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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자녀들이 주님을 발견케 합시다 (시 67:1~7, 요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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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이 주님을 발견케 합시다 (시 67:1~7, 요 14:25~26)


5월은 우리 교회가 매우 중요하게 지키는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주일이 있고 어버이주일이 있습니다. 교회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가정의 행복입니다. 가정의 행복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요,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는 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로 지키며 어린이들의 소중한 가치를 인식하고 책임 있게 잘 길러야 함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다음 주일은 어버이주일로 우리들에게 소중한 사랑과 희생을 지불하면서 오늘까지 잘 길러주신 어버이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를 “샌드위치 세대”(sandwich generation)로 부르게 됩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으며 길러야 할 자녀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또 늙어 가시는 부모님을 동시에 바라보며 어떻게 잘 모실 수 있을까를 염려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5월 둘째주일을 “어버이날”로 정하여 ‘어머니’와 ‘아버지’를 동시에 기쁘게 해 드리는 전통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나 서양 국가들은 5월에는 ‘어머니날(Mother's Day)로 지키고 ’아버지의 날(Father's Day)은 6월에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날 보다는 어머니날이 언제나 더 푸짐하고 축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아마 아버지 보다는 어머니들이 자녀들을 기르는데 사랑의 손길이 더 많이 미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에는 어머니 같은 아버지들이 많아지고 아버지 같은 어머니들이 많기 때문에 20-30년이 지나면 분위기가 바뀌어 지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어머니들은 언제나 자식들을 돌보는 분들(care-givers)이었습니다.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돌봐주고, 무조건 인정해주고, 무조건 세워주시는 분들이 어머니들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어머니날”을 크게 축하하기로 예배위원회에서 결정을 했습니다. 가장 연세가 높으신 분에게 선물을 드리고, 자녀를 낳은 분들에게 장미꽃을 달아주며 축하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위원이 제안을 했습니다. 스미스(Smith)라는 주일학교 교사를 언급하면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30년을 주일학교 교사를 해서 그 교회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미스 스미스 선생을 통해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그분은 결혼을 하지 않아서 아이를 낳지도 못한 했습니다. 젊은이들의 신앙의 어머니인 그분에게 신앙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장미꽃을 달아드리고 감사한 마음을 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해의 어머니날은 미스 스미스 선생에게 가장 행복한 어머니주일이었다고 고마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부모역할을 해준 모든 분들 예를 들면 우리의 부모님들, 할아버지, 할머니들, 양부모님들의 사랑과 돌봄이 있기에 이 세상은 더 좋은 세상, 더 좋은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늘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 노릇하는 것이 제일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젊은 세대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아이를 낳지 못해서 근심하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녀는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축복의 선물 중 하나이지만 부모노릇하며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제 집사람이 산바라지 한 달을 하고는 “야!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며칠 동안 딸네 집에 있는데 이제 4주된 아이가 밤 2시에 일어나서 한바탕 울고, 4시에 일어나 한바탕 우는데 온 집안이 잠을 설쳤습니다. 김태헌권사님 말씀대로 아들네 집에 갔더니 6주된 손녀 옆에 6명의 시종이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아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아이 하나를 둘러싸고 시중을 드는데 “응애” 소리만 나면 6명이 모두 달려들었습니다. 갓난아이 때만 그런 것이 아니잖습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다닐 때까지 자녀들을 위해서는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저는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I do not give to you as the world gives.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and do not be afraid.)(요 14:27)

우리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사랑하는 제자들이 평안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두려움 가운데 살거나 어떤 시련이나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라는 소망일 것입니다.

