보았고, 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따랐습니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리 에젤에게 오늘 아침의 간증을 부탁했습니다. 

저는 “살인하지 말지니라”라는 계명을 알았지만, 그것이 저에게 해당될 줄은 십대 시절에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필라델피아 도시 빈민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지역을 빈민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단지 사회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이라고 합니다. 저는 부모님 모두가 알코올 중독자인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원하지 않는 다섯 딸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원했기 때문에 내 이름을 ‘리’라고 지었습니다. 저는 원래 아들이 되어야 할 아이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남자들이 아들을 낳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 때, 몹시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늘 듣던 말이 있습니다. “저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자라면서 건전한 자아상이나 자존감을 전혀 갖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저는 원하지 않거나 필요하지 않아서 당연히 낙태되었어야 할 그런 아이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 가족에게 친밀감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 가족은 미 동부에서부터 서부까지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1년에 한 번씩 가족 소풍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날이 되면, 어디에 있든지 우리 가족은 각자 야외로 나가 식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 가족은 아직까지도 매우 친밀한 편은 아닙니다. 

고등학교 졸업 전 십대 시절, 저는 우연히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네 명이 하는 카드 게임에 사람이 모자랄 때, 친구들과 몇 번 기분 전환으로 그곳에 가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단상 앞으로 나가서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하나님을 하늘의 요정과 같은 분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삶에 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른이 된 저는 착한 사람들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경고나 준비될 틈 없이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 버스를 타고 이곳 캘리포니아로 왔습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타이피스트로서 첫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게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직장에서 오전에 만난 한 영업사원이 저녁에 저를 강간했던 것입니다. 십대의 처녀이자 신참 그리스도인이었던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피해자들이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시나리오는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은 “너는 패배자야, 리. 너는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음성은 “조용히 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꾹 참고 다음날 출근했지만, 감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매우 상처가 깊었습니다. 결국 병원에 가보니 임신이었습니다. 

저와 하나님의 관계는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다는 것과 십계명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한 친구가 저에게 낙태를 권유했습니다.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만약 30년 전에 오늘날과 같이 주에서 운영하는 부모 계획 클리닉(역주-미국 전역에 지부가 있는 낙태, 가족계획 등을 돕는 의료기관)이 있었다면, 제가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모릅니다. 만일 그랬다면 어떤 친구라도 저를 돕는다는 마음으로 저를 그곳으로 데려가서 낙태 수술을 받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그런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낙태 수술을 받으려면 국경을 넘어 멕시코의 티후나까지 가야 했습니다. 한 친구가 거기에 가서 낙태를 받아 보았는데 별 거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십대가 부모의 동의 없이 낙태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십대 소녀는 다음날 아침에 학교에 뭘 입고 갈지도 결정하기 어려워하는데, 하물며 어떻게 생명을 판가름하는 이런 결정을 내릴 자격이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지 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아이였고, 원하지 않는 아이까지 임신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신비한 목적을 가지고 나를 원하셨듯이, 이 아이도 원하실지 모른다고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살펴보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국, 낙태는 종교적 문제를 넘어서 인권의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뱃속의 아기를 세상에 낳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이 아기를 출산일까지 지킬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낙태란, 일시적인 문제에 대해 돌이키지 못할 영원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충격과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결코 저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고통을 품은 채 이곳 로스앤젤레스로 왔고 주머니에는 단돈 50불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열심히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부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낙태하지 말 것을 권유했을 뿐 아니라, 나를 실질적으로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집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고,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제 삶에 일어난 최악의 일이 제 삶의 최고의 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뱃속의 아기를 사랑하고 아기와 유대감을 가지며 어느 생모가 그렇듯, 아기의 최선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아기를 입양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입양과에 등록했고 태어날 아기에 대한 친권을 포기했습니다. 마지막 서류에 서명하기 전 날 저녁, 하나님께서 저의 이런 결정을 허락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TV에서 고전인 “십계명”을 다시 한 번 보면서 모세의 어머니가 어린 아기 찰톤 헤스톤을 바구니에 넣는 것을 절절한 심정으로 응시했습니다. 만일 그녀의 이웃이 그것을 보았다면 아기 엄마가 아기를 버리다니 아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자녀를 키울 수 있지만, 모세의 어머니는 그것을 선택할 자유가 없었습니다. 저는 저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저의 아이를 LA 카운티 입양 절차의 강에 맡기고서 누가 아기를 건져내든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카운티 병원에서 딸을 낳았습니다. 30년 전에는 생모에게 아무 권리도 없다시피 했습니다. 제가 들은 말은 “건강한 딸을 출산하셨어요. 10시 30분에 퇴원하시면 됩니다”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저는 아기를 보지도 못했고, 한 번 안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완전히 속은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을 많이 낳을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그 아기가 제가 낳을 유일한 아기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LA 카운티의 입양 기록은 대외비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으로 내 인생의 한 장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으며, 내 삶의 잃어버린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찾기로 했습니다. 

