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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부주일] 부모를 떠나 합하여 (창 2: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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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떠나 합하여 (창 2:20~25)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가정을 나타내는 단어 중에 깨어진 가정, 부부의 위기, 가정의 해체 등등의 단어는 가정생활과 부부 생활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우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적인 상황은 우리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지를 못합니다. 우리의 사는 이 세상이라는 땅은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에는 너무나 안 좋은 땅이란 말입니다.

남편은 피곤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고, 아내는 아내대로 가정일과 자녀일로 짜증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가 사랑하기 보다는 고독감과 단절감 그리고 권태감이 두 사람을 사로잡습니다. 더구나 맞벌이가 일상화 되어 가고 있는 요즘은 피차간에 피로감에 사로 잡혀 서로를 배려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실상 부부의 일생을 보면 엇박자 인생입니다. 출처 불명의 글에서 인용해 왔습니다.

20대, 여자들의 인생 주제는 사랑입니다.
같은 또래 남자들의 인생 주제는 취업입니다.

30대,
여자들은 살림살이와 자식을 빼면 인생이 없는 것처럼 삽니다.
여자들의 우주는 가정이며 가족이고,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오순도순 재미있게 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남자나이 30대, 직장과 사회생활에 몸을 바칩니다.
생존경쟁에서 능력을 발휘해야 하고 승진, 승급, 동기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성공과 출세라는 사회적 성장이 인생의 주제가 되는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여성들은 연애 시절의 달콤함을 평생 연장하는 것으로 알고 결혼하는 반면에,
남성들에게 결혼이란 가족 부양의 책임이며 가족을 디딤돌로 삼아 사회적 도약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식이 지배적입니다.

아내들이 남편에 대한 기대치가 가장 높은 시기에 남편들은 가족에게 쏟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거의 없는 엇갈린 인생주기에서 수많은 갈등과 반목의 씨가 뿌려지기 시작합니다.

40대, 남녀를 떠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른바 갱년기라는 시기가 찾아옵니다.
백날 젊을 줄 알았는데 아이들 키우고 먹고 살다보니 어느새 흰머리가 늘어가고 중년이라는 딱지가 붙습니다.
건강도 예전만 못하고 심리적으로도 허전하고 자기연민의 감정이 들기도 합니다.
사춘기의 심리와 비슷한 “사추기”, “나는 지금껏 무엇을 위해 살아왔나”, “나는 누구인가?”하고 자문하기 시작합니다.

여자들은 자식 키워봤자 다 품안의 자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살림살이에 대한 집착과 애착도 좀 덜해집니다.

가족관계 역시 잘하다가 한번 잘못하면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경험했으므로 열과 성을 다하기보다 욕먹지 않을 정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에 대해서는 이미 30대에 수없이 많은 기대와 실망과 좌절과 원망과 분노를 거쳤으므로 더 이상 아무 기대도 없습니다.

여자들의 40대는 관심 밖이던 동창회와 친목계가 서서히 지펴지기 시작합니다.
가족보다는 친구가 위로가 되고 동반자가 됩니다.

남자 나이 40대, 일벌레로, 돈 버는 기계로 살아왔다는 회한이 들기 시작합니다.
말이 좋아 가장이요, 산업역군이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자신들을 부려먹기만 했을 뿐..
정서적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는 외로움에 빠집니다.

50대가 되면 
부부 사이의 “따로국밥” 양상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여자들은 되도록 집에 있지 않으려 합니다. 여태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더 늙고 병들기 전에 세상 구경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것입니다.

남자들은 이때부터 가정과 가족이 소중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집, 내 집 뿐이리.” 
반찬이 없어도 집의 밥이 입에 답니다.

남편은 “집으로”, 아내는 “세상 밖으로”.... 
남편은 “섭섭함”, 아내는 “귀찮음”, 

30대부터 잠재해 있던 부부 사이의 엇박자가 이제는 눈에 보이는 “증세”로 나타납니다.
아내가 곰탕 끓이면 장기외출의 신호라는 농담도 그런 증세 가운데 하나입니다.

60대, 남자들은 가정과 가족에 대해 눈을 뜨고 보니 자식들은 솔솔 빠져나가고 이제 남은 것은 결국 “아내”뿐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마누라 의존도” 100퍼센트.

반면 아내는 자식들을 다 결혼시키고 “제대 군인”의 심정으로 자유부인을 꿈 꿉니다.