나이가 자꾸 먹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일 년에 한두 번 미국에 가서 아이들 집을 방문하고 떠날 때면 눈물이 납니다. 한창 자랄 나이에 유학한다고, 개척교회 한다고 부모노릇 제대로 못한 죄책감 때문에 눈물이 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시 못 보면 어떻게 하나하는 불안함 때문에도 눈물이 납니다. 이번에도 전에 섬기던 교회의 장로님 내외분이 공항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딸네 집을 나설 때 제가 또 우니까 장로님이 “편안히 잘 살면 되잖아요.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위로해 주었습니다. 평안히 잘 사는데 왜 염려하시느냐는 위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평안하게 잘 살면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것을 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외적 평안보다는 세상이 흔들 수 없는 내적평안(inner peace that the world could not shake)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이 내적평안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부모들은 험한 세상으로부터 자녀들을 완전하게 보호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도 교통사고로 자녀를 잃은 분을 만났습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공부도 잘 했답니다.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해서 다니는데 어느 날 퇴근을 하다가 질주하는 차량과 충돌하여 목숨을 잃었답니다. 부모는 여유가 있어서 아들에게 온갖 혜택을 다 주었습니다. 유학까지 보내서 성공의 길에 들어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생명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부모는 한계가 있습니다. 

요즘에 “helicopter parents”(헬리콥터 부모)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자녀들을 과잉보호하는 부모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족집게 과외는 기본이고, 심지어 취직할 회사까지 부모가 선택해줍니다. 어떤 부모는 취직 인터뷰까지 집에서 예행연습을 시킨답니다. 부모의 과잉보호는 자녀들의 위기능력을 감소시킵니다. 아무리 부모가 자녀 곁에서 과잉보호를 하며 지켜주려 해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암으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부흥회에 참석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생명을 다해 키웠는데 암으로부터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조승희군 부모도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이 평안 가운데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을 위해 부모가 원하는 모든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All I want is for our children to be happy).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위해 원하는 것이나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원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내적 평안입니다(The peace that the world can neither give nor take away).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예수님에게서 배웁시다.

첫째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그들이 누구인지(who they are)를 가르쳐야 합니다. 내적평안을 갖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들로 하여금 분명한 자아의식입니다. 자존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Sweet Honey in the Rock”이라는 흑인 가수 여성그룹이 있습니다. “바위 위에 있는 달콤한 꿀”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불러서 히트한 노래 가운데 “No mirrors in my Nana's House”(나의 할머니 댁에는 거울이 없다)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룹 멤버 중 하나가 그 노래를 만든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그녀의 친구 중 하나가 매우 가난한 동네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 자랐습니다. 할머니 댁도 너무 가난해서 집안에 거울이 없었습니다. 친구가 물었습니다.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모습인지 어떻게 아니?” 친구는 말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옷을 입고 머리를 빗고 할머니에게 갑니다. “할머니, 나 어때요?” 그러면 할머니가 말해줍니다. 나나는 매우 아름답고, 피부가 너무 곱고, 황금머리도 너무 예쁘고, 태양이 키스한 피부 같으며, 눈은 은빛 찬란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나의 나나(할머니 애칭)집은 거울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나를 사랑하는 할머니의 눈을 통해서 나를 봅니다. 할머니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노래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렇습니다. 손녀를 사랑하는 할머니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예쁘기만 합니다.

자녀들에게 주는 선물 가운데 가장 큰 선물은 자녀들의 머리 속에 채워진 자신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없애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사랑받는 사람인가를 알게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돌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미국의 어느 마을에 큰 홍수가 났습니다. 어느 부모가 홍수피해를 복구하는 동안 어린아이를 삼촌댁에 보내서 돌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편지 한 장을 손에 쥐어 어린아이를 돌려보냈습니다. “아이를 돌려보내니 차라리 홍수를 보내라”는 메모였습니다. 홍수를 당하는 것이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는 표현입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Lewis Grant라는 사람은 “Sunset fatigue"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아빠들이 직장에서 돌아오면 가장 사랑하는 어린자녀들 때문에 너무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기르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 자녀들에게 그들이 누구인지를 말해줄 때 내적평안을 누립니다. 

