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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하늘 아버지의 마음 (눅 15: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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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버지의 마음 (눅 15:22~32)


오늘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까 문득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이 생각이 났습니다. 조창인 씨의 소설 [가시고기]라는 작품입니다. 여러분도 오래 전에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10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프랑스로 그림 공부를 하러 가고 아버지가 아들을 키웁니다. 아버지는 시인인데 벌이가 신통치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들이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시골에 가서 생활하면서 아이를 좀 건강하게 회복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찾던 골수를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제 많은 수술비용이 들어야 하는데, 이 아버지는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장기를 팔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신장을 팔려고 병원에 갔더니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장을 이식하기는커녕 자신도 간암이라는 아주 무서운 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아들의 수술비용을 마련해야 하는데......’ 고민을 하다가 결국 자신의 각막을 팔기로 결심을 합니다. 아들은 수술이 잘 마쳐지지만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가시고기입니다. 새끼를 낳아놓고 그 가시고기 어미는 죽어간답니다. 자식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가시고기를 통해 이 시대의 아버지의 모습을 이 소설가는 그리고 있습니다.

또 아버지 하면 생각나는 책이 김정현 씨가 쓴 [아버지]라는 소설입니다. 평범한 가장이고 고급 공무원입니다. 그저 직장하고 집 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별로 가정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자식들에게도 인기도 없습니다. 아내한테도 인기가 없어서 몇 년 전부터 각방을 쓰고 삽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분이 병원에 갔더니 4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췌장암 선고를 받게 됩니다. 시한부 인생이 됩니다. 그 때부터 가장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죽은 후에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때부터 자기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아주 부단히 4개월을 준비하는 아버지의 진실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무관심했던 가족들도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아버지와 남편에게 따듯한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는 내용이 이 소설의 내용입니다.

