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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부모님과 스승 (고전 4: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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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스승 (고전 4:14~17)


오늘부터 다음주일(24일)까지 우리교회는 󰡔다음 세대들을 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교육주간’으로 선포합니다. 

얼마 전 ‘조선일보․QS’에서, 아시아 11개국의 463개 대학을 평가한 순위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 평가에서는, 대학의 우수성을 크게 4가지가 분야에서 평가했다고 합니다. 이 평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는, 대학의 연구능력이라고 보았습니다(60%). 교육수준을(20%), 졸업생 평판도(10%), 그리고 국제화 정도(10%)로 평가했습니다. 아시아 대학 상위 20위 안의 우리나라 대학으로는 KAIST, 서울대학교, 포스텍이 선정되었습니다. 

그 기사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어떤 특성을 가진 대학이 국내외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대학이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럴 때, 대학의 우수성과 경쟁력은 바로 ‘대학의 연구능력’에 있었다는 겁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교회들 중에서, 어느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인가 평가한다면, 교회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교회로서의 본질적인 속성들이 있습니다. 다섯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예배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2) 교육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 19-20). 
(3) 성도의 거룩한 교제(Koinonia)가 있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초기 예루살렘교회는, “순전한 마음으로 떡을 떼며 서로 교제하였다”합니다. 
(4) 섬김(Diakonia)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금년도 우리교회 표어가, 아름다운 섬김이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섬기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누구를 지배하려는 지배의식이 없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도리어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를 섬기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4 가지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궁극적으로는 선교지향적인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선교신학자 Charles Van Engend은 선교지향적인 궁극적인 방향성을 가진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선교적인 백성들, God's Missionary People󰡕이라고 했습니다(󰡔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로 번역). 우리 시대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과거 기독교 역사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교회들 중에서, 어느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였는가를 평가할 때 교회는 예배 공동체이어야 하고, 교육공동체이어야 하고, 거룩한 교제가 있는 공동체(Koinonia)이어야 하고, 섬김공동체(Diakonia)이어야 하고, 나아가서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는 선교적인 교회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영상1). 

우리교회가 이와 같이 균형 잡힌 교회로서, 선교지향적인 뚜렷한 방향성을 가진 교회로 든든히 서 가는 교회되기를 소망합니다. 교육주간을 선포하면서, 저는 먼저 교회학교에서 다음 세대를 위하여 수고하시는 교역자들과 교사들을 많이 격려해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 가져봅니다. 교회 교육을 생각할 때, 또한 저는 포기할 없는 두 가지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교사 문제󰡕입니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교사의 문제입니다. 좋은 교사가 좋은 교육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교육의 대상인 󰡔학생, 다음 세대의 문제󰡕입니다. 교육의 환경이 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교육환경은, 뭐니 해도 교사와 학생입니다. 교육시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교회에서도 부족한 교육환경 문제를 개선하고자 다방면으로 고민하고, 기도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들에 대하여 이런 욕심을 품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97-100절 말씀이, 늘 제 가슴을 요동치게 합니다(영상2).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7).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98). (그 담 말씀 보십시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明哲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99).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있지요) 주의 法度를 지키므로 나의 明哲함이 老人보다 나으니이다(100).” 우리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교회학교에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들을 향한 간절한 기도와 소망이 있습니다. 그저 주일날 겨우 교회 나와서 한 시간 예배하고, 말씀공부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사람 되지 말고, 시편 119편 97-100에 나오는 경건한 믿음의 사람 같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의 계명들과 주의 증거들과 주의 법도들 때문에, 자기를 대적하는 원수보다 지혜롭고, 그 명철함이 자기를 가르치는 스승보다 낫고, 그 명철함이 노인보다도 뛰어난 그런 인물들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 이런 인물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교사가 있어야 합니다. 교사가 교육의 최고의 환경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교사를 좋은 교사되게 하지 못하는 요인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교육문제를 이야기할 때, 교사의 실력과 자질 문제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잘못된 교육제도나 교육의 관행문제가 더 큰 문제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강남의 한 유명 학원 강사 자리를 버리고 입시가 아닌 진짜 ‘교육’을 하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하나로 고등학교의 교사가 된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가지고 정작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질식할 만한 잘못된 교육제도와 전시행정이었다고 합니다. 교사들이 학원 강사보다도 자유롭지 못하고, 학원보다도 더 입시교육에만 매달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학교교육에 절망하고 쓴 책이 󰡔학교 개조론󰡕, 󰡔내신을 바꿔야 학교가 산다󰡕이었다고 합니다. 

