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청년주일] 꿈을 이룬 요셉 (창 41:37~43)

  • 잡초 잡초
  • 528
  • 0

첨부 1


꿈을 이룬 요셉 (창 41:37-43)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 뿐이니라.

어느 홀아비가 질그릇 장사를 했습니다. 하루는 지게에 질그릇을 지고 장에 가다가 쉼터에서 잠시 지게를 바쳐놓고 아래 누워 생각했습니다. “이 질그릇을 팔아 돼지새끼를 사서 키워 송아지를 사고 또 키워 조그만 밭을 사고 집을 짓고 장가를 가자” 여기까지 생각하니 너무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꿈은 그것이 부질없는 공상일지라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좋아서 누운 체 춤을 추다가 그만 작대기를 건드려 지게가 넘어지는 바람에 질그릇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노만 필 박사는 “꿈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마음에 이미지를 그리라고 했습니다. “먼저 마음에 그림을 그리라.” 그 말은 꿈을 구체적으로 그리라는 말입니다. “기도하라” 계획은 내가 하지만 이룸은 하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실현하라” 구체적으로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꿈은 좋은 것입니다. 꿈 중에서도 진정한 꿈은 하늘이 주는 꿈입니다. 그 꿈을 하늘이 이루어주십니다. 

본문은 꿈 이야기입니다. 꿈 이야기 하면 요셉의 꿈입니다. 요셉은 꿈대로 되었습니다. 그는 노예 신분으로 추락했다가 어느 날 타국의 총리가 됩니다. 전무후무한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그 꿈을 이루는데 13년이 걸렸습니다. 요셉은 처음 노예로 추락했을 때 그 길은 상상도 못한 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한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그것도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의 이야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마지막에는 너무나 풍부한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주시고 있습니다. 

요셉이 매일같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식사시간만 되면 간밤의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11개의 볏단들이 자기 볏단에게 절을 하였고 11개의 별과 해와 달이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꿈입니다. 그 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형들은 분개했고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요셉은 미움을 받았고 마침내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때로 허황된 꿈을 꾸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장차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통령“이 되겠다고 대답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좀 똘똘한 아이가 그랬다면 모르겠는데 그렇지 못한 아이가 그런 대답을 한다면 사람들은 황당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모두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해서 무시하고 나중에는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요셉은 꿈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꿈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도 받고 팔려가서 노예가 되고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안주인의 유혹을 거부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도 갑니다. 이 모든 것이 꿈 때문에 주어진 불행한 일들입니다. 

어느 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요셉은 미칠 것 같았을 것입니다. 형들로부터 팔리고 노예가 되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까지 왔습니다. 생각하면 모두 악연들입니다.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없습니다. 그때 요셉은 그 꿈들이 모두 개꿈이었는가 생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그런 고난도 없었을 것입니다. 꿈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꾸라고 말합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요셉처럼 고난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결국 요셉은 그 꿈 때문에 바로를 만납니다. 어느 날 바로 왕이 희한한 꿈을 꿉니다. 그리고 곧 잊어버립니다. 박수들을 불러 “꿈을 생각해 내라”고 윽박지릅니다. 그 시대는 그렇게 희한한 시대였습니다. 그때 간수에 이끌려 요셉이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요셉은 먼저 바로의 잊어버린 꿈을 기억해 내고 그 꿈을 해석합니다. 그러자 바로가 무릎을 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꿈은 왕이 꾸었는데 그 꿈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그 잊은 꿈을 요셉이 기억해내고 해석합니다. 그때 바로 왕은 요셉에게 “내 나라를 다스리라”고 합니다. 

40절을 보면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네 명령에 복종하리라, 나는 너보다 높은 것이 이 왕좌뿐이라”고 말합니다. 왕이 반지를 빼서 요셉의 손에 끼워 주었습니다. 요셉을 왕의 수레에 태워 백성 앞에서 사열을 받게 합니다. 나라의 모든 일을 요셉에게 다 맡겼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요셉에게 복종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요셉은 어느 날 죄수와 노예에서 한 나라의 총리가 됩니다, 꿈 때문입니다. 

