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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주일] 아름다운 헌신 (막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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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14:3-9

오늘은 우리 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제정한 청년주일입니다.   저는 지난주간에 평양노회 노회원 선교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김성준목사님이 시무하시는 홍콩 동신교회에서 “동남아선교를 위한 평양노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였고, 조한 목사님이 시무하는 마카오한인교회와 중국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가나안 성경학교, 중국인들을 위하여 설립된 평안교회, 심천에는 유필종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심천섬기는 교회를 둘러보았습니다.  

우리 평양노회 소속한 교회들을 둘러보면서, 홍콩의 100만불이라는 야경도 보았고, 홍콩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빅토리아 산정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카오로 가면서 세계적인 카지노를 둘러만 보았습니다. 얼마나 큰 도박장인지, 시설비가 40조원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 각종 레저시설과 호텔, 세계명품 브랜드의 의류매장이 있는 들어와 있고, 끝도 보이지 않는 도박장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으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카지노에는 몇 가지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도박장에는 창문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세상을 보여주는 통로가 창문입니다. 창문이 크고 넓으면, 그만큼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창문이 적으면 적게, 창문이 깨끗하면, 깨끗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실내에서 살면서 아침이 되면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은 창문을 통하여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주목하게 되고, 계절의 변화, 시간의 변화, 세상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카오는 바닷가 섬지역이기에 창문을 열어놓으면 푸른 바다가 보이고, 답답한 실내를 벗어나 넓고 푸른 바다를 향하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카지노에는 오로지 도박에만 몰두하라고 창문을 만들지 않고, 화려한 불빛으로 조명을 밝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때때로 창문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고, 변화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박장에는 시계가 없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손목시계를 가지고 있고, 핸드폰에 시간이 표시되기는 하지만, 벽에 대형 시계를 걸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박하는데, 시계를 들여다보지 않게 하려는 속셈입니다.  사람은 시계를 들여다보고, 시간의 흐름을 감지해야 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도박에 빠져 있으면, 그는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요, 물질적인 손해만이 아니라, 그의 생애를 망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까?  인생의 시간을 계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카지노에는 거울이 없다고 합니다.   거울이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거울을 통하여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매만지고,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면,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진솔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법입니다. 그런데 거울이 없다는 말은 자신을 들여다보지 말고, 오로지 도박에만 전념하라는 뜻으로, 거울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무서운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창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고치고, 지금이 어떤 시점에 와 있는지 시간의 흐름에 민감해야만 합니다.  우리 인생의 창문, 인생의 거울, 인생의 시계에 대하여 예민해야 합니다. 세상에 돈 따먹기 하는 일에도 이런 고도의 전략과, 환경을 만들어놓는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부름 받은 사람으로, 최선을 다하는 전략과 환경을 가꾸어가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거룩한 목적을 세우고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냥 끌려가는 인생을 살지 말고, 인생을 아름답게 장식하면서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아름다운 헌신”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장식을 잘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장식하고 채우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우리를 변화시켜, 멋진 사람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를 어린 아이로 남겨두시지 않고, 장성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처럼 자라기를 원하시고, 예수님처럼 아름다운 생애를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빈곳을 채우시는데, 정말 아름답게 채우시고, 장식하시는데 아름답게 장식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주 공간에 빛으로 채우시고, 그 빛을 보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창1:3-4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은 창조하신 목적이 적합하고, 자신의 의지에 부합한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토브’라는 말은 위대한, 놀라운, 완벽한, 아름다운, 선한, 좋은 그런 뜻입니다.  