아내는 나가고 남편은 기다립니다.
30대 시절이 역전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아내들의 속 마음인 “늙은 다음에 보자.”가 현실화 되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일본에서 70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노후를 누구와 보내고 싶냐는 질문에 
70대 남성 69퍼센트가 “반드시 아내와”라고 답한 반면, 
70대 여성 66퍼센트가 “절대 남편과 안 보내”라고 했다.

퇴근하고 집에 와 봤더니 집이 이사를 했더랍니다. 주소로 안 알려주고....
그래서 그 다음엔 이사할 때 꼭 끼어 가려고 장롱 속에 숨었다가 마침 장롱 바꾼다고 놓고 가서 또 못 찾아 갔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안전한 피난처를 찾았다고 자랑합니다.
“개 집”에 들어가 있으니 개집은 꼭 챙겨 가더랍니다.

부부의 일생은 이처럼 엇박자입니다.
이토록 엇박자로 살아가며 위기를 맞고 있는 현대의 우리에게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1. 돕는 배필입니다. (20)

창2: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하와를 만드셨을 때, 이 둘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돕는 자로서의 배필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고난’이라는 말과 ‘함께하다’라는 말이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곧 이 말은 ‘고난을 함께 하는 관계’가 부부라는 것입니다.
부부의 존재 이유는 도우며 사는 사이입니다. 남편을 향한 아내의 일방적인 도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차간에 서로를 돕는 자들인 것입니다.
“도우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왕 도울 바에는 잘~ 도우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다음, 3장에 가면 아픔 가득한 한 에피소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뱀을 통해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넘어가게 만듭니다.

창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리고 우리들이 잘 알듯이 사탄의 유혹 앞에 하와는 넘어갑니다. 넘어 갔을 뿐 아니라 그것을 들고 남편 아담에게 갑니다. 그리고 먹게 합니다.
죄 짓는 일에 그들은 돕는 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분열왕국 시절, 아합이라는 북이스라엘에 전무후무한 악한 왕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의 악함이 이세벨이라는 여인과의 결혼을 통해 더욱 꽃이 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절정은 아합이 탐내는 포도원 농장이 있었는데 조상의 유업으로 팔 수 없다고 거절한 포도원 농장 주인 나봇을 이세벨이 거짓 죄를 덮어 씌워 돌로 쳐 죽이는 사건에게 드러납니다.
그렇게 손에 넣은 포도원을 아합은 기분 좋게 받아 들이는 모습을 통해 죄 짓는 일에 돕는 악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통당하는 의인 욥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루 아침에 모든 재산과 모든 자녀를 잃어버립니다.
그의 몸엔 종기가가 나기 시작합니다.
위로자로 다가왔던 세 친구는 어느새 비난자의 모습으로 욥의 앞에 서 있습니다.
그 때에 욥의 아내는 그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욥2: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오늘 이러라고 우리의 아내가, 그리고 내 아내의 남편된 자로 내가 있는 것이 아닌 줄로 믿으시면 아멘.

신약의 초대 교회로 넘어 옵니다.
땅을 팔아서 교회를 섬기는 바나바에게 영향을 받은 아나니아는 땅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둡니다. 그러나 절반을 따로 떼어 숨겼습니다. 사도들의 질문에 거짓으로 ‘전부’라고 말하고 결국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내 삽비라도 역시 동일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합니다.
차라리 애초부터 “절반을 바칩니다” 하고 거짓을 행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른바 “부창부수”입니다.

이런 모습과는 다른 부부들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살펴봅니다. 100세가 되어 얻은 아들 이삭. 쥐면 꺼질까 불면 날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그저 눈에 선한 모습입니다.
그런 아들을 하나님께서 제물로 바치라 하십니다. 청천벽력같은 이 소식 앞에 이 부부는 오히려 평온해 보입니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반대하고 원망하면 평온이 깨어질 수밖에 없을 터인데, 전적인 신뢰가 바탕이 된 모습으로 여겨집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부부를 살펴 봅니다.

롬16:3-4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생명까지라도 아끼지 않고 함께 협력하던 이 부부의 이름다운 이야기는 복음이 증거되어지는 땅 끝까지 빛나는 이야기입니다.


도우며 사시기 바랍니다. 잘~ 돕는 배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떠나야 할 것에서 떠나야 합니다. (24)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우리들의 가정과 부부생활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떠나야 할 것을 떠나지 못할 때 그것은 바로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1) 부모에게서 떠나 독립하십시오.

단순히 경제적인 독립만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독립하십시오.
독립이라는 단어는 책임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 슬하에 있을 때에는 부모님께 부속된 존재였으나 이제는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마보이”로서는 인격적인 부부의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마마보이”의 어머니가 혹시 계시다면, 당장 그 아들에 대한 모든 간섭을 멈추십시오.

