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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이 시대의 참 스승 (삼상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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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참 스승 (삼상 22:1~2)


지금 세계에 수많은 대학가운데 최고의 대학을 꼽으라면 미국에 있는 하버드대학을 꼽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전통도 전통이지만, 이 대학을 통해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또 사회에 공헌한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미국 시사 월간지인 애틀란틱 먼슬리 6월호에 하바드 대학 출신의 연구 자료가 나왔습니다. 1937년 당시 이 대학 2학년의 남학생 268명의 인생사례를 72년에 걸쳐 연구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최고 엘리트답게 그들의 출발은 상쾌했습니다.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한 사람이 4명이었고 존. F. 케네디대통령도 나왔고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으로서 닉슨의 워터게이트사건 보도를 총괄 지휘했던 벤 브래들리도 있었습니다. 대다수가 소위 특권층의 삶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대상자 가운데 50세가 넘을 때 무려 약 3분의 1이 정신질환을 앓을 정도로 심한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연구를 주도해온 하바드 의대 정신과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들이지만, 대다수가 ‘엘리트라는 껍데기 아래서 고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의 결론은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안정적인 성공을 이뤘다’ 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과학의 잣대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삶은 미묘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평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그 누구라도 불구하고 저 전능하신 여호와의 손길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 그렇습니다. 다 괜찮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 상처가 있어요, 질 그릇 같은 연약함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아 하나님께서 쓰셨던 한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사람, 그래서 지금도 그의 탁월한 리더십과 섬김이 너무 그립게 느껴지는 다윗을 통해 참된 스승의 모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도움을 준 사람들이 다 죽임을 당하고 다윗은 이웃 블레셋 나라로 도망합니다. 블레셋에서도 있을 수 없어 결국 광야의 아둘람 굴로 숨습니다. 한 400여명이 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굴까지 따라온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2절에 보면?환란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400명의 사람들이 사울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다윗 왕조를 창출해낸 주동세력이 되었습니다. 다윗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지 정권 창출의 세력 만으로서가 아니라 메시야가 오실 다윗 왕조의 나라를 건강한 정치와 경제, 사회가 되도록 이끌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많은 엘리트들이 압살롬에게 합류할 때에도 끝까지 다윗 왕조를 지키고 다시 회복시키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오합지졸의 400명이 어떻게 정권을 창출하고 다스리고, 위기가 올 때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둘람 굴에 모인 이들이 다윗과 더불어 무엇을 하였을까요?

첫째, 새 역사의 비전이 잉태되는 교육의 현장이었습니다.

먼저 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환란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다고 했습니다. 여기 환란 당한 모든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인생살이에 평안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 희망을 두고 싶어도 둘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원어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사울의 학정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빚진 자란 나라의 경제 시스템이 잘못 되어 구조적으로 빚질 수밖에 없고 또 그 빚 때문에 가족이 해체되어 도망 다니는 등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또 마음이 원통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단어는 한나가 자식이 없어서 원통해 할 때 사용되던 단어와 똑같습니다. 즉 호소할 때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어디 가서 표현할 때도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나 사건이 자신의 상처를 건들게 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성질을 부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 정의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이 가야할 길인지에 대한 지각이 전혀 없습니다. 상처만 건들면 모든 판단력을 상실하여 자기 상처를 주인 삼아 살아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착하고 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도 매우 힘든 일입니다. 준비가 된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이 아둘람 굴은 사실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이 굴에 언제 사울이 들이닥칠지, 또 이 실패한자들과 언제까지 있어야할지 막막한 일이 아닙니까? 이때 다윗의 심정을 잘 드러난 시가 시편 57편과 142편에 있습니다. 그때 당시 다윗이 얼마나 절망하고 있었는지, 시편 142:4절에 보면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방 천지를 돌아보아도 자기편은 하나도 없습니다. 외로운 도망자의 아픔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윗을 찾아 나온 사람들 역시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곳 절망과 한숨의 자리에서 다윗은 결코 주저앉지 않습니다. 

시57:7절에 보면 그는 오히려 절망가운데 노래합니다. 여기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여기 ‘내 마음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확고부동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이 견고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비록 쫓기는 몸이지만 그 믿음이 하나님께 향하여 확고부동하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심령에 절망의 한 복판에서 찬양이 울려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큰 기대를 걸고 인생을 투자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눈에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데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다가와도 크게 타격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래합니다. 고난이 깊어가는 자리에서 부르는 노래는 특이한데가 있습니다. 처절한 심령의 메아리가 동반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둘람 굴에 온 자들이 이 찬양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들은 다윗의 가슴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비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잠29:18절의 말씀을 통해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서 묵시라는 말이 곧 비전입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의미합니다. 비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곳을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이 없는 사람은 방자해집니다. 비전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는대로, 기분내키는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삶이 방자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목회자든, 교사든, 교인이든, 어떤 인간이든 방자해집니다.

