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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구합시다 (약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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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구합시다 (약 1:6)


(약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어느 한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는 가난한 농촌교회 교역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신앙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교회 생활에 너무나 익숙해 있었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언제나 형식적으로 해 왔고, 그러면서 그래도 대학까지 나와 1960년대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한국 학생이 거의 없었던 때인고로 학교에서는 유일하게 한국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당국으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장학금도 받아 무사히 졸업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969년이었습니다. 그 해 부활절에 그는 자신의 생애에서 일대 변화가 일어난 사건이 생겼습니다. 

미국의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입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외국 땅에서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얼마나 절박했겠습니까? 그때 그는 비로소 기도다운 기도를 하였습니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이 밤새껏 천사와 씨름하듯이 자신의 자신감과 교만함에 대하여 뼈저린 통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신비로운 음성을 들었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부르면서 "아무개 아무개야! 내가 왜 너의 머리를 상하지 않게 했는지 아느냐? 그리고 왜 너의 팔을 빼어 위골시겼는지 넌 아느냐?"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고는 해석이 나옵니다. '머리를 상하게 했으면 목사로서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머리털 하나도 상하게 하지 않았고, '왜 어깨를 뽑아 위골시켰느냐? 야곱을 생각해 보라'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지 전까지 얼마나 잔꾀를 부리며 자신을 믿었는가?' 네 어깨를 상하게 한 것은 이제 너는 다른 일 할 수 없도록 내가 그렇게 만든거야' 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후에는 이상하리만큼 마음 속에 평안이 숨어들었습니다. 다시 이번에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절로 찬송이 불러졌는데, 그 찬송이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라는 찬송이었습니다 하며 목사님은 말씀하셨답니다. 

지금도 나는 그 때의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감격의 눈물이 흘러지곤 합니다. 내 팔은 축도하기에 꼭 알맞은 45도의 각도까지만 올라갑니다. 이 팔로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정확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입니까!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 중에서도 많은 경우에서 기도 중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기도 중에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었고, 하나님의 뒷모습까지 보았습니다.

[출 33:22-23]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어떤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세례 문답할 때 기도를 하십니까?" 라고 물으면 웃음으로 묵묵부답으로 대답하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예' 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기도합니까?' 라고 물으면, '식사할 때 기도합니다' 라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어려울 때 기도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대답이 모두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식사할 때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어려울 때 기도하는 것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그런 때만 기도하는 것인가요? 그런 기도만 한다면 아직도 기도하는 법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고,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병들면 기도가 없어지거나 약해집니다. 한국교회가 선교 역사상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기도에서 찾게 됩니다. 일제치하 36년의 세월과 6.25 전쟁으로 폐허된 강토에서 한국교회는 기도로 살았습니다. 기도는 영적 부흥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기도가 꺼지거나 기도가 사라지면 개인도, 교회도 시험에 들거나 세속에 물들어버리게 됩니다. 

요즘 우리 한국 교회의 위기는 성장둔화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위기는 성장 둔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기도교육의 부족에서 기인된 것이 많다고 봅니다. 기도는 가르쳐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가르치고 배우면서, 기도는 가르치고 배우려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처럼 기도 많이 하는 교회도 없습니다. 한국 신자들처럼 기도 열심히 하는 나라도 없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왜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가? 

초대교회와 오늘의 현대 교회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초대교회는 모이면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오늘의 교회들은 기도는 하느라고 하는데,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의 올바른 지식이 없이 마구 하는데서 기인된 것이 많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기도생활에 문제를 기도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과 기도를 하되 바르게 하지 못하는 일이라 진단 하기도 합니다. 기도 없이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세속주의를 이겨낼만한 힘이 없습니다. 기도 없이도 교회 직분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 없이 출근하고, 기도 없이 잠자리에 들고, 기도 없이 전도하고, 기도 없이 봉사하고, 기도 없이 성경 배웁니다. 그 결과 나약한 신자들만 양산했습니다. 
그러니 사회로부터 믿는 사람들이 따돌림 당하고, 무시 당합니다. 