대개 한국 사회의 아버지상은 좀 엄하고 엄격하고 냉혹한 아버지로 그려집니다. 저도 어렸을 적에 누나들이 밖에 나갔다 일찍 들어와야지, 늦게 들어오면 아버지께 꾸지람 듣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자들이 일찍 다녀야지, 밤늦게 다닌다고 혼을 내셨습니다. 늘 엄한 아버지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는 아버지가 그렇게 엄하고 냉혹한 분으로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출가외인이라고 집에 가도 별로 반가워하지도 않았답니다. 그런데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집이 어려워 등록금 때문에 쩔쩔 매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찾아오셔서 아들의 등록금을 손에 쥐어 주었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의 따듯한 사랑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를 많이 합니다만 어떤 결혼식을 보면 딸을 시집보내는데 엄마는 안 우는데 아버지가 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딸을 시집보내면서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집에 있을 때는 그렇게 엄한 아버지인데 막상 딸을 내 보내려니 울적함,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오해했던 두 사람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먼저는 작은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달라고 졸라서 먼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 많은 재산을 다 허랑방탕하게 낭비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합니다. 돼지우리에서 쥐엄열매를 먹다가 ‘내가 집에 돌아가면 품꾼이 되어도 이것 보다는 더 낫겠다. 아버지에게 가서 나를 품꾼으로라도 써달라고 부탁을 해야지.’ 하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 아들이 돌아왔을 때 얼마나 반가워하고 뛰어와서 아들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아들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환대를 합니다. 아니 품꾼이 무엇입니까, 종들을 불러서 이 아들에게 “내 돌아온 아들, 죽었다가 살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신발을 신기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이 아들을 위한 축제를 열자.”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처음에도 오해했지만, 마지막에도 오해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따듯한 사랑으로 이 아들의 잘못을 이미 다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예전의 아들로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를 오해한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습니다. 이 집의 장남입니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 돌아오는데 풍악소리가 나고, 잔치소리가 납니다. 종들에게 “이게 무슨 일이냐?” 그랬더니 종이 아는 이야기가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나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너무 기뻐서 살찐 소를 잡고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이 말에 큰 아들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동생이 돌아왔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같이 춤을 추면서 반가워해야하는데 이 큰 아들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불평이 생기고 분노를 터뜨리면서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만날 죽도록 일만 했는데, 내 친구들을 위해서 염소새끼 한 마리 내 준 적 있습니까? 저 멍청이 같은 동생이 돌아왔는데 저 녀석을 위해 잔치를 베풀다니 말도 안 됩니다.” 하면서 이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불만과 불평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 큰 아들마저 탕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아버지가 되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비록 어떤 아들이라도 그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마음에 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는 그저 죽도록 일만 하는 사람이요, 아버지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저 방탕하고 재산을 다 낭비하고 돌아온 동생이 미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을 보면 이 집을 나갔다 돌아온 둘째 아들은 창기와 세리들입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멸시받던 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집에 있던 큰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율법대로 옳게 산다고 자랑하지만,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창기와 세리들을 죄인으로 멸시하고 정죄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용서가 없었습니다. 아니!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위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우리는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엉뚱한 길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칫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오늘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좀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디모데 전서 2장 4절에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이 하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하고 진리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전도의 사명은 이 세상 만민이 구원받기까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아마 교인들이 제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전도하라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냥 교회 나오는 건 나올 만한데, 봉사도 좀 하겠고, 헌금도 하라면 하겠는데, 이 전도하라고 하니 이것이 힘듭니다. ‘아! 전도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왜 남에게 가서 교회 나오라고 해야 하나?’ 이것을 제일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온 인류는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집안에 있는 자녀들이고, 저 교회 밖에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은 집 밖에 있는 자녀들입니다. 온 지구상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그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집 나간 자식들이 돌아오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들이 어떻게 돌아옵니까?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면 좋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가서 우리가 권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그들에게 증거해서 그들의 마음이 열려서,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 이런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가정에 10남매가 있는데 한 명이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찾고 찾지만 못 찾았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자식들이 다 장성했습니다. 명절 때만 되면 이 아버지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맛있는 갈비를 먹으려다가도 젓가락이 멈춰집니다. 집 나간 아들을 생각하니까 그 잃어버린 아들은 어디에 가서 무슨 고생을 하는지, 거지가 되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 아들을 생각하면 밥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건강하게 잘 사는 9명의 자녀가 있지만 이 한명의 잃어버린 아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여러분! 바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서울 시내만 해도 얼마나 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헌금하고 예배드리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도 집 밖에 있는 저 자녀들을 생각할 때, 돌아오지 못한 잃어버린 자녀들을 생각할 때 아버지의 마음에는 아직 기쁨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땅 끝까지 가서 이 세상 끝 날까지 전도해야 하는 사명을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5장 전반부에 보면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목자가 100마리의 양을 돌보고 있는데, 저녁에는 우리에 양 떼들을 다 몰아넣습니다. 숫자를 세니 100마리가 되어야 하는데 99마리밖에 안 됩니다. 한 마리가 부족합니다. 이 목자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지팡이를 들고 온 산과 들을 헤매면서 이 양을 부르면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99마리가 집 안에 있는데 그까짓 한 마리 잃어버리면 어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바로 여러분이라면 어떨까요? 10명의 자식들을 다 잃어버렸는데 9명은 찾았습니다. 나는 아직 구덩이에 빠져서 죽어가고 있는데, 이름을 부르다가 “아이고 이제 못 찾겠다. 걔는 죽었나보다. 그냥 이제 빨리 돌아가자.” 이런다면 잃어버린 아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목자의 마음은 그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온 산과 들을 헤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마리를 찾았을 때 너무 반가워서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서 온 동리 사람들을 다 불러서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잃어버린 양을 찾았습니다. 우리 함께 먹고 즐거워합시다. 이것이 바로 목자의 마음이고, 그 목자의 마음이 하늘 아버지의 마음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전도의 사명을 부어주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을 수만 있다면 이 목자는 어떤 수고, 어떤 희생도 기쁘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신문을 봤더니 성북구청이 생긴 지가 60년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성북구민의 날에 성북구민 대상을 주는데 한 62살 된 ‘전길자’라는 어머니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상을 주는 이유를 봤더니 36년 전에 ‘이정훈’이라는 4살 난 아이를 잃어버렸답니다. 지금은 40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36년 동안 이 아이를 찾아다녔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전국의 고아원이라는 고아원은 다 뒤져서 ‘이정훈’이라는 아이가 36년에 전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지 찾았습니다. 전국에 있는 보호시설을 다 찾았습니다. 혹시 외국에 입양되었을까봐 외국까지 수소문해서 찾고 있습니다. 36년 전에 잃어버린 지금 40살이 되었을 아이를 찾습니다. 이게 어머니의 마음이고,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자식을 잃어버렸는데 10년이 지났다고 “야 이제 그놈자식 생각도 하지 말자.” 이런 부모가 있겠습니까? 36년이 지난 지금도 그 어머니는 그 아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북구에서 감동을 받아서 통장 100명이 찾는데 동참하겠다고 성신여대역에 가서 전단지를 뿌리고, 광고를 내 주고, 구민들이 도와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의 마음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늘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 아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

