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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이웃을 생각해 보라!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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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웃을 생각해 보라! (막 2:1~12)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맑은 영혼을 사모해야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기댈 사람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딘가에 기대어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내 지친 영혼을 기대어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힘든 영혼을 기대고 받아줄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한없이 헤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내가 기댈 대상이 못됩니다.  그 사람만큼은 내 힘든 영혼을 받아주고 평안함으로 기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아닙니다.  그도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하겠지만 그 이상은 안됩니다.  그도 어느 시간까지는 가능하겠지만 영원히 나로 하여금 그에게 기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길이 없는 것입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만큼 지치고 고달픈 영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지친 영혼들이 쉴만한 곳이 없다는 것입니까?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게 나의 지친 영혼을 기대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지치고 곤고하여 쉴 곳을 찾지 못한 영혼들을 항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오늘 주님의 전을 찾아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품에 안기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영혼에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내 삶에 참된 평안과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밖에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천천히 변합니다.  나무도 계절도 다 천천히 변합니다.  아주 변화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갑자기 변합니다.  우리가 "조직을 변화시킨다, 나라를 변화시킨다, 기관을 변화시킨다, 제단을 변화시킨다" 라고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힘듭니다.  습관을 변화시킨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서서히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갑자기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느 날엔가, 어느 순간엔가 그 마음에 갑자기 변화가 일어나기만 하면 그렇게 변하기가 힘들었던 행동도 습관도 쉽게 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지금 무엇이 변합니까?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영원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네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  어떤 사람은 살구나무가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끓는 가마솥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살구나무에 봄이 오듯이 내 말이 절대로 이루어지리라.  나의 법도를 따르지 않는 백성들에게는 무서운 재앙과 심판이 오리니 내가 가증한 것들을 멸할 날이 오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알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습니다.  오늘 주님이 묻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느냐?  무엇이 들리느냐?"
"나무토막 같은 것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보입니다."
"너는 정말 무엇이 보이느냐?"
"예, 내 이 곤고한 영혼에, 내 이 힘든 영혼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불과 구름기둥이 보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영안이 열려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지친 영혼이 기댈 수 있는 아버지의 품이 보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우리의 영혼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의 말씀이 들려지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내가 인정해서 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변화라는 것이 일어나도 좋고 안 일어나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과 좌절과 죽음이 하나님의 변화의 영으로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 변화가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에 성령의 생기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변화를 원합니다.  그런데 변화라는 것이 사실 알고 보면 간단합니다.  마음만 변하면 행동도 태도도 말들도 쉽게 변합니다.  세상 것은 참으로 변하기 힘들지만 마음은 갑자기 변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예배를 드리다가, 은혜를 받다가 여러분의 심령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초대교회에 저들이 기도하다가 심령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진동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 심령에 감화와 감동과 떨림이 주체할 수 없이 밀려왔다는 말입니다.  그 감화와 감동과 떨림이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시대의 사제의 길을 가고 있는 제가 깊이 깨닫고 고백하게 되는 것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설교를 하고,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를 하지만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여러분이 30년, 40년을 살아보셨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죽어 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끝까지 안 변하고 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내 자식이 변합니까?  변화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에는 어떤 공식이 확실히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공식을 붙들고 모든 아픔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어느 정도 진전되고 깊어지고 믿어지면 우리는 뭔가를 그 분을 위해서 바꾸고 싶어하는 가느다란 욕망과 희망이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변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깊은 사랑과 신뢰와 관계가 진전되고 회복되고 깊어지면 거기서부터 변화가 시작되는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상대를 기쁘게 해주고 싶고,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고, 즐겁게 해주고 싶은 그런 욕망의 불꽃, 그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오늘 여러분 속에 이 아름다운 불꽃이 타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불꽃이 점화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다가, 말씀을 듣다가 갑자기 여러분의 심령에 "그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 그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 그 사람 앞에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 이런 욕망의 불꽃이 강하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 앞에서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으십시오.  사물을 다른 각도로 보려는 내적인 열망을 내 속에 불러일으키십시오.  내가 고난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히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히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다시 말해 우리가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히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식이 있습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더 겸손하십시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는 약간의 겸손함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 교회 안에서 함께 교제를 하면서 살다 보면, 가끔 함께 믿음의 길을 걷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버리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함께 신앙 생활을 하지만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아주 힘들게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여정에서 이렇게 힘들어하는 사람, 특히 믿음을 떠나 죄에 빠진 이웃들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한 번이라도 만나보기 위해서 집 앞에 몰려들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몹시 피곤하셨지만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을 조금도 귀찮게 생각하시거나 짜증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에 언제나 응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붕에서 소리가 나더니 구멍이 뚫리고 지붕 위에서 들 것에 실린 환자가 내려옵니다.

