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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놀라운 믿음,․놀라운 은혜 (눅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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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믿음,․놀라운 은혜 (눅 7:1~10) 
  

전방에 근무하던 어느 군목의 이야기입니다. 부대에서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는데, 인적이 드믄 지역이라 꽃이 만발하고 벌들이 많이 날아옵니다. 그래서 벌통을 벌여 놓고 틈틈이 양봉을 했습니다. 아주 좋은 꿀을 많이 얻게 된 군목은 부대원들에게 이렇게 광고했습니다. “누구든지 빈 통을 갖고 오시면 꿀을 드립니다!” 그랬더니 어떤 군인은 박카스 병을, 어떤 군인은 링거 병을, 그리고 어떤 군인은 큰 깡통을 가져왔습니다. 군목은 그들이 갖고 온 빈 통에다 가득 가득 꿀을 채워 주었습니다. 그러자 항의가 들어옵니다. 불공평하다는 겁니다. 누구는 많이 주고 누구는 적게 주느냐는 겁니다. 그때 군목이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누가 박카스 병 갖고 오랬소?” 

여러분, 누구 말이 옳습니까? 불공평하다고 항의한 군인들의 말이 맞습니까? 아니면 군목의 말이 옳습니까? 군목의 말이 옳죠. 군목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군인들 스스로가 차별을 받은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신분이나 재산, 학력, 집안, 배경 등 그 어떤 인간 조건으로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믿음에 따라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은 차별하지 않지만 믿음은 차별하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다른 것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그리고 삶 가운데 나타난 믿음을 보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아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의 분량만큼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슬퍼하십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믿음이 있고 없음”에 따라, “믿음이 크고 작음”에 따라 책망도 하시고 칭찬도 하십니다. 마17:17 보면 믿음 없는 세대를 호되게 책망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 ...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또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자기도 걷다가 바다에 빠졌을 때 책망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마14:31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복음서를 보면 칭찬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공교롭게도 이방인들입니다.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귀신 들린 딸을 위해 예수님께 간구한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여인을 향해 예수님이 뭐라고 칭찬하셨습니까? 마15:28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본문에 보면 백부장(百夫長 centurion)이 나오는데,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습니다. 백부장은 어떤 사람이죠? 로마 군인 장교입니다. 100명의 병사를 거느리는 장교인데, 요즘으로 말하면 중대장 정도입니다.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식민지에 주둔하는 장교로 세도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식민지 백성에게 잔인하고 포악하게 구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어떻습니까? 병들어 죽어가는 종을 위해 예수님께 간구했는데, 아주 크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종의 병이 치유되는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먼저 9절을 보시죠. 얼마나 크게 칭찬을 받았는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He was amazed at him)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such great faith)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그의 믿음이 얼마나 큰지 예수님도 놀라셨다는 겁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10절.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예수님이 그 집에 가지도 않았는데 치유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다른 복음서를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마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백부장의 믿음대로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Amazing Faith)에 대해 예수님께서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로 화답해 주신 것입니다. 마치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놀라운 믿음이 예수님의 능력과 스파크를 일으켜 놀라운 은혜가 나타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의 차이가 은혜의 차이를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그럴 때 은혜가 깊어집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백부장처럼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소유자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백부장에게 있던 믿음이 과연 어떤 것이었기에 예수님도 놀랄 정도였을까요? 세 가지 특징을 알아봅니다. 
  

[1] 행함이 있는 믿음 

첫째, 백부장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2절~3절을 봅니다.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백부장에게 종이 있었는데 병들었습니다. 그 종을 위해 평소 친분이 있는 유대인 장로들에게 부탁해서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자기가 직접 오지 않고 그들에게 부탁한 이유는 뒤에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그 종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사랑하는 종! 이건 아주 특이한 표현입니다. 아니, 특이하다는 말보다 파격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겁니다. 그 병은 중풍병이었습니다. 병행 구절 마8:6을 보면 나옵니다.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그 종은 너무 아파서 죽을 지경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도저히 가망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중풍병이 무서운 것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치유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그 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한 겁니다.   

