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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부심을 갖는 성도 (아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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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을 갖는 성도 (아 1:5~7)


한 목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목장 주인의 막내딸이, 결혼하게 되었다. 그래서 가축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열었다. 제일 나이 많은 소가, 의장이 되어 “여러분 이제 곧 주인님의 막내딸이 결혼합니다. 전 주인을 위해, 할 일이 없는 동물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두들 “그렇게 하자!”고 했다. 먼저 소가 말했다. “나는 주인님을 위해 농사도 하고, 짐도 날라야 하니 죽을 수가 없소” 이어 말이 말했다. “나는 주인님을 태우고 다녀야 하고, 결혼식 날엔 따님을 모시고 가야 합니다.” 이번에는 개가 말했다. “나는 도둑을 지켜야 합니다.” 

고양이도 말했다. “나는 쥐로부터 식량을 지켜야 합니다.” 닭도 말했다. “나는 새벽마다 주인님을 깨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돼지 차례가 되었는데, 돼지는 할 말이 없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는 주인님의 것을 먹기만 하고, 이제까지 한 일이 없으니, 내가 죽겠소!”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노래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래서 잔칫상에 돼지머리가 올라가게 되었다. 이렇게 잔칫상에 오른 돼지는 자기 역할에 보람을 느껴, 항상 웃는 표정이라고 한다. 높은 자부심은, 죽어서도 웃음으로 피어난다. 

자아상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보는, 거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을 보는 거울은 2개다. 하나의 거울은 어둡고 부정적인 면을 비추고, 다른 거울은 밝고 긍정적인 면을 비춘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들여다보느냐에 따라, 현재의 삶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 

열등의식은 내가 남보다 더 못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부러워하며, 나 자신을 멸시하는 태도를 말한다. 한 마디로 열등의식은, 못난이 병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는 자신은 아이가 없다는 약점에 민감했다. 브닌나가 아이가 없다고 한나를 격동시켰을 때, 한나는 울었다. 

또 한나는 자신을 괴롭게 했다. 한나는 괴로워서 음식을 먹지 않았다. 밥맛을 잃었다. 열등의식은 자신을 괴롭게 한다. 또 남편 엘가나가, 한나의 가치를 인정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로 인정했다. 심지어 열 아들보다 나은 남편으로, 아내 한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한나는 울고, 먹지 않고, 슬퍼만 했다. 한나는 그렇게 자기를 멸시했다. 한나는 브닌나의 많은 자식을 부러워했다. 열등의식은 자신의 약점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상대방의 장점을 부러워한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자기를 실제보다 못하게 평가하여, 자기를 멸시하고 괴롭게 한다. 

이런 점에서 열등의식은 삶을 힘들고, 재미없게 만든다. 자라면서 부모나 주변 사람들부터, 항상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자란 아이는, 매사에 자신이 있다. 부모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항상 욕설이나 비하의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자아상에 손상을 입어 생활도 항상 위축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진정한 멋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에 있다. 내면의 멋을 가진 사람은, 자신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진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신경 쓰는 마음은, 체면이요, 위신이요, 허영이요, 거품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없는 사람, 열등감이 큰 사람일수록, 남을 더 의식한다. 

본문은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 여인들과 문답식으로,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노래했는데,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을 통해, 술람미 여인의 자부심에 대하여 살펴보고,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1. 술람미 여인의 모습 
(1) 자신은 비록 검으나, 아름답다(5上).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6上)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술람미 여인’은 ‘성도’의 모형이며, 술람미를 사랑한 ‘솔로몬’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햇볕에 의해 피부가 검게 되었음은, 죄악으로 더러워졌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가, 타락하고 부패한 어두운 면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의미다. 

죄악의 햇볕에 그을려, 타락하고 부패한 죄성을 가진 사람을 되어, 보기에 추하고 더러운 존재가 되었다. 우리도 죄악의 햇볕에 그을렸기 때문이다. 죄는 뿌리를 내리면 순식간에 번져나가, 우리를 부패하게 만든다. 죄악은 누룩과 같다. 들어오면 순식간에 퍼지게 된다. 

조그만 잘못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지만, 일단 죄가 들어와 뿌리를 내려 자라게 되면, 순식간에 번져나가게 된다. 죄는 죄를 낳는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잘못 하는 죄를 범했다. 예배에 실패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작은 죄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인죄로 커셨다. 

그러므로 작은 죄도 두려워해야 한다. 작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죄악의 길에 들어서면, 나중에는 큰 죄악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 모든 죄와 유혹은 처음부터 끊어버려야 한다. 단호하게 끊어야 한다. 안 돼요, 돼요, 돼요 하면 안 된다. 단호하게 안 돼 하면서, 딱 끊어버려야 한다. 

(2)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다(5下).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게달’(ר󰕇󰙏)은 ‘검은, 또는 유력자’란 뜻이며, (창25:13) 아브라함의 서자 이스마엘의 차남 이름이다. 