둘째로는 자녀들이 책임감을 높여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이 꼭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자녀들이 귀엽다고 책임감을 키워주지 않으면 훗날 슬피 울며 후회할 날이 있습니다.

“Beth Martin's Pretty Mother”(베티 마틴의 예쁜 엄마)라는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티의 엄마는 매우 예뻤습니다. 그러나 베티의 아빠가 죽기 전까지만 예뻤습니다. 베티 아빠가 죽은 다음에는 큰 농장을 엄마가 관리해야 했고 베티를 혼자서 길러야 했습니다. 베티 엄마는 베티를 잘 기르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비싸고 좋은 옷을 사다 입혔고, 좋은 교육을 시키고, 음악 개인교습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일을 했습니다. 엄마는 베티에게 집안일이나 농사짓는 일을 도와달라고 한 번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숙제를 하거나 음악을 연습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베티는 좋은 아이였지만 그렇게 자라면서 게으르고 너무 과잉보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베티가 엄마의 얼굴을 보니 너무 검게 타버렸고 거칠어졌습니다. 마음이 아픈 베티는 의사에게 찾아가 엄마의 얼굴이 다시 예전처럼 예쁘게 회복될 수 있는 처방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의사는 베티에게 처방전을 써주었습니다. 엄마의 얼굴피부가 예뻐지는 비결은 베티가 엄마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는 것과 농장 일을 도와주며 엄마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주고, 예쁜 옷을 사서 선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티는 의사의 처방을 따랐습니다. 베티의 엄마는 곧 얼굴이 밝아지고 훨씬 예뻐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과잉보호되고 게으름을 피우도록 키우면 그 아이들이 훗날 불행해집니다. 자녀들이 가족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도록 길러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을 위한 부모의 잘못된 보호와 열심이 훗날 자녀들을 실패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매우 소중한 일이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을 인도하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해야 합니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Walter Wangerin은 어머니가 자신의 하나님을 어떻게 발견하도록 해주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아이의 신앙의 위기를 썼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자기 혼자만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고 느꼈답니다. 매주일 엄마와 함께 교회를 가면 다른 교인들은 모두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로 결심합니다. 교회 안에서 찾으려고 나섰습니다. 모든 주일학교 교실을 다 뒤졌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예수님이 안계셨습니다. 예배당 안에 있는 모든 의자들 위와 아래를 살폈으나 거기도 없었습니다. 목사님 방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몰래 들어가 보았습니다. 거기에도 안계셨습니다. 강대상이나 강단 뒤편에도 없었습니다. “혹시 여자 화장실에?” 그런 생각을 한 그는 몰래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도 없었습니다. 교회 안 어디에도 예수님은 안계셨습니다. 

월터가 성전 안에 들어가니 성만찬이 거행되고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신비했습니다. 엄마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돌아오는데 엄마의 얼굴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는 엄마 곁으로 가서 물었습니다. “엄마, 그게 무어예요?” 엄마는 그에게 엄숙한 분위기가 아들로 인해 흩어질까 해서 조용히 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래도 월터는 포기하지 않고 물었습니다. “그게 무어예요?” 그때 엄마가 대답합니다. “아들아, 예수님이란다. 내안에 지금 예수님이 계신단다.”(Son, that is Jesus. It is Jesus inside of me). 그때서야 어린 월터는 이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없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Jesus was not lost). 예수님은 엄마 안에 살고 계셨습니다(Jesus was living inside of his Mama).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우리의 자녀들은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분으로부터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영향을 받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Are there Jesus in your life?) 자녀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감지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원했던 것이나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원하는 것이 같습니다. 평안입니다. 평안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평안을 누리며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기를 바라는 소원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도 없는, 세상이 빼앗아 갈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야 합니다. 부모의 소중한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가장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이 가정과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을 키워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67편이 바로 그것을 고취시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민족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을 세우는 곳입니다. 부모의 사랑, 어머니의 손길 같은 사랑으로 이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아이들을 세우기 위해 온 정성을 기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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