또 기도는 하느라 하는데, 기도의 능력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는 미신적인 기도를 많이 하는데 있습니다. 기도 많이 한다는 말은 기도를 오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자신의 인격의 고백이요, 삶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무조건 기도만 많이 하면 된다고 하여 인격적 기도가 못되고 주술적인 기도만 한다는 말입니다. 기도가 인격적으로 하지 못하는 기도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런 기도는 신비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아니면, 기복주의적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런 기도는 결국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기도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런 기도에는 자기 밖에 모릅니다. 이런 기도자는 아무리 많아도 가정과 사회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에 개인주의적이요, 신비주의적이요, 기복주의적인 것이 대부분이라는 지적도 합니다. 

기도는 오랫동안 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오래 해도 인격적인 기도가 아닐 때는 외식하게 되는 기도요, 그런 기도자는 자신의 인격과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주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저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온종일 성전에서 기도로 하루 해를 다 보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거리 모퉁이에 서서 오랫동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 주님도 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바리새인들처럼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기도하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 안다고 했습니다. 

모범적 기도의 모델을 주님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한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올바른 기도생활을 배우게 됩니다. 그도 육신을 가진 몸이었기 때문에 우선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고통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모두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실존적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기도자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대상은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격적 기도는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호칭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께 나의 모든 문제를 아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중언부언 하지말고 단순해야 합니다. 

수식어는 다 빼버리고 진실 된 고백과 간구(懇求)이어야 합니다. 인격적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라야 합니다. 기도가 응답 없는 기도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말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구하는 이 마다 주실 것이요, 찾는 이 마다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 마다 열릴 것이라고....이 말씀을 자기생각대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구해도 잘 못 구하면 주려고 해도 못 주는 경우가 있고, 찾아도 만나지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두드려도 안 열릴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기도에는 상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나와의 인격적인 만남의 대화라야 합니다. 대화란 상대방이 있습니다. 그 상대방의 말을 듣고 나의 말을 하는 것이 대화입니다. 주님이 바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십자가)을 넘어가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는 나의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아내는데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눈물과 고통스러움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아뢰면서, 그 분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눈물 뒤에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하십니다.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깨우쳐 주십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지혜와 용기를 주십니다. 바로 그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내 뜻을 이루어 달라고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내 문제 속 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생각이 바뀌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인 대화의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자들이 될 때 어떤 세속의 바람에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 속에 역사는 바뀌어집니다. 이런 기도 속에, 생활 속에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의 문제들 속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문제들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이런 기도자들을 찾습니다.

그래서 기도란 해바라기 꽃과 같다하기도 합니다. 아침에 동쪽을 향하여 몸을 돌리는 해바라기는 어두움 속에서 찬란하게 떠오른 해를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점심때가 되고 저녁노을이 질 때까지 해바라기는 계속 해를 따라 움직입니다. 해가 져서 캄캄한 밤이 되어도 해바라기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내일 또 다시 해가 뜰 것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캄캄한 밤에도 해바라기는 쉬지 않고 계속 자기의 몸을 해가 뜨는 동쪽으로 움직입니다. 

기도란 해바라기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사모하고 갈망하며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 놓고 은혜와 사랑을 기다리는 상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알려드리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아낌없이 드리고 바치는 우리의 마음,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는 '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귀'를 요구합니다. 주님을 끊임없이 사모하고 갈망하는 마음의 상태가 곧 기도이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누구에게나 실천 가능한 말씀입니다.

기도할 때 의심하지 말고 오직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만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기도의 생명은 믿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을 믿고 철저히 신뢰하는데 있습니다.

채필근 목사님이 쓰신 「재미난 이야기 철학」이라는 책에는 의심에 대해서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과거 평양신학교 교수로 재직하실 때 한번은 고향에 쓸 일이 35원(당시 쌀 두 섬 값)을 가지고 여행을 떠났다가 길가 어느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밤중에 다른 손님이 들어서 할 수 없이 합방하게 되었습니다. 미쳐 인사할 시간도 없는 채 잠을 자는데 자꾸 그 손님이 수상하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래서 벽에 걸었던 양복을 벗겨서 위를 덮고 시계는 풀어서 돈을 넣은 주머니와 함께 내복 속에 감추었습니다. 그래도 안심이 안되어 저쪽이 부스럭 거리면 이쪽도 안 자고 있다는 표시로 캠하고 헛기침하고, 저쪽도 이쪽이 의심이 되는지. 헛기침하더랍니다. 그런 식으로 서로 의심하다 보니 그날 밤 한 잠도 못 잤다고 합니다. 