게달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은혜에서 떠난 자들로, 북 아라비아지방 등을 다니며 유목생활을 했다. 검정색 염소가죽으로 만든 장막에 살기에(겔27:21) ‘검은 천막에 사는 사람’이란 뜻에서 ‘게달’이라 했다. 게달의 장막은, 늙고 병든 염소 가죽, 구멍이 나고 털은 숭숭 빠졌고, 바람막이로 쓰는 가죽이다. 

게달의 장막 같은 여인, 헛간 바람막이같이, 험한 일을 하면서 살았던 여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술람미는 자신을 ‘솔로몬의 휘장 같다고 했다. 휘장은 솔로몬이 왕궁 밖에 나갈 때 치는 장막과 그 덮개로서의 천을 말하는데, 게달 족속의 천막과는 달리, 아름답고 값비싼 천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술람미 여인의 피부가, 뜨거운 햇볕에 검게 그을려, 게달 족속의 천막처럼 거칠고 흉하게 되었지만, 자신은 여전히 솔로몬의 휘장처럼,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를, 외적인 모습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죄악으로, 지옥에 던져질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사랑이다. 이를 복음이라고 하는데,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감이 넘친다.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안다. 우리는 참 간사한 존재이고, 금방 변절해버리는, 연약하고 부끄러운 모습이다. 이때 마귀가 와서 “너는 죄를 지었으니까, 더러운 존재가 되었기에, 이제 사랑받기는 틀렸다. 

구원은 틀렸다. 모르고 짓는 죄는 몰라도, 너는 알고 죄를 짓지 않느냐? 너같이 나쁜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우리를 고소한다. 상식적으로 맞는 이야기다. 마귀가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고발할 때, 지당한 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마귀가 고소할 때 “아니다, 너희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존재다. 죄를 지었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진리는 결단코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왜 그런가?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술람미가 검었지만, 솔로몬 왕은 사랑했다. 술람미가 하얗고 예뻤기에 사랑하지 않았다.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받았기에, 귀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근거를 우리 자신에게 두면, 마귀의 유혹에 넘어진다. 

구원의 근거를 우리에게 두면, 죄를 지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 흔들리는 생활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부족하고 연역하지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붙들어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 내가 다리를 절고 있으면, 부축해 주시고, 걸을 수 없으면, 업고라도 가신다. 

계속해서 불순종의 길로 걸어가면, 내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이끌어주신다. 성도는 이 확신을 가지고 산다. 우리는 모두 죄악에 의해 검게 그을린 자가 되었지만, 우리를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입혀 주신 칭의로 말미암아, 영적인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 

예수님으로 우리의 검은 죄악과, 영혼의 때를 모두 씻었고, 그리스도의 신부 된,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된 성도들은, 자부심과 행복감이 마음속에 충만해야 한다. 우리도 죄악으로 검게 탔기에, 하나님께 사랑받을만한, 아무 조건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모든 죄와 허물을 도말해 주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신부로 삼아주셨다. 죄와 허물이 너무 커, 부끄럽고 초라한 자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로 삼아주셨다. 

이 모습은, 교회의 참 모습을 말해 준다. 세상에서 보는 교회의 모습은, 전혀 매력이 없어 보인다. 게달의 장막처럼, 초라하기 짝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병들거나 슬픈 사람이 모이는 곳이며, 가난하거나 불쌍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한없이 약하고 흠모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곳이 교회다. 교회와 이 세상,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이고,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울까?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세상이 더 매력적이고  아름답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머물지 않는다. 

주님의 사랑은 오직 교회에 있다. 주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이기 때문이다(행20:28). 교회는 천국의 아름다움이 감추어져 있는 곳이다. 교회 안에는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보혈이 있다. 생명의 주요, 만왕의 왕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계신다. 

겉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런 매력도 느낄 수 없게 하지만, 그 내면에는 천국의 온갖 매력이 다 감추어져 있는 곳이 교회다. 또한 교회의 구성원, 성도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볼 때, 성도는 아무런 매력이 없어 보인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향해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이어도, 예수님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오직 교회와, 그의 신부 된 성도들을 향하고 있다. 세상이 업신여기는 교회를, 예수님은 생명보다 더 귀하게 사랑하신다. 

2. 술람미의 자부심 : 자신이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라(6).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피부가, 게달의 장막처럼 검고 거칠게 된 이유를, 아버지가 다른 오빠들이 자기를 미워해서, 포도원지기로 삼았기 때문이라 했다. 술람미 여인은 오빠들의 포도원을 돌보느라, 나의 포도원(자신의 존귀함)을, 미처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포도원을 돌보느라, 자신을 가꿀 틈이 없었기 때문이지, 다른 여인들처럼 가꾸면 얼마든지 자신도 희고 아름다운 피부를 지닐 수 있다. 그러니 이상한 사람 보듯이, 흘겨보지 말라.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였다는 말은, 자기 신앙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말이다. 

