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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으로서의 나 (롬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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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으로서의 나 (롬 6:1~11)


미국의 16대 대통령[아브라함 링컨]하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흑인 노예 해방이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업적에 못지않게 먼저 그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 주목해야합니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자기 구두를 손수 닦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습관은 자연스럽게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대통령이 되어서 날마다 자기 구두를 닦는 모습을 보고 어느 날 보좌관이 넌지시 직언을 했습니다. “각하, 대 미국의 대통령이 어떻게 구두를 손수 닦으십니까?”하면서 말려 보려고 했습니다. 그때 [링컨]은 능청맞게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아니, 그럼 미국 대통령이 남의 구두를 닦아 줍니까?”라는 대답으로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하는 재치를 보여주었습니다. 농담 속에서 링컨의 겸손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이나 대통령이 된 후에도 늘 겸손했습니다.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거만한 사람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인격 속에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심이 깊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에서 나이가 들고, 지위가 높아진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겸손한 게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에 있어서 가장 기본은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존재라는 기본의식에서부터 모든 인격이 하나하나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내가 알려면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아는 건 아는 거고 모르는 건 모르는 겁니다. 체면불구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거짓과 위선이 있어서는 안 되고 순수하고 순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알려면 좀 더 나아가서 끝없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무엇이 되어야 하겠다. 더 가져야 하겠다는 마음으로는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즉, 시기나 질투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고 깨끗한 마음이 되어져야 비로소 나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정직하게 욕심을 버리고 깨끗하게 나를 보고 내가 알려고 노력해도 나 혼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무리 눈이 밝은 사람도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비추어 볼 때만이 나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이“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기 자신에 대 한 지식이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면 나를 모릅니다. 흔히 살아가다가 허무한 일을 만나거나 그런 사람들을 볼 때“인생무상”이라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 의미에 동조하십니까?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합시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없이 세상을 볼 때나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을 보면 무상이 맞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이라면 충분히 이러한 탄식을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니“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교만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그럴 수밖에요. 불쌍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목적도 없고 목표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생, 그야말로 무상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 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인생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나는 누구입니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 신앙인으로서의 나라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죽은 나>와<살아 있는 나>로 설명을 합니다. 그 결론적인 말씀이 11절의 말씀입니다.“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자, 그럼 보십시다.

먼저 죽은 나에 대해서 밝힙니다. 그 사실을 본문은 십자가에 못 박은 옛사람으로서의 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을 기준으로 해서 옛날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의 나는 누구였습니까? 죄와 사망과 정욕과 진노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이 옛 사람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되었던 것을 잊어버렸을 때 은혜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정말 하찮은 존재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우리가 실수하지 말아야 할 것이 그 옛사람의 생각에 마냥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사람인가 아닌가는 여기에서 판가름 납니다. 신앙의 사람은 옛사람의 모습에서 겸손으로 결과를 맺지만 신앙적이지 못한 사람은 옛사람의 모습에서 교만의 조건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 “내가 지금 뭘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전직이 무엇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전직 회장, 전직 사장, 전직 교수, 전직 장관...이렇게 말합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러니 어쩌란 얘깁니까? 오늘 나를 소개하면서 전직엔 내가 이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것에 의해서 나를 평가해 달라는 속셈이거든요. 여러분, 과거에 의해서 오늘을 생각하는 것처럼 비참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잘 됐던 못 됐던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입니다. 옛 사람에 무슨 미련이 이렇게도 남아 있습니까? 이것에서 깨끗이 떠나야 교만하지도 않고 은혜를 잊지도 않습니다.

[A.W. 토저]라는 신학자가<내 자아를 버려라(WHO PUT JESUS ON THE CROSS)>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첫 번째 챕터에서<자기를 사랑하면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명제를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라고 하는 우상의 틀에서 벗어날 것을 종용하면서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옛 자아를 완전히 버리는 것은 자아라는 옛 생명에 헝겊조각을 붙여서 수선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구원 받은 자로 불사조의 생명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옛 자아를 완전히 멸하느냐는 것이 문제해결의 열쇠인데 그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이해가 가십니까? 