몇 주, 몇 달, 몇 년의 세월이 흐르다 보면 인생에서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은 고통스러워도 불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남자를 별로 신뢰하지 않게 되었기에, 스물 아홉 살이 되어서야 결혼을 했습니다. 저의 결혼은 행복했습니다. 

남편에게는 이미 두 자녀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LA 카운티 입양과에 앉아서 남편의 두 딸을 입양하는 선서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래 전에 저의 아기를 위해서 누군가가 이 자리에 앉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모가 되면서 많은 생각들이 스쳤습니다. 친권을 포기해 보기도 했고, 아이를 입양해보기도 해 본 입장에서 제가 아는 것은 생모가 되는 데는 9개월이 걸릴 뿐이지만, 부모가 되는 데는 몇 십 년이 걸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울고 사랑하고 돌보고 나누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입양한 자녀들이 저를 엄마라 부르고, 제가 낳은 아기의 양부모가 그 아기를 딸이라 부르고, 아기는 양부모를 엄마, 아빠라 부르는 것을 원했습니다. 저는 제가 낳은 아이의 삶에 간섭하거나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저의 남편은 “필 도나휴 쇼 등에 보면 입양아들이 자주 나오는데, 세상의 모든 입양아들은 낳아준 부모를 찾는 것 같아”라고 종종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낳아준 부모를 찾으려 하는 입양아들은 전체의 10% 미만입니다. 나는 그런 모든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맡기고, 결코 간섭하거나 개입하지 않기로 한 아기를 하나님께서 지켜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결코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집에 앉아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상대방은 “안녕하세요? 저를 만나본 적이 없으시겠지만, 당신은 저의 어머니예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가 당신을 찾으려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라고 매우 조리 있게 말했습니다. 하나는 내가 할머니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두 번째 이유를 듣고 더 기뻤습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어느 날엔가 할 수 있기를 항상 꿈꿔온 것으로서, 전화 통화를 통해 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딸은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제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는 딸이 잘 하는지 보려고 한참 들어주었습니다.)

딸은 입양 기록, 병원, 변호사, 사람 찾는 회사 등을 두루 다니며, 많은 정보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곤란한 화제는 피했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만나기 전에 남편이 “당신의 딸에게 강간 때문에 생긴 아기였다고 말해요. 딸이 당신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것은 싫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어떤 어린이에게도 “너는 실수로 생겼어. 너는 잘못해서 생겼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은 제가 하나님과 생명에 대해 아는 바와 조화될 수 없습니다. 저의 남편은 지혜롭게 줄리의 남편과 우리가 만나기 전날 저녁에 통화를 하면서 과거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저는 침실의 내선으로 그 통화 내용을 생생히 듣고 있었습니다. 제 남편이 줄리의 남편에게 “줄리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되면 줄리에게 말해 주세요. 우리는 줄리를 잘 몰라요”라고 말했습니다. 줄리의 남편은 “와! 저에게 줄리를 주려고 20년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니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호텔 문으로 놀라울 정도로 저를 닮은 젊은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아기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한 말은 “자, 할머니에게 가보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도 그녀 뒤에 있었습니다. 그는 손을 내밀고 “악수하고 싶습니다. 줄리를 낙태시키지 않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기를 기다려 왔습니다. 줄리와 아이들이 없었다면 제 삶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제가 첫 번째 저서를 이미 집필했을 때였기 때문에, 그 일에서 나의 두 번째 책의 제목을 얻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잃어버린 부분』입니다. 그 책을 출간한 이후, 너무나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줄리의 엄마가 어버이날에 로스앤젤레스로 와서 우리 두 엄마는 한 딸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생의 잃어버린 부분들을 되찾게 하시는지 얘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합리한 일들을 의미 있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진짜 어머니이고 그녀는 가짜 어머니라거나, 저는 자연적인 어머니이고 그녀는 인공적인 어머니라고 느낀 적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아이의 인생의 퍼즐 조각들일 뿐입니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기독교계나 일반 대중매체들을 통해 나눌 멋진 기회들을 가져왔습니다. 마이클 잭슨 쇼에 나갔을 때, 그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서 “오, 놀라워요. 그렇다면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셨군요. 하나님께서 한 남자를 보내어 당신을 강간하게 하시고 이 아기를 갖게 하셨군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다만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샐리 제시 라파엘 쇼에 두 번 나갔습니다. 딸은 훌륭하게 대처했습니다. 헤럴드 형제 쇼에도 나갔는데 그는 내 딸에게 “당신은 사랑의 산물이 아니라, 강간의 산물이군요”라고 말했습니다. 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령 결혼한 부부 사이에 태어났더라도 우리가 사랑의 산물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게다가, 저는 하나님께서 제가 태어나는 것을 원하셨다고 믿기 때문에 저는 사랑의 산물입니다.” 내 딸답게 장했습니다! 그녀는 말을 이었습니다. “성폭력으로 태어난 어린이들은 악한 유전자를 유전하지 않습니다. 저는 정서적으로 뒤틀린 테드 번디(역주-연쇄살인범으로서 아버지를 모르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유형의 인간이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시작이 어땠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입니다.”