가끔 지하철에 가다보면 어떤 아버지, 어머니로 보이는 분들이 앞뒤에 뭘 써 붙이고 다닙니다. 큰 포스터 같은 것을 앞에도 붙이고 뒤에도 붙이고 다닙니다. 뭔지 보니까 잃어버린 아들, 손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TV에 광고를 낼 수도 없고, 신문에 광고를 낼 돈도 없습니다. 직접 앞뒤로 광고판을 걸고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부모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보고 “왜 저런 짓을 하느냐고? 왜 저런 미친 짓을 하느냐고?” 비난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도 거기에 마음이 감동되고, 어떻게 좀 도와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전도하라고 하면 솔직히 당당합니까? 부끄럽습니까? 전도하라면 일단 부끄럽습니다. ‘전도 뭐, 그냥 나오라고 하면 되지. 그걸 가서 전도지를 돌리고, 에이고 나는 못해.’ 우리 교회에도 늠름한 남신도분들도 많지만 신풍역에 가서 전도합시다. 하면 다 도망가 버립니다. 오늘 집이 바빠서, 오늘 친척집에 가야하고, 아버지 생신이고, 다 도망가 버립니다. 전도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 10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복음만이 영혼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복음만이 잃어버린 아들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들 전도를 포기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복음 전도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7절에 보니까 사도바울은 아주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유인이지만 내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되었노라. 내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행동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행동하며,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행동하고, 율법이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처럼 행동한다.” 왜 모든 사람이 종이 되었을까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종이 되면서도 영혼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그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 시대의 교회의 사명이고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영혼들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신경숙씨의 소설 중에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엄마를 서울역에서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그 엄마를 찾는 내용입니다. 엄마를 찾으면서 엄마가 우리에게 남겨준 그 아름다운 사랑들을 더듬어 가는 것입니다. 결국 엄마는 못 찾았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다시금 엄마의 고마움을 가슴 깊이 되새기게 됩니다. 물론 엄마를 찾는 과정 속에서 가족끼리 의견이 안 맞아서 서로 싸움도 하고, 논쟁도 하고, 갈등도 많습니다. “너 때문이다. 나 때문이다.”하면서 싸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우리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에 믿지 않는 내 가족들을 우리에게 부탁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늘 만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우리에게 오늘도 맡기시고 부탁한 것입니다. 누구도 이것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1989년 부산에 동의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학내분규가 일어났는데 사태가 심해졌습니다. 학교 당국의 요청으로 경찰들이 학교 안에 들어가서 학생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 속에서 학생들이 화염병을 전경들을 향해 던졌습니다. 불이 나서 건물에 갇힌 전경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7~8명이 죽고 10명 이상이 중화상을 입고 다쳤습니다. 그 중에 ‘서원석’이라는 25살의 전경이 있었습니다. 이제 제대가 90일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파견되었다가 중화상을 입어 온몸이 다 불에 타 버리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얼마 후 의식이 들었는데 그는 살 소망이 없었습니다.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습니다. 붕대를 감은 글러브 같은 손을 가지고 말을 못하니까 허공에 글씨를 씁니다. “어머니, 아버지 예수 믿으세요” 잘 못 알아보니까 시트에다가 손을 씁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철저한 불교인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아무도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먼저 교회에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완강히 버티다가 결국에는 교회에 나오게 됩니다. 동생도 교회에 나왔습니다.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서원석’이라는 아들은 마지막 죽는 순간에 그의 사명은 자기 가족을 구원하는 것이라 믿고 실천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도 혼자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갑니다. 아버지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온 가족을 다 구원했습니다. 그 동생도 교회를 다니다가 교회 사무원으로 있는 아가씨를 만나 결혼해서 아주 훌륭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많은 영혼들을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제 총동원주일을 준비하면서 여러분들께서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정말 탕자가 아닌가?’

‘렘브란트’라는 유명한 화가가 그린 ‘돌아온 탕자’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아들이 거지가 되어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그를 꼭 안아줍니다. 한 손은 어머니의 손이고 한 손은 아버지의 손입니다. 모성과 부성이 그 아버지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딱 째려보고 있는 무관심한 사람이 옆에 있습니다. 큰 아들입니다. 큰 아들은 못 마땅합니다. 

그런데 헨리나우웬이라는 하버드대의 교수가 이 그림을 보았습니다. 이 그림을 4시간 동안 봤습니다. 그는 처음에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자기가 돌아온 탕자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자꾸 보면서 자기가 바로 집 안에 있는 큰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바로 마음이 굳어진, 신앙생활을 오래했지만 마음이 완악해져서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비판하고 정죄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그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고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장애인들이 사는 공동체에 들어가서 그 장애인들을 섬기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집안에 있는 탕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전도 한 사람도 못 하면서, 영혼에 대한 사랑도 없으면서, 비판하고 정죄하고 공격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큰 비극입니다. 여러분! 오늘 아버지의 마음, 그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한 영혼을 향해서 나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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