영어로 Good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셔서 우주공간에 채우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다,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낮과 밤으로 나누시면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공중에는 새들로, 바다는 각종 고기로, 채우시고는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땅에는 각종 짐승으로, 각종 가축으로, 땅에는 각종 푸른 풀과 나무로 채우시고 장식하면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마지막 사람을 지으시고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무려 7번이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바라보기 생물’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시라고 존재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아름답다”는 말이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것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을 만족을 주는 것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는 일이나 마음씨가 훌륭하고 갸륵할 때에도 아름답다는 말을 합니다.    아름답다는 말의 반대는 추하다, 더럽다, 볼품없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일생을 되돌아볼 때, 혹시 추한 사람이 아니었는지, 한번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적인 삶을 사는데, 아름다운 헌신이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추한 헌신이 되지 않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기독교 사회학자, 설교가인 “토니 캄폴로”(Tony Campolo)교수라는 분이자기 친구 집을 방문했다가 듣고 겪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의 친구에게 만 4살 먹은 어린 딸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폭풍우 몰아치고 무서운 번개가 치던 밤이었습니다.  갑자기 2층 방에 혼자 있던 어린 딸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린 것이 혼자서 얼마나 겁이 났을까 하여 그의 아버지는 2층으로 급히 뛰어 올라갔답니다.  어린 딸이 창문 앞에 양 팔을 벌리고 선채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감사해요. 저를 사진 찍어 주실 거지요. 멋있게 찍어주셔요.”  그날 밤 그 친구는 자기 딸의 존재를 하나님이 보낸 천사처럼 느꼈다고 합니다.  비바람 몰아치는 두려운 밤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행복한 밤이었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캄폴로 교수 또한 그의 친구의 천진난만한 딸의 이야기를 통해 감사의 진정한 의미와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폭풍우치고 번개 치는 요란한 밤이었는데,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의 사진을 찍어 주시려고 플래시를 터트리시는 것으로 해석할 줄 안 그 순진한 소녀의 마음 그리고 어른들조차 두려워하던 그 밤 이 소녀의 입술에서 나온 소리 “하나님, 감사해요”는 그 어떤 신앙 고백보다 위대한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이 나의 모습을 아름답게 사진 찍어주시고, 예쁘게 받아주시고, 소중한 사람으로 여겨달라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끔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감사해요. 저를 사진 찍어 주실 거지요. 멋있게 찍어주셔요.”라고 외쳐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사건으로 들어가 봅니다.   저는 이 기름 부은 사건을 읽어볼 때마다 향유의 값에 대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어떤 향유가 그렇게 값이 비싼지, 300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다는 대목이 걸렸습니다.  300데나리온, 당시 장정 한 사람이 나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이 1데나리온이었습니다.  300 데나리온이라고 하면 한 사람의 장정이 300일 일하고 모은 돈이라는데, 정말 그렇게 비싼 향유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즘 향유 원액이 아무리 비싸도 그렇게까지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나드’라는 향유는 인도산의 나무뿌리에서 짜낸 것으로 조금도 이물질이 섞이지 않는 원액이었습니다.   순전한 향유라고 했는데, 순전하다는 말은 진정한, 순수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진 향유는 고급 향유요, 원액이요, 수입된 고급 향유였습니다. 당시 인도나 히말라야산맥에서 자라는 ‘타키스 자타만시’라는 향나무 뿌리에서 나는 것인데, 고급 향유가 나지 않는 팔레스타인에서 매우 비쌌다고 합니다.   이러한 나드 향유는 부유한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었는데, 솔로몬의 아가서의 3번이나 나오는 향유입니다.  고급 원액의 향유는 충분히 300데나리온 이상의 값이 나가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이나 유대인 사회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에 향유를 발라, 부패를 방지하고 썩은 냄새를 없애기 위하여 발라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거나, 귀한 손님이 오면 손님의 머리에 향유를 발라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의 가치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고로만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봉사라고 하면 다 같은 봉사가 아닙니다.  형식적이고 체면치레하는 봉사가 있습니다.  봉사라고 하여, 다 같은 봉사가 아닙니다.  자기를 알아달라는 봉사도 많습니다.  자기의 이름이나  드러내기 위한 봉사는 주님이 기뻐받으시지 않습니다. 

