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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부모 (마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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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마 15:1~9)


I. 어버이 생각

영국의 여왕이 몽고의 어느 왕에게 강아지를 한 마리 선물했더랍니다. 나중에 이 왕을 만난 자리에서 여왕이 강아지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강아지가 잘 있느냐"고. 몽고의 왕이 대답을 했습니다. "예, 아참 그 강아지 맛있게 잘 먹었다고" 이 일로 인해 양국간 외교상 금이 가고 말았답니다. 

서양 사람들은 개를 끔찍이도 사랑합니다. 요즘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분당의 어떤 교회는 개를 집에 떼어놓고 교회를 올 수 없는 가정을 위해 자모실이 아니라 개와 함께 예배하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답니다. 앞으로 많은 교회에 이런 공간이 생길 것 같습니다. 

강아지에게 옷을 해 입히고 침대에 베개까지, 심지어는 미장원, 목욕탕, 병원, 영양제까지 맞힙니다. 영화가운데는 강아지에게 거액의 유산이 물려져 벌어지는 희극물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개가 죽으면 무덤을 만들어 주고 묘비를 세워 줍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지독한 욕설마다 개가 등장하는 우리네 문화로서는 이해 못할 일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개는 은혜를 잊지 않는다. 강아지는 배신하는 법이 없다."

그리고 보면 인간이란게 강아지보다 나은 것도 없습니다. 까마귀는 어미보다 높은 나뭇가지에 앉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인간 역사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만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이 수난을 당하던 시대가 또 있었나 싶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틈바구니가 벌어질 대로 벌어져 이 상처는 과연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마져 갖게 합니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 서울 하늘을 바라보고 앉아 계실 어버이곁으로 달려가고 싶은 시간입니다. 이제 막 철이 들어서 효도 한 번 할까 두리번 거렸더니, 어버이가 우리곁에 아니계신 분들도 퍽이나 계신 줄로 압니다. 마땅히 효도해야 할 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인생의 무거운 짐.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마냥 무겁게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① 아버지, 어젯밤 당신 꿈을 꾸었습니다. 언제나처럼 한 쪽 어깨가 약간 올라간 지게를 많이 져서 구부정한 등을 기울이고 물끄러미, 할 말 있는 듯 없는 듯 제 얼굴을 건네다 보시는 당신 앞에서 저는 그만 목이 메었습니다. 옹이 박힌 그 손에 곡괭이를 잡으시고 파고 또 파도 깊이 모를 허방같은 삶의 밭이랑을 허비시며 우리 오남매 넉넉히 품어 안아 키워 주신 아버지! 

이제 홀로 고향집에 남아서 날개짓 배워 다 달아가 버린 빈 둥지 지키시며 "그래, 바쁘지? 내 다 안다." 보고 싶어도 안으로만 삼키고 먼 산 바라기 하시는 당신은 세상살이 상처 입은 마음 기대어 울고 싶은 고향집 울타리. 땡볕도 천둥도 막아주는 마을 앞 둥구나무. 

아버지, 이제 저희가 그 둥구나무 될께요. 
시원한 그늘에 돗자리 펴고 장기 한 판 두시면서 너털웃음 크게 한 번 웃어 보세요. 주름살 골 골마다 그리움 배어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은 우리 아버지. 
- 이혜선 시 '아버지'중에서 -

② 늦은 저녁, 팔다 남으신 고등어가 밥상에 오를 때면 
철없는 투정으로 숟가락을 팽개쳤고
힘들게 생선을 팔아 초등학교에 보내 주실 때에도, 
학용품 사라며 쥐어주신 돈을 생선 냄새가 난다며 뿌리치고 말았습니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때는 왜 그리도 철이 없었는지요.

일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깨달은 지금
시장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을 보면 왠지 낯설질 않습니다. 
그 얼굴 사이에 어머니의 모습이 있는거 같아 머리라도 조아리고 싶어지지만 이제 어머님은 그 어디에도 계시질 않습니다.

그 옛날로 돌아가, 어머니께 용서를 빌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머니! 죄송합니다. 

- 딸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푸념같은 글입니다. 


II. 본문

주기철 목사님은 감옥에 갖혀 매를 맞으며 살이 찢기고 피가 터지는 고통속에서 내 육신 아픈 것 보다 더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노모님께 효도를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옥중기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내 어머님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신 은혜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되고 보니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은 나를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셨는데 이 몸은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맞아 상하니 어머니 가슴이 얼마나 아프실까? 춘풍추우 비바람이 옥문곁에 뿌릴 때, 고요한 달빛이 철장에 새어들 때, 어머니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려 기도합니다. 가여운 내 어머니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맡기고 불효자는 주님가신 길, 순교자의 길을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드소서. 80이 넘어신 내 어머니 자비하신 주님 손에 부탁드립니다.] 