이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로마 시대에 종은 한 마디로 물건에 불과한 존재였습니다. 주인이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이 있었습니다. 종을 부려먹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팔아버리거나 폐기처분하듯이 죽이면 그만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런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농기구가 세 가지 있었다고 합니다. 언어를 가진 도구, 소리를 가진 도구, 그리고 소리가 없는 도구입니다. 소리가 없는 도구는 쇠스랑 같은 곳이겠죠. 소리를 가진 도구는 짐승이겠고, 언어를 가진 도구는 뭘까요? 노예입니다. 그러니 당시 종들이 어떤 존재였는지 어떻게 취급되었는지 알만 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종이 아프다고 마음아파하면서 간절히 기도한 겁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마치 가족처럼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아주 잔인하고 포악했습니다. 특히 장교들은 권세가 있으니까 그 횡포가 아주 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백부장은 마치 천사 같은 사람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좀 더 살펴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장로들이 백부장에 대해 한 말을 들어보면 대단합니다. 본문 4절~5절입니다.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유대인 장로들은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대표들입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예수님께 매달려 간구합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뭡니까? 당시 로마 군인들의 정서대로라면 식민지 백성인 자기들을 핍박하는 게 당연한데, 오히려 사랑해 주었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로 배려해주었겠죠. 심지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겁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교회당을 건축해서 헌납한 것입니다. 

이건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돈도 많이 들었겠지만, 상관의 눈치도 봐야 되고 잘못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견책을 당하거나 승진 상 불이익을 당할 수 있고, 심하면 잘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큰일을 했다면 믿음이 대단한 겁니다. 그 믿음이 사랑의 행위로 나타난 겁니다. 

이런 게 진짜 믿음이죠. 약2:14,17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이 있어야 참 믿음이란 겁니다. 말로만 하면 겉모양만 갖추면 거짓 믿음이요 죽은 믿음입니다. 

요일4:20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겁니다. 백부장이 얼마나 진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는지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이런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킨 겁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시고 그 집으로 향하셨습니다.(마8:7 참조) 저와 여러분도 이와 같이 사랑의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2] 겸손이 있는 믿음 

두 번째, 백부장의 믿음은 겸손이 있는 믿음입니다. 본문 6절~7절 보시죠.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 ” 앞에서 본대로 백부장은 직접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대목만 보면 혹시 오해할 수도 있어요. 자기가 권세가 있으면 있지 건방지게 ...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그가 직접 오지 않은 것은 겸손함 때문입니다. 아무리 유대인을 통치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무시하는 것을 잘 압니다. 특히 유대인 랍비들은 이방인은 절대 접촉하지 않습니다. 랍비보다 더 귀한 예수님을 자기가 어찌 감히 직접 찾아가서 만나냐 이겁니다. 그래서 장로들에게 부탁한 건데, 막상 예수님이 자기 집으로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좋기도 하고 황송하기도 하고 ...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예수님을 오시게 하는 게 너무 번거롭고 죄송합니다. 자기는 일개 이방인이요 죄인에 불과한데, 자기 집은 누추한데, ... 이런 생각들이 든 겁니다. 사실은 세상적으로 높은 사람이요 집도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감당치 못하겠다는 말을 연발합니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기에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에 그 앞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의 무익함을 고백하는 겸손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교만하게 굴면 아직 설익은 믿음이죠.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믿음이 성숙해질수록 겸손해 지는 게 이치입니다. 백부장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크게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은혜는 마치 물과 같은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하나님에게서 예수님에게서 흘러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흘러내리지 않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흘러내립니다.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성경을 죽 살펴보십시오! 위대한 인물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겸손함입니다. 그런데 그 겸손이 별난 게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 앞에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부족한 존재인지 깨닫는 겁니다. 겸손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저절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고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 중에 다윗이 대표적이죠. 그가 쓴 시편을 보면 구구절절 은혜를 노래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다윗의 겸손한 믿음에 부어진 겁니다. 대상17:16 나오는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시죠. 

“ ...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기는 별 게 아니라는 겁니다. 죄인이고, 비천한 집안 출신에다 양치는 목동 출신이고, ... 그런데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구원해 주시고, 그것도 부족해서 이스라엘의 왕에 이르게 하셨으니 무한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밖에 없죠. 