꿈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 반드시 고난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꿈 때문에 상상도 못한 나락으로 추락했는데 어느 날 그 꿈 때문에 요셉은 한 나라의 총리로 올라갑니다. 마침내 요셉은 꿈대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꿈을 가지라, 꿈을 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단지 꿈을 꾸었다고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요셉에게 나타난 배경이 있습니다. 꿈을 가지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까지 그 과정도 중요합니다. 그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긍정의 믿음 

사람은 기대대로 되지 않으면 금방 낙심하는 존재입니다. 그때 자칫 신앙도 부정하게 하고 의심하고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요셉도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가 꾼 꿈은 너무나 큰 꿈이었고 원대한 꿈이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보통 꿈입니까. 그래서 요셉은 큰 기대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돌아온 것은 팔려 노예가 되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내일이 불투명합니다. 그때 낙심하고 또 낙심했을 것입니다. 의심도 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요셉은 긍정의 믿음을 발휘합니다. 그 단적인 모습이 요셉이 가는 곳 마다 최선을 다하는 생활모습입니다. 그 결과 요셉은 가는 곳 마다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고 안정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그의 긍정의 삶 때문입니다. 요셉이 비관하고 포기하고 억지로 일하고 될 대로 되라 그런 모습이었더라면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노예로 종으로 보디발의 집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주인이 그에게 온 집안을 다스릴 권한을 위임했습니다. 옥중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모두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간수장이 일을 그에게 다 맡겼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내 집처럼 만들어 살았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긍정적인의 삶의 태도 때문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매사 생각과 판단과 삶이 긍정적이 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은 바로 믿음에서 나옵니다.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신앙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생각에는 “대체의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긍정적 생각이든 부정적 생각이든 한 번에 한가지씩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는 긍정적인 생각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할 때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생각을 해야 하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을 할 때 마음이 건강해지고 몸도 건강해지고 생명이 연장되고 타인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 삶이 결국 내 삶에 기적을 불러 오는 것입니다.  

이승복이라는 분은 미국의 존스 홉킨스(John Hopkins) 병원 수석 외과의사입니다. 이분이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분이 18살 때인 1983년 체조선수로 체조대회에서 금메달까지 땄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통사고로 사지가 마비되어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꿈이 좌절되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체조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자포자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 안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지점이 사람으로 하여금 위대한 기적을 만들어내는 지점입니다. 사람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그분이 증명해 주었습니다. 이 분이 마침내 모든 불운을 이겨내고 미국의 유명한 병원 수석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낸 책이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라는 책입니다. 

이것은 믿음 안에서 만들어진 긍정의 믿음과 삶의 자세 때문에 만들어진 기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 안에서 긍정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나도 모르게 기적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친구도 반드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사귀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과 사귀면 내 생각도 그렇게 전염됩니다. 부정적인 설교를 3년만 들으면 모두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고 하는 임상결과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면 즉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상존합니다. 어느 편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은 바라보는 대로 내 안의 마음에 그대로 투영되게 되어 있습니다.   

할머니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짚신 장수 아들과 우산 장수 아들입니다. 이 할머니는 비가와도 날이 맑아도 매일 근심입니다. 이것은 아주 불행한 인생관입니다. 매일 밝은 면을 보면 매일이 행복할 것인데 어두운 면만 바라보니까 세상이 매일같이 어둡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거지가 하나님께 한 가지 소원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내가 구걸할 때 쌀이나 국을 받으면 담을 그릇이 필요하니 알루미늄 깡통 하나만 주세요.” 생각하니까 기왕이면 좋은 것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왕이면 스테인리스로 주세요.” 또 생각하니까 더 좋은 것이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왕이면 보온통으로 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삶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소망적으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요셉은 긍정의 믿음을 가지고 그 험난한 역경을 헤치고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 부름 