선생님들이 내는 수업진도표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지만, 내라고 하니 모두 억지로 낸다고 합니다. 그 분이 교사로 처음 발령받은 학교의 지도자가 굉장히 까다로운 분이셨다고 합니다. 교사들이 수업진도표의 틀린 것을 하나하나 지적했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심통이 나서, 다른 학년 교사의 수업진도표를 학년만 바꿔서 냈다고 합니다. 결과는 통과였다고 합니다. 다른 학교에 가서도, 한글로 된 영어교사의 수업진도표를 이름만 바꿔서 또 내봤답니다. 어차피 엉터리고, 쓰지도 않는 것이니까···, 역시 통과되었다고 합니다. 학교의 지도자들이 서류의 형식적인 면만 본다는 이야깁니다. 

교회학교 교육에는 이런 비본질적인 오랜 습성, 관행들이 없을까요? 웬만큼 관록 있는 교회들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다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런 것들이, 교육하는 데 매우 부정적인 환경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바른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행정도 개선되어야 할 것들 많습니다(우리교육위원도 많은 노력). 오늘은, 교사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 15). 그러면서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합니다. 스승에도 격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선생이라고 다 똑같은 선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도 일만 스승이 있습니다. 여기, 일만 스승이 있다고 할 때, 선생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파이다고고스’ (paidagwgo,j)입니다. 이 말이 본문에서 ‘파테르’(pater)‘아버지’라는 단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영상3).

결론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스승이 되고자 할 때, ‘파이다고고스’와 같이 어디를 가나 널려 있는 그런 선생이 되지 말고, ‘파테르’(아버지)와 같은 선생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파이다고고스’라는 선생은 어떤 선생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이런 뜻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있던 시대입니다. ‘파이다고고스’라는 단어는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에, 노예 중에서 특별하게 주인의 신망을 받는 노예들은 맡았던 중요한 임무가 있었습니다. 비록 노예의 신분이긴 하지만, 신망 받는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主人의 어린 자녀들을 맡아서 돌보는 일입니다. 주인의 자녀가 6살쯤 될 때부터(유치원에 다니거나,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成人이 될 때까지(만 13세), 항상 주인의 자녀를 보호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파이다고고스가 되면, 24시간 주인의 자녀들과 동행해야 합니다. 감독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육하는 일도 맡았습니다. 그러다 주인의 자녀가 성인이 되면, 파이다고고스의 역할은 거기서 끝납니다. 

성인이 된 자녀는, 성인례(‘바르 미츠바’)를 하고는,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지게 됩니다[어떤 의무? ①하나님께 자기를 위해서 스스로 기도해야 하고, ②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회당에 나가서 예배참여 해야 하고, ③ 손님 앞에서 성경구절을 읽고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하고, ④ 평소에 스스로 토라를 읽어야 하는 의무가 있고, ⑤ 매일 아침 테필린(Tefilin)의식을 행해야 했습니다(신명기 6, 4과 5절 말씀을 양피 조각에 손으로 써서 네모진 검은 상자에 넣어 가죽 띠로 메어서 이마와 팔뚝에 얹고 가죽 끈으로 둘둘 감아 매고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성경구절을 읽는 것)].