내가 어떤 상황속에 있어도 불효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아도 될만한 구실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여건과 이유도, 심지어는 신앙적인, 종교적인 이유도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래서 부모님께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을 "고르반"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하고 분명했습니다. 부모 공경은 무조건적인 것이요, 절대적인 것입니다.

물론 부모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된 오늘날 사회적인 이유는 있습니다. 옛날에는 모든 삶의 지혜와 지식을 부모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모님은 스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지식은 급증하지요, 사회는 급변하지요. 모든 지식을 밖으로부터 배우고 늙은 부모는 이를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부모님들이 자식들한테 배워야 합니다. 

기술도 그렇습니다. 옛날엔 목수 아버지로부터 목공일을 배워 목수가 되고 농사일을 배워 농부가 됩니다. 생업을 부모님께 의존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경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사회 구조속에서 부모님들은 권위를 지키기가 어렵게 되었고 자녀들은 부모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좀더 솔직하게 말해서 연세 많으신 부모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기란 퍽 어렵습니다. 현실과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실 때면 정말 그대로 수용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버이날에 부모들이 제일 많이 상처받는 말이 자식들로부터 "말이 안통해"라는 말을 들을 때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할 때 부모님의 품행이나 지식을 수우미양가로 평가한 다음 거기에 따라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부모님이 도둑질을 시켜도 자녀들은 순종하는 흉내라도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혹 무지한 사람들중에 기독교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불효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돌아가신 부모께 효도하겠다 하지만 기독교는 살아계신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부모님 살아 계실 때는 효도가 우리의 몫이지요. 그러나 그분들 돌아가시고 나면 우리가 효도할 수 있는 길이 어떤 길도 없습니다. 그분들 천국에 계시니 천국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제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추도예배가 있습니다. 추도예배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곁에 가 계신 내 부모님, 잘 돌봐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가 추도예배입니다.

둘째, 부모님의 뜻, 아름다운 인격, 자식위하여 빌어주었던 기도... 그것들을 기억하며 되새김하는 시간이 추도예배 시간입니다.

세 번째, 먼저 가 계신 그 부모님 곁으로 언젠가는 나도 달려가 만나 뵐 소망으로 기원하는 예배가 추도예배입니다.

음식 한상 잘 차려놓고 그분들께 절하면 그 분들 살아오셔서 그 음식 드실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고전 10:20 말씀에 보면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다. 「유교가 가르치는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하는 것 아니다.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것 원치 아니한다. 너희들은 지금 귀신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부모 공경에 관한 한 성경에서 대단히 단호한 표현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부모를 훼방하는 죄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성밖으로 끌어다가 돌로 쳐 죽여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21:15에서는 부모를 치는 자를 죽이라고 했고 21:17에서도 부모를 저주하는 자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잠언 30:17에 보면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신명기 21:18이하에 보면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술에 취하여 방탕하게 살면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운데 죽을 사람이 많군요. 돌에 맞아 죽을 사람도 많고, 까마귀에게 눈이 쪼일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III. 부모

옛날에는 5월 8일을 어머니날이라고 했는데 언젠가부터 어버이날이라고 합니다. 저는 남자라서 그런지 아버지날은 없는가 했는데 이 날은 어버이날이라고 부른 것은 퍽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버이가 누구입니까? 신학적으로 보면 궁극적이고 영원한 어버이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6장에 보면 "네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주 앞에서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옳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된다는 말입니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로 된다는 뜻이지요.

마틴루터의 "대요리문답"에 보면 성경적으로 네 가지 부모를 말합니다.

첫째, 나를 낳아주신 육신의 부모입니다.

육신 부모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 전적인 부모님의 은혜로 살 수 있었고, 부모님의 품안에서 부모님의 젖을 먹고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감사하게 될 때에 영적인 은혜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연약할 때에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통해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생명의 젖을 먹여 나를 양육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구속의 진리를 부모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둘째, 영적인 부모가 있습니다. 목사님을 말합니다. 