여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데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시다는 소문이 났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듣기 원해서 물밀 듯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예수님을 만나 뵙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중풍병에 걸려서 마음은 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병이 났을 때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위로도 하고 동정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환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많은 사람들이 귀찮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바쁘다고 해서 잊어버렸던 그를 잊지 않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모릅니다.  어쨌든 그 사람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싶어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이 한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에게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이 병든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 온 것이 아닙니다.  시간적인 여유가 철철 넘쳐도 이런 일을 귀찮아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세상입니다.  그들은 중풍병으로 쓰러진 이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친구를 위해서는 이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계신 집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발을 들여놓을 틈새도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아이구 안되겠다.  이 친구는 예수님을 만날 운명이 아닌가 보다" 하면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여러분, 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찾지 않으니까 길이 없습니다.  쉽게 포기하니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찾고자 하면 언제나 방법은 있게 마련입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길은 열리게 됩니다.

그들은 그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헌신입니다.  보십시오.  네 사람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메고 왔습니다.  환자는 한 사람인데 이에 관계된 사람은 다섯 사람입니다.  네 사람이 이 사람을 메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이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길을 찾았습니다.

정문으로 들어 갈 수 없으니 창문으로 들어갈까?  창문으로도 들어갈 수 없으니 어떻게 하나?  그러다가 연구해 낸 것이 지붕을 뚫고 구멍을 내서 그곳으로 환자를 내려보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들 것에 눕혀서 아래로 내려보내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는 절대적인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 한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희생이 있었습니다.  이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절대적인 섬김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한 사람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데는 이러한 절대적인 헌신과 희생과 섬김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지붕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한 사람이 들 것에 눕혀서 내려옵니다.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의 눈길이 이 한 사람에게 멈추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사람, 거동도 하지 못하는 이 사람을 향해서 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랬더니 이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서 곧 바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나갔습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적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런데 기적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이 일어나는데는 반드시 그 배경이 있습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5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보십시오.  본문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저희의 무엇을 보셨다고 했습니까?
"믿음을 보시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시고 그들을 치유하실 때에 개인의 요구를 살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체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할 존재로 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그 한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 사람의 간구하는 것을 들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건 앞에서는 "그 환자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이 있으면 삶의 자세가 적극적이 됩니다.  적극적인 사람이라야 일을 합니다.  소극적인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이 시대는 적극적이고 믿음이 있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이 한 믿음이 방황하는 내 이웃을, 우리의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큰 일을 한 사람들은 큰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크게 믿으면 큰 복을 받고, 적게 믿으면 적은 복을 받습니다.  아무 것도 안 믿으면 어떠한 복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기억하십시오.  믿음대로 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하늘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큰 믿음으로 하늘의 큰 복을 받아 여러분의 삶의 지경이 넓혀지기를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못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언제나 그 삶의 자세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냈습니다.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 명은 한결같이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열 명의 사람들은 아주 절망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곳의 성곽은 높고 견고하고 거기 사는 아낙자손은 키가 큰 거인인데 아마 그들이 우리를 보면 메뚜기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땅은 차지할 수가 없다."
이 보고를 들은 백성들이 얼마나 낙심하고 원망했습니까?  그들은 절망했습니다.  다른 지도자를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같은 곳에 가서 똑같은 것을 보았지만 그 관점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고 성곽이 견고하고 거기 사는 아낙자손이 키가 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면 반드시 지키십니다.  물론 거기 사는 아낙 자손이 우리보다 키가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지키시던 신이 떠난 지 이미 오랩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두려워 말고,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사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의 앞날에는 어려움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이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태산 같은 난관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산을 넘든지, 돌아가든지, 넘지도 못하고 돌아가지도 못하게 되면 힘들고 시간이 걸려도 산을 뚫고 터널을 만들면서 산 속의 금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수아의 인생 여정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렵다는 것과 못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산다고 해도 우리의 인생 여정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 있으면 능치 못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런 확신이 있을뿐더러 열정이 있습니다.  내가 이런 확신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내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어떤 약을 썼더니 신비할 정도로 나아서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이 나와 꼭 같은 병에 걸렸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내가 먹고 낳은 약을 소개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깊이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함을 받아서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이 되어 이런 자유와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쁘고 감사한데 아직도 내 주변에 주님을 모르고 믿지 않아 그 심령이 죽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당당하게 내가 믿는 이 복음에 대해서 증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에게는 이 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데는 동정심이 있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환자들이 찾아오면 한 사람도 그냥 돌려보내신 적이 없습니다.  다 고쳐 주셨습니다.  어려운 자리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긍휼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프랑크니조마이입니다.  이 말은 창자가 끊어질 듯이 아파하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이 땅에 베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바로 이 스프랑크니조마이를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서 말씀합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라"