요셉은 왕의 신하가 꿈을 꾸고 시무룩이 있는 모습을 보고 꿈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합니다. 신하가 “꿈을 해몽할 수 있느냐”고 물을 때 요셉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다(창40:8)”고 말합니다. 마침내 바로에게 갑니다. 바로가 “꿈을 해몽할 수 있느냐” 고 묻자 요셉은 “내가 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이 하십니다(창41:16)”하고 대답합니다. 마침내 결혼하여 큰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므낫세”라고 명명합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 잊게 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을 낳고 또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짓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이방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마침내 형들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알아보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 요셉이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팔았다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당신들 앞서 나를 보내셨습니다(창45:5).” 이것이 요셉이 꿈을 이루게 된 열쇠입니다. 요셉은 말마다 하나님, 하나님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꿈을 주셨고 그리고 그 꿈을 이루게 하셨던 것입니다. 

복은 말에서 나옵니다. 저주도 화도 불행도 모두 말에서 나옵니다. 요셉의 말에는 신앙고백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의 말에는 온통 희망과 소망과 신앙고백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복이 그대로 상상을 뛰어넘는 은혜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입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이 튀어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은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무슨 일이 있을 때 마다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고 문제가 있을 때 마다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들은 생각과 마음에 온통 “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매사 내가, 나 때문에,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 있는 것도 중요하고 과신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너질 때는 충격이 너무 크게 나타납니다.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나일뿐입니다. 요셉은 그 상황에서 입에서 언제나 하나님 하나님이 튀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할 때 언제나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꿈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정신과 마음과 생각 속에 온통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하나님이, 하나님이 튀어 나왔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복을 나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세상 만민이 너를 통해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 마다 복을 받았고 그 복을 나누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내가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복을 나누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 복을 가는 곳 마다 나누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살아갈 때 주인이 하나님이 요셉에게 함께 하심을 보았고 또 요셉으로 하여금 형통하게 하심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그 집에 요셉으로 인하여 복을 내리셨다고 했습니다(창39:2-5). 옥에서도 간수장에게 은혜를 입었고 (창39:22) 관원의 꿈을 해몽하자 얼마 후 복직되고(창40:21) 요셉은 왕에게 인도함을 받습니다(창41:14). 왕의 꿈을 해몽하여 위기에서 총리자리로 올라갑니다(창41:32-41). 나라를 치리할 때에도 곡식을 저장하여 7년 기근 속에서도 백성들을 살려내어 온 나라가 그를 통해서 복을 받습니다. 형제들과 아버지를 살려낸 것도 그를 통해서 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 되리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었습니다. 그 복의 뿌리가 이삭에게로 다시 그 아들 야곱에게 넘어가고 그 12 아들이 복의 12가지가 됩니다.  

야곱이 임종할 때 요셉에게 안수하며 축복한 내용을 보면(창49:22-25) “요셉은 샘 곁에 심겨진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전능자가 그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의 크기가 샘 곁에 심겨진 나무처럼 무성한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울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울을 넘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요셉은 울타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울을 넘어 까지 복을 나누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내 가정을 넘어 내 지파, 내 민족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말입니다. 내가 성공하면 나를 기쁘게 하지만 그런데 그 보다 더 성공하면 내 울을 넘어 모두를 기쁘게 하는 것이 성공이 됩니다. 그래야 복을 나누는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공하고 복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의 꿈은 초반에는 알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했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 꿈의 의미는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가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런데 그 원대한 꿈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어려운 길을 가야했습니다. 꿈을 이루려면 꽃길만 가는 것이 아니고  때로 돌짝밭 가시밭길도 가야 합니다. 요셉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 길을 갔습니다. 팔림의 길, 노예의 길, 누명 쓰고 감옥의 길도 갔습니다. 그 길을 가지 않고는 바로에게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때마다 요셉은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을 외쳤습니다. 그 하나님은 결국 요셉을 꿈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정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