효자와 마마보이는 다른 것입니다.
의사결정과정에서 부모 의존적이냐, 부모 배려냐의 차이를 이해하실 수 있다면 효자와 마마보이가 어떻게 다른지 아시는 것입니다.

2) 과거에서 해방되십시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흔히 우리는 “과거가 있는 남자 혹은 여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이런 단어를 사용할 때 조금은 부정적인 느낌으로 말하는 상황으로 묘사됩니다.

사실 과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과거 없이 현재와 미래가 어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과거에서 해방되시오, 과거에서 떠나십시오.” 라는 권면은 그저 단순히 “저주받을 과거”이기 때문에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떠나야 할 유일한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의지할 유일한 끈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체득해야할 그것에 있습니다.
저주받을 과거에서도 떠나십시오.
그리고 상대방의 과거에서 해방되십시오.
내가 새로워졌듯이 그도 새로워졌습니다.

3) 원망을 극복하십시오.

처음에야 모든 것이 멋져 보이고 예뻐 보이지만 살며 콩깍지가 벗겨지는 날 실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상처받습니다. 자신의 안목을 탓하기도 합니다.

우리 살아가면서 물때 오르듯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연스레 상대방을 향한 원망이 생겨나고 쌓여가게 됩니다.
부부 금슬이 좋아 보여 많은 이들의 시샘을 받는 소위 잉꼬 부부로 알려진 어느 한 가정인데, 알고 보니 참고 참고 또 참고, 쌓여 가는 그 원망 거리들들 해결하지 못한 채 축적되어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빵~”하고 폭발하는데, 그것이 황혼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내 안에 갖고 있는 원망을 극복하며 삽시다.
털어 내시길 바랍니다.


3. 합하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24)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특히 여기에 ‘합하여’이라는 말은 ‘접착제로 붙였다’는 뜻입니다. 물질도 하나가 되어야 하고, 목표도 하나가 되고, 삶의 희로애락도 하나가 되고, 생각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흔히 그런 말을 합니다. 결혼을 만드는 것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결혼하게 하기까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오히려 인내하는 것이 더 그 결혼을 지속케 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은 30%의 사랑과 70%의 인내로 구성된다고 했습니다. 유명한 사랑장,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펼쳐지는데 제일 먼저 나온 정의가 무엇인가 하면 “사랑은 오래 참으며..” 였습니다.

성경은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이고 사람이 결코 나눌 수 없는 신적인 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18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면서 만족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한 사람 만드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보기 민망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돕는 배필을 지으시고 그와 함께 거하게 하시면서 비로소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첫째는 남성과 여성은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창조의 질서를 말하는 것이고 둘째는 혼자서는 완전할 수가 없도록 지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부부는 둘이 한 몸이 된다고 말씀했는데 이는 뒤바꿔서 말하면 둘은 독립해서 존재하는 한 반쪽의 몸이라는 말입니다. 나와 너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너로 인하여 비로소 하나가 되고 너는 나로 인하여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결혼한 부부는 혼자 있으면 완전하지 못한 존재로 하나님께서 짝지워주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남성이 여성을 소유하거나 여성이 남성을 소유하는 종속의 개념이 없고 서로는 서로가 있어야지만 비로소 완성되는 평등한 동반자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부터는 두 사람이 아닙니다.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부터는 아내의 아픔이 동시에 나의 아픔이지 아내의 아픔만이 아닙니다. 이제 부터는 남편의 고난이 동시에 나의 고난이지 남편만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아픔뿐만 아니라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이이며 모든 것을 가장 유기적으로 화합해 가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는 이 사회에서 인간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가장 최소의 단위이자 완전한 단위입니다.

부부의 성공적 삶은 건강한 사회,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세계의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의 삶은 단순하게 획일적으로 지탱되지 않습니다.
부부는 젊어서는 정열의 대상으로서 중년에는 사업의 동반자로서 노년에는 좋은 말벗과 친구로서 그 사랑의 질을 달리해 가면서 하나님 앞에 이를 때까지 길게 살아갑니다.

“부부란 10대에는 서로가 꿈속에서 그리며 살고, 20대에는 서로가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가 환멸을 참으며 살고, 40대에는 서로가 체념하고 살고, 50대에는 서로가 가엾어서 살고, 60대에는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되니까 살고, 70대에는 서로가 고마워서 산다.”

부부주일을 맞이하여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가정 안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부부로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 경험하며 사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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