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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욱더 힘쓰라 (살전 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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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많이 힘쓰라 (살전 4:1~12) 
 
 
4-5장은 3장 마지막 구절의 “우리 주 예수께서 … 강림하실 때에 …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는 말씀과 5장 23절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이 감싸고 있습니다(inclusio 구조). 이는 4-5장의 다양한 교훈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흠 없는 삶과 관계된 교훈이라는 의미입니다. 4장 1-8절은 거룩한 삶을 촉구하는 내용이고 9-12절은 형제 사랑과 관계된 내용입니다.

1절의 “종말로”는 ‘마지막으로’라는 뜻입니다. 4-5장이 상당한 분량으로 남아있지만 주제에 있어서 한 가지로 통일될 수 있는 마지막 교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이미 바울 일행에게 받아서 행하고 있었습니다. 발신자들은 이미 알고 행하고 있는 복음적 삶을 “더욱 많이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대충 살아도 된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마땅히 행할 것을 지금 행하고 있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욱 많이 힘쓰도록’ 권면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더욱 많이 힘써야 할 일은 2-3a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당시 데살로니가 시민들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린 디오니소스(Dionysus)교는 남성의 생식기가 종교적 상징이었습니다. 카비루스(Cabirus)교는 종교의 이름으로 성적 문란을 조장했습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인들은 성적 부도덕을 죄나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문화의 영향으로 어린 성도들은 성적 방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 일행은 성도의 “거룩함”이 주 예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뜻임을 강력하게 밝힙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삶을 구체적으로 권면합니다.

첫째는 “음란을 버리고”(3b)입니다. ‘음란’(pornei,aj( 포르네이아스)은 모든 종류의 비합법적인 성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성도가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가까이 두고 즐길 수는 없습니다. 청교도주의의 대들보인 존 오웬(John Owen, 1616-83)은 “죄의 본성이 고개를 들 때, 그 처음 발생 단계에서부터 단호하게 대처하고, 그것이 절대로 자리 잡지 못하게 하라”, “죄는 죄를 즐거워하는 감성 속에 자리를 잡는다. 마찬가지로 죄는 죄를 가볍게 여기는 지성 속에 그 자리를 잡는다.”고 했습니다. 음란은 성도의 삶에서 처음부터 온 힘을 다해 대적하고 멀리해야 할 악입니다.

둘째는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4)입니다. 아내로 번역된 단어의 원뜻은 ‘그릇’인데 무엇에 대한 은유인지 학자들 사이에 해석 차이가 팽팽합니다. 랍비 문서에서는 그릇이 ‘아내’에 대한 천박한 은유로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반면 사무엘상 21장 5절에는 같은 단어가 ‘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문맥은 두 가지 해석 모두 가능합니다. ‘아내’로 해석하면 결혼이 음란 방지의 역할을 하지만 아내란 성욕 해소의 도구가 아니므로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음란하지 않은 성관계는 오직 정당한 결혼관계에서만 가능하다는 함의, 성도의 가정은 부부관계조차 음란한 사회 풍조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함의를 가지게 되지요. ‘몸’으로 해석하면 각자의 몸을 음란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거룩하고 존귀하게 사용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어느 해석이든 성도가 사회 풍조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핵심은 동일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입니다(5-6a).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도 윤리 지침이 있지만 절대윤리가 아니라 상대적인 윤리입니다. 사회가 타락할수록 과거에 죄로 여기던 일들을 용인하고 수용하다가 점점 당연한 일로 정당화시키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사회 전반이 “색욕”, 즉 충동적인 욕정을 좇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 일”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대윤리를 고수해야 합니다.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는 것은 금지된 경계선을 넘어서 형제를 기만하여 더 많이 가지려 한다는 뜻입니다. 사업상의 범죄를 의미할 수도 있고 성적 범죄와 관련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핵심은 성도가 ‘이방인과 구별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함”은 원래 ‘…으로부터 구별되다’(set apart from)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성도의 거룩함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은 그 시대 문화나 사상 풍조들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이 성적인 문제를 중점으로 다루는 까닭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성적인 그 도시의 문화로부터 구별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선교현장에서는 복음이 토착화되는 과정 중에 토속 문화가 복음에 혼합되는 일이 흔히 일어납니다. 복음의 절대적인 배타성을 고수하지 못하고 시대 풍조를 좇아갑니다. 가나안의 토착 문화를 좇아 살다가 불신자들과 구별되지 않았던 구약 하나님의 백성과 같은 모습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처럼 교회가 그 시대 풍조를 좇아 살 때 구별성이 없어지고 거룩함을 상실하게 됩니다.