사랑하는 여러분, 중풍병 환자를 들 것에 메고 온 사람들은 중풍병으로 고통 당하는 친구를 볼 때 팔을 들려 해도 들려지지 않고 다리를 움직이려 해도 움직여지지를 않습니다.  얼굴 한 쪽이 마비가 되어서 침이 줄줄 흐르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이 친구를 볼 때 "만일 내가 저런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이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께만 가면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이 환자를 도운 것입니다.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스프랑크니조마이, 창자가 끊어질 듯이 아파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인들을 용서하시고자 그 죄의 대가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셨다.  이 아버지의 마음을 아십니까?  이것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동반한 마음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다가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마음의 소유자가 되셔서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를 알지 못하여 구원받지 못한 내 이웃과 형제를 향하여 창자가 끊어질 듯이 가슴 아파하는 안타까운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풍병자를 도왔던 그들은 마음을 합해서 도왔습니다.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일할 때에는 마음을 합해서 도와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 내려오는 말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 들 수 있는 종이지만 함께 들면 큰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하고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나를 너무 내세우게 되면 협력이 잘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들이 중풍병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것이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환자를 들 것에 눕혀서 오자면 수평으로 눕혀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의 키가 똑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키가 큰 사람, 키가 작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키가 큰 사람은 들 것을 드는데 높아졌을 것이고 키가 작은 사람은 낮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자의 수평을 위해서는 키가 큰 사람이 아래로 손잡이를 낮추었을 것이고 키가 작은 사람은 들 것의 손잡이를 높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 쏟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데려오는 일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들 것에 환자를 눕히고 들고 걸어오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키가 큰 사람은 다리가 기니까 성큼 성큼 걸어가는데 키가 작은 사람은 숏 다리라서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키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보조를 맞추려니까 빠른 사람은 속도를 늦추고, 느린 사람은 속도를 더해서 보조를 맞췄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서로 양보하고 존경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의 성도들의 생각이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의 방식이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다 다르고 주장도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은혜롭고 화평하게 지낼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서로가 협력할 수 있습니까?
 
비결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가 양보하고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한다면 우리 교회는 화목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사회에 아름다운 신령한 노래로 감동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소문난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협력이 필요합니다.  협력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협력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가는 멋있는 교회, 멋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이 중풍병 환자를 예수님이 계신 집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집안에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포기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기 시작했습니다.  남의 집 지붕을 뜯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빈집도 아니고 집안에는 사람이 꽉 차 있는데 어떻게 지붕을 뜯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무례함을 개의치 아니하고 남의 집 지붕을 뚫었습니다.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 귀한 일, 보람된 일,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쉽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좋은 일 일수록, 선한 일 일수록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
 
선한 일을 하는데는 반드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힘쓰면 반드시 열매 맺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중풍병자의 병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어떻게 도울까?  중풍병자를 만병의 의사이신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입니다.  데려오면 병을 고치시는 것은 주님이 하십니다.  주님이 죄를 사해 주시고, 육신의 병까지 고쳐 주시고, 온전케 하십니다.

내가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녀, 내 친구, 내 이웃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웃을 주님께 모시고 올 수는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고침을 받고,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려움이 있어도 인내하므로 주님께 데려오시면 주님께서 그 심령을 고쳐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기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의 주변에 반신불수된 영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몸은 건강한데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으면 반신불수입니다.  지식은 많은데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으면 반신불수입니다.  재물은 많은데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으면 반신불수입니다.  권력은 있는데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으면 반신불수입니다.  이런 사람을 구원하는 길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반신불수를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주님께로 데려와야 합니다.

우리가 다음 주일에 귀빈초청축제로 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 그 한 영혼을 구원하고자 합니다.  이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못할 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병든 심령을 고치지는 못해도 예수님께로 데려 올 수는 있습니다.  빌립도 나다나엘을 만나 예수님 이야기를 했더니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긴 논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나다나엘을 전도한 것은 한 마디입니다.
"와 보라"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고 우리는 내 이웃을 주님께로 데려오면 됩니다.  내가 데려올 한 영혼을 마음에 정하시고 간절히 기도하시고, 최선을 다 하시면 반드시 놀라운 열매가 맺게 될 줄 믿습니다.

로마의 유명한 바티칸 대성당 뮤지엄에 가면 미켈란젤로의 걸작품 피에타상이 있습니다.  높이 171cm의 대리석 작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미켈란젤로가 마리아의 옷자락에다가 서명한 그가 특히 아낀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수년전 이 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철책선을 뛰어넘은 망치를 든 한 청년에 의해 무참하게 훼손된 일이 있었습니다.  박물관은 이 작품을 포기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이 작품을 회복시키기 위한 세계적인 조각가 팀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회복작업에 착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의논한 끝에 우선 몇 달을 깨어진 이 작품을 감상하는 일에 보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통해 미켈란젤로의 눈과 가슴을 갖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들의 눈이 미켈란젤로의 눈이 되어 이 작품에 나타난 마리아의 연민, 고통과 환희를 보고, 그의 가슴이 되어 그 연민을, 그 고통을, 그 환희를 함께 느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이 작품을 거의 완벽하게 재생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교회가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상처 나고 깨어진 형제, 자매를 붙들고 그를 빚어 만드신 하나님의 눈과 가슴이 되어 그의 고통과 비참을 함께 느끼며 마침내 그를 도와 그를 회복시키는 작업.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며 우리의 회복의 사역인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십자가의 사역입니다.
 
우리의 죄와 고통을 함께 느끼시고 마침내 우리 죄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회복하게 하신 주님의 사랑.  이 사랑에 빚진 자가 되었다면 이제는 우리도 들것을 들고 혼자서는 올 수 없는 내 이웃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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