그 말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셨다면, 모든 아이는 생일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로서 정직하게 말하자면, 아이는 우리를 통해 올뿐이지, 우리로부터 오지 않는다! 아이는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존재입니다. 우리 각자의 수태와 우리 자녀들의 수태는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상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결정을 자동차 뒷좌석의 한 쌍의 십대에게 맡겨놓지 않으십니다. 생명의 결정을 흰 실험복을 입은 시술자에게 맡겨놓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생명과 죽음의 열쇠가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옳다면, 부부가 언제 사랑을 나눌지 결정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언제 생명을 만들지 결정하십니다. 이것이 맞는다면, 아무도 불법적인 사생아가 아닙니다.

당신이 입양되었다면 그것은 양부모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사랑을 받았지만, 다만 좀더 어려운 길이 선택되었던 것뿐입니다. 결혼한 부부의 사이에 우리가 태어났다 해서 우리가 더 분명하고 진실한 삶의 이유를 가졌다거나, 우리만 환영 받은 아이였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나를 정말로 원하셨어. 나는 태어나면 딱 좋을 시기에 태어났고, 부모님의 직업에 방해가 되지 않았어. 부모님께서는 나를 키울 넓은 집과 많은 돈을 갖고 계셨어. 모든 게 다 순조로웠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많은 어머니들이 임신한 것을 알고서 놀라서 울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놀라지 않으셨습니다. 또는 당신의 아버지가 기대감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오늘밤에 꼬마 린다를 만듭시다!”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상상하십니까? 아닙니다. 남자는 린다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현실을 인식하십시오! 그러나 린다를 생각하고 있는 누군가가 계셨습니다. 우리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린다를 만드실 수 있는 권력과 권세를 가진 분께서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을 원하셨습니다. 저는 생명의 결정권이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십계명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 결정권에 동의하고, 생명을 지키기를 바랍니다. 

제가 강간당하여 일어난 일들 중에 유일하게 좋은 점은 예쁜 아기가 태어났고 이제 그 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음을 증거하는 아름다운 실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잃어버린 부분들을 되찾게 하시는 이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아침에, 당신이 평화의 왕의 손을 잡는다면, 과거의 덫들이 당신의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당신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소중하며, 당신의 잉태와 탄생은 결코 잘못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드시고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하늘의 아버지를 알게 되면 삶이 새로운 의미와 뜻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도 빠짐없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나, 당신, 우리 모두를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후회할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쁜 일, 심지어 우리의 잘못된 선택이나 어리석은 결정들로도 선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리가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나쁜 일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나쁜 일의 많은 부분은 우리 스스로 자초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삶에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나쁜 일을 일으키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은 나쁜 일로부터 선을 이루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당신의 삶의 조각들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그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시고 당신의 삶에 내면의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대하십니다. (릭 워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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