‘파이다고고스’(노예 스승)는 이와 같이 주인의 자녀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자가 되고, 감독자가 되고, 때로 교육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파이다고고스)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福音으로써’(디아 투 유앙겔리우, 복음을 수단으로 하여) 너희를 낳았음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많은 노예 스승(파이다고고스)와 같은 선생 중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써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직접 낳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낳는 사람 아닙니까? 친권자라는 이야기지요. 

친권자인 아버지가 자기 자식에게 아버지로서의 권한도 가지고 책임도 가집니다. 그 책임은 무한책임입니다. 아버지와 자식관계처럼, 사도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관계가 그러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 세대를 ‘복음으로써’(디아 투 유앙겔리우) 키우고 양육하는 궁극적인 교사상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학교 교사의 궁극적인 모델은 ‘파이다고고스’(노예스승, 보호자, 감독자, 교육자)가 아니라 ‘파테르’(아버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로 자식을 낳고, 기르기 위해서 친권자의 권한과 무한책임을 지는 아버지 같은 선생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과 같이, 그런 아버지 같은 선생은 많지 않습니다. 흔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같은 선생님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선생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어른들의 책임이고 사명 아니겠습니까? 

우리교회 교회학교의 교사들은 ‘파이다고고스’(노예 스승)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자식을 낳는 ‘파테르’아버지 같은 선생님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런 선생님이 많은 교회로 소문나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에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일할 일꾼, 인재들이 길러지고, 이 시대의 인물들이 길러져야 합니다. 
남강 이승훈 장로님이 세운 오산학교(처음엔, 小學校 講明義塾)가 있습니다. 이승훈 장로님은 본래 고아출신 장사꾼입니다. 불학무식한 상민출신입니다.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어머니가 죽고 할머니 손에서 컸습니다. 그런 그가, 평안도 장사꾼이 되어, 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나이 40대 초반에,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만나고, 한석진 목사님을 만나서 설교를 들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나라의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가가 됩니다. 오산학교는, 숱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국난의 시대에 수많은 애국지사와 지도자들을 길러낸 대표적인 기독교학교입니다. 

그 학교의 선생들에는, 애국자 시당 여준(是堂呂準), 함석헌(咸錫憲) 선생을 길러낸 다석 유영모(多夕柳永模), 교가 창립기념가 졸업식가 동문회가 오산 경가(五山景歌) 등을 짓고 초창기 학교의 교무행정의 체계를 세운 춘원 이광수(春園李光洙),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자 민족 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丹齋申采浩), 소설가 염상섭(廉尙燮), 고당 조만식 장로님 등이 있습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님은 호랑이 같은 선생님이었다고 합니다. 오산 경가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백두산서 자란 범은 백두호라고 범 중의 범으로 불리나니라. 너희들은 오산에서 자랐으니 어디를 가든지 오산이로다.󰡕 호랑이라고 다 호랑이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백두산에서 자란 호랑이를 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잡호랑이와 백두호는 품위부터 다르답니다. 백두산에서 자란 호랑이를 백두호라고 범 중의 범으로 불리듯이, 너희들은 오산에서 자라났으니, 어디를 가든지 오산이라. 이것이 오산학교의 기백과 교육정신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일할 人才가 필요합니다. 우리교회 교회학교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인재들을 길러내는 교육의 基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福音으로써 자식을 낳는 아버지 같은 훌륭한 선생님들이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 같은 선생님들이 다음 세대를 길러내어야, 좋은 일꾼이 배출됩니다.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앞선 어른들께서, 이런 교육을 실현하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더 많이 기도해 주시고,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교회학교 교사들을 격려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교육을 위해서 헌신하는 모든 교사들도, 아버지 같은 선생이 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고, 먼저 자기를 가르치는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고, 나아가 위대한 스승들이 되십시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우리교회가 다음 세대를 품는 교회되기 위해서, 오늘부터 한 주간 교육주간으로 선포합니다. 교사로 부름 받은 자들이, 아버지 같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 교사 되게 하여주옵소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들이 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쓰임 받는 이 시대의 인물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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