가룟유다가 오늘 마리아의 향유를 300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고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자기 선생님이 존경받으면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이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나무라는 것은 자기 선생님을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불평은 한 사람으로 그치지 않고 전염성이 강합니다. 

이 날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왔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신 나사로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다고 하면 구경꺼리가 되고 남았습니다.  지금도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면 구경꺼리가 되고 남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였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만 자기 동리에 오시면 예수님 곁에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 곁에 앉아 있으면 떠날 줄 몰랐습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언니 마르다에게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잔치는 예수님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 다가오더니 가지고 온 옥합을 깨뜨리고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발등으로 흘러내린 향유를 머리털로 닦아 드렸습니다.  이 순간 그 잔치자리는 향유 냄새로 진동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에 나드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드리는 것은 왕이 즉위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귀하신 손님이 방문하면 기름을 부어드렸습니다.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을 세울 때에 그들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임직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사회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면 향유를 부어 시신이 썩지 않게 하고, 부패한 냄새가 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기의 오라버니를 살려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들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해주신 일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요, 인류를 구원하실 왕으로 인정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름을 부어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마리아가 기름을 부은 것은 당신의 장례를 예비한 것이라고 이해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있었던 제자들은 이러한 여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가룟유다의 눈에는 여인의 행동을 말이 되지 않는 어리석고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요, 낭비 중의 낭비였고, 사랑이 아닌 오만이었다고 보여졌습니다.    가룟유다는 이 여인을 정죄하고 나섰습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 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제자들이 나섰고, 그중에 가룟유다가 주동적으로 앞에 나서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룟유다는 예수 전도단의 돈궤를 책임지고 있으면서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고 돈을 꺼내어 생색내면서 사용하는 자로,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 요 때다 싶어서 여인을 공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를 내었다는 말은 분개하였다는 말인데, 단순히 아쉬운 마음 정도가 아닙니다.    노기가 충천하였다는 말입니다.  여인의 행동은 전혀 무가치한 일이라고,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정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차라리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 아니냐고 한 것입니다.  그 여자를 책망하였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만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한 일을 좋은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시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이 소원하시고, 목적하시는 일에 적합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일생에 그렇게 자주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부어드리는 일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할 수 있는 일과 가난한 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일생에 정말 한번이나 두 번이나 결심하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항상 할 수 있는 것과 일생에 한두 번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신 동안에 이제는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요, 절박한 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건이나, 어떤 행동을 가지고도 당신의 죽으심, 십자가의 죽으심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사건이라고 칭찬하시고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관련된 어떤 사건이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을 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보면 풀리게 됩니다.   십자가는 성경의 마스터키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경청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고 향유를 부었는지는 모르나 우리 주님은 당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  오빠를 살려주신 은혜,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말씀을 가르쳐주시던 말씀의 은혜, 그리고 가장 힘들 때에 함께 해주신 은혜에 보답하려고 향유를 부어드린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으로 당부하셨습니다.  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한 연예인이 7억의 결혼선물을 받고 흥분하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강남에 있는 어떤 뷰티살롱에서 화장하고 있는 아가씨에게 꽃다발이 배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10번의 꽃이 배달되었습니다. 열 번째에는 작은 봉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봉투에는 자동차 열쇠, 잠시만 나와 보라고 하여 나갔는데, 벤츠 S500 2억 원, 자동차 트렁크에 꽃다발이 가득하였는데, 한 작은 박스 안에 7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시가 5억 원이었습니다.  “나와 결혼해줄래”라는 편지와 함께 받은 선물이 7억 원이었습니다.  세상에 한 여자를 사랑하여 청혼할 때에도 7억이라는 선물을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글쎄요.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닙니다.  돈 많다고 돈 장난하는 사람처럼 생각되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생명을 구원하시고, 사랑하는 예수님을 위하여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부어드린 것은 그 당시로서는 최선을 다한 헌신이요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정말 귀한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리아의 300 데나리온 향유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은 합리적인 가치를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된다면 최선을 다하여 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값으로 환산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하여 죽는다는 것은 낭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하여 대신 죽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만한 사람이나 됩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있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용서해달라고 하기에 너무나 뻔뻔스러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계획은 그 가치를 따질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죽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귀머리거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최우선순위에서 행동합니다.  

인도의 성자인 마하트마 간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인도인들에게는 성자 그 이상이요, 국부 그 이상이었습니다.  1948년 한 미치광이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 때 인도 전역에서 그를 따라 죽은 이들이 많게는 200만 명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간디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이 100만 명이나 된다는 말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세상에서 그저 존경하는 한 분, 자기 나라를 위하여 헌신적인 한 분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동반하여 죽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죽은 이들이 모두 다 구원받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어느 정도 헌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참된 헌신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결코 300 데나리온 정도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생에 단 한번 옥합을 깨뜨리는 심정으로 주님을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여인의 한 일을 칭찬하면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칭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와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또 한 사람의 마리아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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