그리고 비전의 사람에게는 열정(熱情, passion)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그 비전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교직자 수련회에서 포항에 있는 포스코에 있는 제철소를 갔었습니다. 제철소는 여의도 3배가되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이 제철소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철강석을 녹이는 고로입니다. 이 고로는 한번 불을 붙이면 고로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불을 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 15년간 하루 24시간 계속 불을 붙인다는 것입니다. 한번 불을 끄면 고로 안의 녹던 철강석이 굳어서 폭탄으로도 잘 처리가 안 된답니다. 그래서 24시간 3교대로 15년간 계속 쉬지 않고 불을 붙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로의 불이 제철소의 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불이 꺼지면 고로도 못쓸 뿐 아니라 제철소도 all stop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 모두 예외 없이 마음의 고로에 불이 붙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열정이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불이 붙어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열정이 불타올라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의 불이 꺼지면 우리 인생은 불 꺼진 제철소 고로처럼 멈춰버리고 말 것입니다. 마음속에 열정이 식으면 우리 인생은 파산되고 맙니다.

릭 워렌(Rick Warren)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소속한 모임의 온도를 알고 싶으면, 지도자의 입에 온도계를 넣어 보라!" 이 목사님 역시 리더의 비전과 열정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리더의 가슴이 냉냉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리더에게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전이 없으니까 그 비전을 이루려는 열정도 없습니다. 리더의 가슴이 냉냉하면 그 그룹 전체가 냉냉합니다. 열정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비전과 열정과 믿음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둘째, 지금 아둘람굴에서 다윗은 이 비전의 삶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스승으로서 다윗은 삶의 본을 보였습니다. 함께 살면서 보고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큰 신뢰감을 주었고 나중에 다윗을 평생 따르게 했던 요인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나중에 다윗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윗이 단순히 그들을 교육하고 훈련만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면서 가까이에서 다윗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그들에게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본이었을까요? 이때에 지었던 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시편 57편과 142편입니다. 이 시를 분석해 보면, 다윗이 그들에게 2가지 귀한 삶의 본을 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의 본입니다. 이것이 시편 57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찾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신앙인으로서 경건생활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말씀과 기도를 삶의 우선순위로 삼았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아마 다윗부터 새벽기도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8절입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기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히브리어에서 새벽을 '오르'라고 합니다. 그 뜻은 ‘빛나다’ 입니다. '솨파르'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그 뜻은 ‘반짝반짝 빛나다’ 입니다. 새벽은 햇빛이 빛나고 이슬이 빛나고 총명이 빛나고 영성이 빛나는 시간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왕도 새벽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양은 본래 야맹증이 있어서 어두워지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해가 지기 전에 양들을 모아 우리로 인도해 쉬게 하고 다음날 해가 뜨는 이른 아침 다시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만일 그때 목자가 게을러서 늦잠을 자게 되면 이슬 맞고 촉촉한 꼴을 다른 양떼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기 때문에 굶어 죽게 됩니다. 그래서 목자는 부지런해야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새벽을 깨우지 못하면 양떼가 꼴을 먹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훌륭한 목자였습니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특기는 수금 연주였습니다. 그는 매일 새벽 일어나면 수금을 연주하곤 했습니다. 그의 수금 연주소리는 아름답게 울려 퍼졌고 잠든 사람들을 깨우곤 했습니다. 지금 비록 그는 어쩔 수 없이 도망자가 되었지만, 그는 이곳에 함께한 절망의 사람들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될대로 대라는 식의 자포자기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오직 인생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기도의 희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는 스승으로서 자기 앞에 온 이 절망의 사람들을 한 시대의 축복의 통로로 세우기 위해 새벽을 깨우는 이 모습을 보십시오.

한국을 방문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세계를 순회하며 인상깊게 감동을 받은 몇 나라를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침의 나라였다. 내가 카나다에 갔을 때에 아름다운 새 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떴다. 캐나다는 자연이 아름다운 나라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일본에 갔을 때에 출근하는 요란한 발자국 소리와 아침에 돌아가는 공장의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뜰 수 있었다. 일본은 경제 대국이요 발전하는 나라임을 알 수 있었다. 세 번째 나는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 갔다. 고요한 새벽 기도회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 교회가는 성도들의 발자국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이 시대에 마지막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영적인 잠을 깨우는 새벽을 깨우는 함성이 한국교회에서부터 시작됨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제 교회는 창립 40주년을 맞아 새벽을 깨우는 일부터 시작하며 다시 한번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를 릭 와렌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과 함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번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이번 40일 동안 바르게 인식한다면 여러분들의 인생에 크나큰 전기가 마련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영적인 변화가 내일부터 시작되는 특별새벽기도에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새벽기도에 한번도 참석하지 않은 분이라 할지라도, 이번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가 보였던 본은 진실한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시편 142편의 내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외식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겉과 속이 같았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지 않았습니다. 늘 진지했고 솔직했습니다.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살았습니다. 이런 진실한 삶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여기 다윗은 스승으로 이 소망없는 자들을 강한 자로 우뚝 세운 것입니다.