새벽이 되어서 문창이 환하게 밝아 오기 때문에 목침에 엎디어 아침 기도를 올렸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는 데 그 손님은 채 목사님의 거동을 엿보고 있다가 "손님, 예수를 믿으시는가요?"라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예"했더니 "나도 예수님을 믿어요. 이제라도 서로 알고 지냅시다" 라고 하더랍니다. 알고 보았더니 그 분은 어느 교회 영수님, 요즈음으로 말하면 안수집사 직책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 분도 장으로 소를 사러 가노라고 돈 500원을 가지고 있었기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서로 기가 막혀 웃었겠습니까? 

그 때 채 목사님이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지 못하고 한쪽은 목사요, 한쪽은 영수이면서도 돈 몇 푼 때문에 서로 의심하다 날밤을 새웠으니, 자기의 믿음 없음에 많은 반성을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실 때 믿음으로 그도 바다위를 걸었습니다.(마14:30) 그러나 바람을 바라보는 순간 무서워하며 빠져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건져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자여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마14:31) 

흔들리는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기도해도 불안합니다. 이것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아예 기도응답이 없음을 알아야합니다.  의심하는 자는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약1:7) 왜 그렇습니까?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약1:8)

어느 사람이 산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합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날이 훤히 밝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말이 "되게 안 믿어지네..." 하였답니다.
때문에 믿음자체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믿음까지 달라고 기도하여야합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귀신들린 아이를 둔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아와 아이를 고쳐달라고 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불쌍히 여기시고 좀 고쳐주세요 애원을 합니다.( 막9:22)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9:23) 아버지가 부르짖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9:24) 믿음 없다고 그냥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이 없음을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믿음의 기도에는 반드시 응답의 역사가 있습니다.

마21:22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막11:24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평택에서 문구점과 서점을 경영하고 있는 황 집사라는 분은 하나님의 섭리를 적적으로 믿으면서 생활하고 있다합니다. 그는 1978년 3월 30일 밤 11시에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당시 이등병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던 그는 임무를 끝내고 막 잠자리에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내무반의 고참이 그에게 빼치카 위에 있는 스피아 캔이 위험하니 내려놓으라고 했습니다. 가서 보니 그 통은 뚜껑이 닫힌 채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양말을 겹쳐서 조심스럽게 들어내려고 하는 순간, 굉음과 함께 통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려 보니, 내무반 안은 수증기로 가득 찼고, 어떤 사람은 모포를 둘러쓴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벌거벗은 채로 3도 화상을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서울 통합병원에 후송된 후에도 여러 날 동안을 말도 못한 채 중환자실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는 100일 동안의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담당 전문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99%는 내가 치료하더라도 1%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나 그 1%가 흉터를 좌우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이 말을 듣고 황 집사는 정말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모습으로는 나 혼자 방안에서 할 수 있는 일밖에 못합니다. 젊은이로써 너무 가련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기만 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 후 그의 병세는 주변 사람들이 기적이다, 또는 신기하다고 할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지금은 10년 전의 소원대로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다합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지난날의 생각을 고쳐가고 있다합니. 그것은 하나님은 1%의 하나님이 아니라, 100%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고 남은 1%가 아니라, 100% 전체를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나 명상 등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산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합니다.  미국 듀크대 메디컬 센터의 해롤드 쾨니그 교수는 노스캐롤라이나주 더햄 지역의 노인 4000명을 상대로 6년간 실시한 임상관찰 기록을 토대로 최근 이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유에스에이투데이지가 보도했다합니다. 

이에 따르면 종교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 노인들은 한 달에 한번 이상 기도나 명상을 하는 노인들보다 사망 확률이 50% 정도 더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합니다. 쾨니그 교수는 “기도하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덜 받기 때문인 것 같다”며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기도와 명상도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혈압 상승, 면역력 저하 등 신체에 다양한 이상이 생기는데 기도 등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호르몬의 생성을 낮춘다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과학적인 근거도 중요하나 보다 더 살아계신 하나님 믿고 기도 할 때 만사형통의 복으로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응답받는 기도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믿음'은 '지혜'를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을 확신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마 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막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따라서 성도들은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Ropes).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믿음으로 구하며 응답받으며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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