오늘날 복음은 미국의 성공주의 문화로 옷 입혀진 채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보장하는 최상의 상품처럼 소개되고 있습니다. 소비자의 심리를 조사하고 흥행적인 요소를 도입해서 적절한 마케팅 전략을 통해 제공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대가 없이 대박 찬스를 잡은 것처럼 왜곡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용’을 외치는 시대 풍조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는 일이기에 성경이 금할지라도 용인하고 수용하는 분위기가 만연하지요. 오히려 성공주의를 정당화하고 부채질하여 교회 안에 세상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종교 기업으로 비판할 만큼 구별성은 상실했습니다.

성도가 거룩함을 상실할 때, 직업관에 있어서나 교육관에 있어서나 가정관 등에 있어서 불신자와 별반 차이가 없게 됩니다. 돈을 믿고 신뢰하는 것, 성공과 성취를 사랑하는 것, 이 세상에 소망을 둔 것, 자신과 가족의 행복에 최상의 가치를 두는 것 등 불신자들이 추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되지요. 성도의 가치관이 불신자로부터 구별되지 않으므로 성도의 이혼율이나 도덕성이나 불신자의 이혼율이나 도덕성과 별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성문제에 있어서도 음란한 시대 풍조를 좇아 음란을 어느 정도 허용하고 이 정도는 괜찮다 하는 정신을 가지게 됩니다. 더욱 많이 힘써 거룩하게 살려고 애쓰지 않는 모습이 되지요.

6b-8절은 거룩함 상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언급합니다.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거룩한 삶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신 목적입니다(벧전 1:15-16).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신 것은 단지 성도를 구원해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참으로 구원을 얻은 성도는 실패를 반복할지라도 결코 거룩한 삶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거룩함을 위해 더욱 많이 힘쓰는 주체는 성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거룩함은 ‘성령님’의 힘으로 된다는 진리가 이 말씀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셔서 성도에게 거룩한 삶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시고 성도를 거룩한 삶으로 이끄십니다. 성도는 그분께서 우리 마음을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실 때, 마음에 일어나는 거룩함의 소원을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달콤함에 미련두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과감하게 음란을 버려야 하며 적극적으로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을 시대의 풍조에 따라 흘러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9절의 “…에 관하여”라는 문구는 새로운 주제를 시작할 때마다 바울 사도가 주로 사용하는 형식입니다. 9-10절은 형제 사랑을 권면하는 내용인데, 이미 마게도냐 전 지역에 소문날 정도로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더 많이” 사랑하도록 권합니다. 11-12절은 형제 사랑과 연관해서 규모 없는 자들을 경계하는 내용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지나친 열망으로 현실의 삶에 충실치 못하고 형제들에게 누를 끼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형제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베푸는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일했던 바울 일행과 대조가 됩니다. 사랑은 빌붙어서 덕 보려는 자세가 아니라 보다 잘 섬기기 위하여 땀 흘려 일하는 자세를 낳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재림에 대한 열광적인 태도는 현실도피적인 태도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경계를 받아 마땅합니다. 발신자들은 열광주의자들에 대해 먼저 “종용”, 곧 떠벌리지 말고 침묵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외인들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아무 궁핍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흥분에 들떠서 자기 책임조차 회피한 채 놈팡이처럼 재림을 준비하는 것은 마땅한 자세가 아닙니다. 묵묵히 자기의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재림을 맞이하는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왕이요 아버지로 고백했다면 마땅히 그분의 백성이요 자녀다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고백했다면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에 힘써야 마땅합니다. 삶이 뒤따르지 않은 고백이라면 공허한 말재주에 불과하며 그 고백의 진정성은 의심받아야합니다.

복음을 왜곡하는 음란한 시대의 풍조를 이기고 말씀이 가르치는 절대윤리를 더욱 힘써 고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을 힘입어 날마다 거룩함이 향상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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