본문은 짧은 두절로 끝나지만, 아둘람에서 다윗과 함께 했던 이들의 삶은 다윗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성경은 이들의 관계를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이라는 말로서 강조하는 것을 봅니다. 여기에서 함께 한 사람들이 결국 통일 이스라엘의 주역이 되고, 다윗 왕권의 핵심인물이 나왔습니다. 압살롬의 반역 때에 끝까지 다윗 곁을 지켰습니다. 마지막에 반란군과 싸워 이길 때에도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특히 사무엘하에 보면 다윗의 3대 명장과 30명의 용장들의 공적이 실려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아둘람 시절 다윗과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이 다윗과 목숨을 건 사랑으로 묶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처음 뭔가 인생이 뒤틀어진 사람들이고, 상처받아 삶이 삐뚤어진 자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약하고, 허물 많은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다윗의 훈련과 삶을 배우면서 결국 강한 자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큰 신뢰감을 주었고 나중에 다윗을 평생 따르게 했던 요인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나중에 다윗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윗이 단순히 그들을 교육하고 훈련만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면서 가까이에서 다윗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그들에게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미스터 홀랜드 오퍼스(Mr. Holland oppu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해석하면 '홀랜드 선생님의 교향곡'입니다. 글렌 홀랜드의 실화를 영화화 한 것입니다. 홀랜드는 브로드웨이에 진출하여 유명한 교향곡을 작곡하여 이름을 날리고 싶은 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했고 가족들을 부양해야했기에, 조그마한 시골 학교에서 잠시 위기만을 넘기려고 교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만 30년 간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재정문제가 생겨서 학교를 떠나야만 되게 되었습니다. 지난 온 날들을 돌아보니 꿈은 다 깨져 버렸습니다. 브로드웨이에 가서 훌륭한 교향곡을 작곡하여 심포니를 연주해서 유명해지고자 하는 꿈도 이루지 못했고, 아들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청각 장애인이었고, 남은 것이라고는 주름진 이마와 초라한 퇴임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학교를 걸어 나가는데, 강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강당으로 뛰어가 봅니다. 가서 보니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들이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홀랜드가 감격해 있을 때, 무대 휘장이 걷히며 제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있었고 홀랜드에게 지휘봉이 넘겨졌습니다. 선생님이 연주를 인도합니다. 맨 앞자리에는 클라리넷을 연주하지 못해서 좌절했던 학생이 앉아있습니다. 이 학생은 홀랜드 선생님의 격려와 칭찬으로 클라리넷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직 주지사로서 있을 만큼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난 다음에 주지사인 제자는 인사말을 합니다. "홀랜드 선생님은 저와 많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혹시 후회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부와 명예를 안겨줄 심포니 작곡을 하셨지요. 하지만 선생님은 부자도 아니고, 이곳에서만 유명할 뿐입니다. 따라서 실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홀랜드 선생님은 부와 명예를 초월한 성공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선생님께 영향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는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우리가 선생님의 심포니입니다. 우리가 선생님 작품의 음표이자 음악인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은 선생님의 작품입니다. 오늘 나는 선생님이 작곡하신 심포니의 음표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있는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음표입니다. 아름다운 인생의 음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의 격려와 사랑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새 인생을 살아가는, '저 사람은 오늘 내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 포기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사역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 이제는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분들이 혹시 계십니까? 포기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동의를 구하십시오. 여러분만의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일이 이뤄지도록 도와주기 원하십니다.

오늘 이 시대는 분명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도, 정의도 거대한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채 방황하는 한 복판에서 그래도 우리에게 필요한 분은 스승들이십니다. 삯꾼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양 떼를 위하여 생명을 거는 일이 없지만 선한 목자는 언제나 그 일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생명을 걸고 해산의 수고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의 가치는 양 떼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멀리 생각하지 마시고 교회학교에서 땀 흘리시는 교사들을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묵묵히 우리에게 말씀으로 섬기는 목장지기, 또 경로대학이나, 실로암 대학에서 수고하는 교사들을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사회 각지에서 교사로서 교수로서 활동하시는 분들의 노고를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스승!! 그들은 이 아둘람 굴 같은 시대 속에 희망을 잃은 다음세대에게 꿈과 열정을 불어넣어주는 이 땅에 부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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