옛날 어릴 때 제가 자랐던 시골에는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제 또래의 아이들이 새 옷을 한 벌 얻어 입는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날이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설날이라든가 추석, 아니면 소풍가는 날 내지는 수학여행 가는 날이나 되어야 새 옷 한 벌 얻어 입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이 형님들이 입던 옷을 물려받아서 입습니다. 다행히 형님이 적으면 그나마 새 옷 같은 옷을 입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보통 아이들을 생기는 대로 나았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그 옷이 얼마나 질겨서 몇 사람씩 입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닳을 대로 닳은 옷은 얼마입지 않으면 구멍이 나고 맙니다. 그러면 특히 무릎이나 팔꿈치에 어머님이 헝겊을 대고 기워줍니다. 그러면 그 옷을 좋다고 또 며칠을 거뜬하게 입고 돌아다녔던 또래들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한 헝겊조각을 대고 기워도 그것은 헌 옷일 뿐입니다. 새 옷하고는 여러 가지에서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가끔씩은 금방 헐어져버릴 옷이지만 임시방편으로 그럴싸하게 기워 입히시던 어머니들의 손길이 생각나곤 합니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딴 동네이야기로 알아듣지 자기네 엄마 아빠가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하여간 옛 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헝겊조각을 대고 적당히 기워 입는 정도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분명한 이야기를 [A.W. 토저]가 그 책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모습이란 완전히 죽어져 없어져야 함을 이야기함입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나라는 정체의 또 하나는 현재의 모습입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살아 있는 나를 아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오직 은혜 안에 있는 나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자유인이요, 은혜 안에서 사명을 받은 나라는 사실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나 자신이 볼 때는 쓸모없지만 하나님이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 스스로는 아무런 할 일도 없는 존재였으나 하나님이 나를 하시고자 하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내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나에게 현재라는 시간은 기회이자 사명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현실에 감사하며 살기 위해서는 옛사람인 나 자신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빠져 나와야 됩니다. 내 과거, 내 신분, 내 업적을 깨끗하게 포기하고 해체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냐 하는 것과 정말 가능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까? 그게 힘이 듭니다. 내가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워요. 

그래서 오늘 성경이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바로“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씀입니다. 8절에 보십시오.“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율법을 향하여 죽었고, 죄를 향하여 죽었고, 정욕을 향하여 죽었고, 나의 증오와 시기 욕심 다 십자가 밑에 묻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고 물으면 그 답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는 더블 이미지(Double Image)가 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쳐다 볼 때마다 두 가지를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십자가는 나 자신의 죄인 됨을 계시해 줍니다. 내 죄는 십자가에 죽을 만큼 큰 죄요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겁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나라는 존재는 십자가의 엄청난 값을 지불해서 구원할 만한 존재라는 겁니다. 나는 아니라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내가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이러한 정체감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정말 귀한 고백으로 들려줍니다. 

고전15:10절을 기억하십니까?“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이것이 십자가 밑에서 신앙인으로서의 나를 발견한 자의 고백일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 9장에 보면 다윗 왕이 사울의 괴롭힘을 당하다가 사울이 죽고 각고 끝에 나라를 평정한 다음에 정말 어려움을 겪을 때 비록 자기를 괴롭힌 사울의 아들이지만 자기의 곁에서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었던 요나단을 생각하고는 그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의 핏줄이 없나 살펴보았더니 [므비보셋]이라는 절름발이 하나가 붙들려왔습니다. 족보를 따지면 자기를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사울의 손자이니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을 생각하면 사랑하는 친구의 아들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사울의 손자로서가 아니라 요나단의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그러고는 왕자처럼 궁궐에서 함께 살고 먹게 해주었습니다. 그 때에 [므비보셋]이 한 말이 정말 가슴을 파헤칩니다.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자기 할아버지 사울이 다윗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개만도 못하게 취급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입장은 친구인 요나단을 보고 요나단의 아들이니까 곧 내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감입니다. 사울을 향한 마음은 옛 사람으로 이미 죽어버렸고 요나단을 향하여는 은혜의 마음으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복수의 마음은 죽어 없어지고 은혜에 대한 보답의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으로서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의 나의 모습이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어떤 모습입니까? 죽어야 할 것에 마땅히 죽어지고 살아야 할 것에 마땅히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직도 죽어지지 못한 것이 있고 나 스스로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법을 택하시고 살아나야 할 것이 아직도 살아나지 못하여 삶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서 은혜 속에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인으로서의 나 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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