여러분, 옷걸이 이야기 아시죠. 세탁소에 옷걸이들이 많이 걸려 있습니다. 어느 날 신참 옷걸이가 들어왔습니다. 고참 옷걸이가 충고합니다. “얘! 절대 착각하지 마라.” “뭘요?” “네게 걸리는 옷은 네 것이 아니야~ 잠시 후면 주인에게 돌아갈 거야 ... 너나 나나 옷걸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 꼭 명심해!” 우리는 옷걸이 같은 존재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겸손은 또한 바다와 같은 겁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데 위치합니다. 그러니까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바다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갑니다. 백부장이 그랬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믿음으로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3] 말씀 중심의 믿음

세 번째, 백부장의 믿음은 말씀 중심의 믿음입니다. 앞에서 두 가지 특징을 언급했지만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백부장의 믿음의 뿌리가 바로 이겁니다. 말씀 중심의 믿음이 참 믿음이고 성숙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사실은 행함도 겸손도 따라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감탄하시면서 백부장을 극찬하신 게 사실은 결정적으로 말씀 중심의 믿음 때문입니다. 

본문을 잘 관찰해 보면 백부장이 종의 병이 치유된 후 나중에 예수님을 찾아가 감사했는지 모르지만(아마 그랬겠죠), 적어도 종의 병이 나을 때까지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은혜가 임한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말씀 중심이 믿음이기에 가능했습니다. 3절 보면 ...

3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 ”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겁니다. 그 말씀이 백부장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믿음이 생긴 겁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깁니다. 말씀과 더불어 성령이 역사함으로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 믿음이 계속 자라고 성숙해졌습니다. 유대인 장로들을 보내서 간구했는데, 궁금해서 아나 사람들을 계속 보내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겠죠. 예수님이 가지 집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예수님이 굳이 오실 일이 아닙니다. 자기는 죄인이요 이방인이라 감당치 못할 뿐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되니까 직접 오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7절하~8절 봅니다. 
“7 ...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는 군대 생활에 비교해서 생각했습니다. 굳이 오시지 말고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종이 나을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 보니까 상관이 명령하면 부하가 복종하더군요.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만유의 주님, 절대주권자이시니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확실히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한 겁니다. 

백부장이 정곡을 찌른 겁니다. 믿음은 말씀을 통해 생기고,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말씀을 통해 나타나는 겁니다. 

창세기 1장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어떻게 하셨나요? 말씀으로! 

창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 뒤에도 보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나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 그대로 되니라” 이처럼 말씀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믿는 자들을 통해 현실에 그대로 실현됩니다. 말씀의 현실화! 그러므로 말씀을 가장 귀히 여기고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말씀대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적을 구합니다. 신비를 구합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분명히 신비로운 역사가 있고 이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말씀이 우선입니다. 말씀 중심으로 살다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역사가 나타나야 정상입니다. 그러면 오래 갑니다.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말씀은 제쳐놓은 채 무작정 신비를 구하고 이적을 구하면 신앙생활이 엉클어져 버립니다. 

19세기 위대한 설교자요 전도자요 부흥사였던 무디(D. L. Moody)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에게 전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터넷도 자동차도 없었지만, 2백만 명 이상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위대한 신앙인이요 사역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회심한 후 그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살리라 결심했지만 자주 쓰러지고 넘어졌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산 기도를 했습니다. 신령한 은혜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때 뿐입니다. 다음에는 여기 저기 부흥집회를 따라다녔습니다. 역시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탄식하며 고민합니다. “아마 내 양심은 화인 맞았나 보다.” 

그러던 어느 날 롬10:17을 발견합니다. 믿음은 들음으로 나며, 들음은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진리! 그는 무릎을 치고 그때부터 열심히 말씀을 읽기 시작했고, 말씀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기도와 말씀의 균형이 이뤄진 겁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 중심의 믿음이 된 겁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시카고에 가면 무디 신학교가 있는데, 그 구내에 ‘무디 기념관’이 있습니다. 무디의 생애와 신앙, 사역에 관한 자료들과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낡은 성경책이 있는데, 그 여백에 T, P 이런 표시들이 있습니다. 그건 이런 뜻입니다. “시험해 봄, 검증됨(Test, Proved)” 그러니까 그는 ‘말씀의 임상 실험’을 한 겁니다.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믿음으로 말씀이 삶 속에서 현실화되는 놀라운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먼저 백부장처럼 놀라운 믿음을 가꾸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놀라운 믿음과 놀라운 은혜의 스파크가 일어나는 삶의 현장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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