세상의 유혹과 방해는,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한다. 성도는 죄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더럽혀져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아름다움을 회복 받을 수 있는 소망이 있다. ‘자신을 흘겨보지 말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던 이유는,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비록 검지만, 왕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이런 자신을 멸시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신부 된 성도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신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주위의 방해로 인하여, 죄에 빠질 때도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기도 하고, 조롱과 멸시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술람미는 신랑되신 솔로몬을 찾아 나선다. 이처럼 성도에게 소망이 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다시 신앙을 회복할 수 있다. 

술람미 여인처럼 세상의 유혹을 받아, 남의 포도원을 지키는 포도원지기, 천국생활이 아니라 세상 생활에 빠져 죄만 짓지만,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힘입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는,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상적으로 보잘것없는 존재 같아도,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사랑을 받고 있는 존귀한 자이다. 그러므로 자부심을 갖기 바란다. 비록 내가 죄악의 볕에 쬐어서, 검게 오염되었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우리는 상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다. 상품은 가격을 따지지만, 작품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같은 값이면 상품은 품질을 따져 본다. 얼마나 질이 좋은지 비교한다. 반면 작품은 특성을 따진다. 김홍도의 그림이 좋은가? 신윤복의 그림이 좋은가? 따질 수 없다. 

(엡2:10上)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이란 뜻이다.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작품이다. 예수님의 핏값을 주고 사신, 예수님짜리다. 그러므로 소홀히 여기지 말고, 스스로 귀하게 여기기 바란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이 주신 모습을 즐기기 원하신다.” 우리 자신을 어떻게 즐길 수 있는가? 우리 모습을 보자. 주름 - 세상에서 주름 잡고 살라고 주신 하나님의 훈장, 까만 피부 - 처녀(총각)들이 저건 내 꺼, 저런 내 꺼 하고, 하도 찍어서 생긴 점의 집합. 

작은 눈 - 굳이 선글라스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의 창, 커다란 엉덩이 - 충격 완화를 위한 최상의 쿠션, 복부 비만 - 비상사태를 대비한 에어백, 코의 알레르기 - 환경오염에 대한 오존 감지기,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아름답게 해석하기 바란다. 

3. 술람미의 결단(7)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여, 네가 양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는, “내 영혼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말이다. 술람미는 마음과 영혼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삶의 전체를 드리는 깊은 사랑을 의미한다. 또한 솔로몬이 일하고, 쉬는 곳에 관심을 가졌다.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그와 비록 떨어져 있어도, 항상 함께 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서, 깊은 사랑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술람미 여인은, 속히 솔로몬 곁에 가고 싶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이 그립고, 함께 하고 싶어진다. 관심에서 제외되거나, 그의 눈에 들지 못할까봐, 방황하며 두려워했다. 

솔로몬과 더불어, 개인적이고 은밀한 사랑을 나누기 원하여, 솔로몬에게 자신이 발견되기 원하여 눈에 띄도록 가까이 가기 원했고, 시간이 나면 두 사람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원하여, 그 때가 언제인지 알려 달라고 했다. 

솔로몬이 어디 있는지 몰라, 이리저리 방황하며 찾아다니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원했다. 얼마나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는지,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조금이라도 함께 하기를 원하는, 술람미 여인의 간절한 마음을 찾아볼 수가 있다. 

성도들은 항상 주님 곁에서,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해야 한다. 주님 만나기를 사모하여, 주님께서 계시는 곳에, 나도 있기 원해야 한다. 주님 계시는 곳을 제대로 알지 못해, 이리저리 방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주님은 먼 곳에 계시지 않고, 몸 된 교회에 계신다. 교회를 초장으로 삼아, 그의 양떼를 먹이시며, 쉼을 얻게 하신다. 그러므로 주님을 찾아, 괜히 이리 저리 방황하며, 헛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이 교회에 주님이 계신다. 이곳에서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얼굴을 가린 자”라는 말은 창녀를 말한다(창38:15). 창녀는 자기의 정체를 가리고, 다른 남자를 유혹하는 표로,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부끄러운 모습이 되지 않기를 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방황하고 있다면 수치스런 모습이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 모르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 모른다면, 스스로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랑은 관심이라고 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늘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몰라서, 찾아 헤매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도는 언제라도 사랑하는 예수님을 찾아 만날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의 목장에서 양떼를 먹이시고, 쉼을 얻게 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의 목장에서 양떼를 치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할 때, 이리 저리 방황하는 자가 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수치 때문에, 스스로 얼굴을 가리는 자가 되기에, 성령께서 우리의 영안을 활짝 열어,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항상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결론이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더럽고 추잡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랑해 주셔서, 귀한 존재가 되었다. 비록 검고 게달의 장막과 같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흩겨봐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이다. 자부심을 가지고 살자. 그리고 주님만을 더욱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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