카톨릭에서는 교역자를 신부라고 합니다. 영적인 아버지라는 뜻이요, 영어로는 문자 그대로 아버지, "Father"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신부는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교인들을 대할 때 자녀를 대하듯 "하게"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영적 아버지인 목사와의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저는 여러분앞에 대단히 조심스러운 존재입니다. 저 때문에 신앙에 유익이 될지언정 하나님과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 항상 서로 조심하도록 하십시다. 주의 종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허물이 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그분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받아 들일 때 자신에게 복이 됩니다. 주의 종들의 허물이 보이면 눈을 감으십시오. 아비의 허물을 덮은 셈과 야벳은 자손 만대에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비의 허물을 들추어 내고 비웃었던 함은 자손 만대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셋째, 나에게 지식을 공급해 주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스승을 말합니다. 그래서 스승을 사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넷째, 왕을 아버지라고 루터는 말했습니다. 

국가의 원수를 존경할 수 없는 나라는 애국의 정신이 무너지고 맙니다. 오늘날은 정치 지도자를 존경하는 마음이 참으로 아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루터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부모의 권위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라고 말했습니다. 부모를 훼방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훼방하는 것이요, 부모님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어느 시대나 부모 공경을 하지 못하는 타락한 사회속에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신앙도 퇴조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IV. 부모의 사랑

언제나 부모님의 사랑은 조건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손해보는 사랑, 짝사랑을 부모님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심지어 잘못된 부모들 조차도 자식만큼은 잘되길 소망합니다. 

술을 퍽이나 좋아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얼근히 취하여 돌아오면 자녀들 앉혀놓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일장 훈계를 합니다. "이놈들아, 너희들은 절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 한잔이라도 술을 마시면 내 자식이 아니다. 알겠어. 개새끼야, 개새끼! 술 먹고 술 주정하는 놈이 인간이냐! 인간이 아니지. 그럼 인간이 아니고 말고." 그래서 인간 아닌 그 인간은 조용히 잠에 빠져 든다고 합니다. 

여러분 친구간에도 질투가 있고, 형제간에도 질투가 있고 심지어는 부부간에도 한쪽을 칭찬하면 다른 쪽에서는 질투가 생깁니다. 그러나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에는 질투가 없습니다. 자식을 칭찬하면 할수록 부모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땅에 많은 부모들이 자식 사랑에서만은 잃고도 좋아하고, 손해보고도 좋아하고, 눈이 멀어도 좋습니다.

어느 훈련병의 어머니가 아들이 사열하고 있는 연병장으로 참관을 갔더랍니다. 많은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사열하는 모습을 지켜 본 다음 돌아오는 길에서 어머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바보같은 놈의 자식들, 발도 하나 못 맞춰! 발이 맞는 놈은 내 아들 하나 뿐이야." 자기 아들밖에 아무도 안 보이는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말이요, 자기 아들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눈! 아니겠습니까?

일본 신화에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청상이 되어 외아들을 길러 청년이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애인을 사귀게 되었는데 그 애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의사의 진찰결과 사람의 간을 먹이면 낳는다고 하니까 늙으신 어머니의 간을 빼어 달려갑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어머니의 간을 들고 달려가는 아들을 따라가며 어머니의 혼이 계속 말을 합니다. "얘야, 천천히 가라. 조심해서 가라. 넘어져 무릎 깨질라."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신의 간을 먹여 자녀를 기릅니다. 부모들은 애간장을 녹이며 자녀를 기르지 않습니까? 어버이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것, 이는 이 땅의 모든 자녀들의 축복입니다. 세상의 모든 자녀들은 어버이의 사랑과 피를 머금고 태어나 어버이의 눈물과 땀을 먹고 성장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에게 자녀를 축복하는 축복권을 주셨습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비는 복을 받고 삽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녀에게 축복했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야곱은 그의 열 두 아들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복을 빌었습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여러분의 자녀들을 축복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은, 우리의 언어 생활은 내 자식들을 축복하고 있습니까?
아는 듯 모르는 듯 그 사이에 행여나 저주하는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V. 효도를 완성하신 예수님

사랑하는 여러분!
해마다 한 번씩 지내는 어버이 주일을 오늘 저희들은 보내고 있습니다. 이 날이 되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산다는 죄책감이 듭니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란 참으로 귀한 관계이면서도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관계입니다. 이 세상 사람 가운데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했다고 자신할 사람도 없고, 자녀로서의 임무를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자식은 부모로부터 가장 많은 상처를 받고,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가장 많은 상처를 받고 산다는 것입니다. 율법대로 본다면 돌에 맞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며, 온전히 생명이 붙어 있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저는 이 문제로 고민하던 어느 날 예수님의 새로운 사역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수많은 사역이 있지만, 그 가운데 귀하신 사역 하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효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우리도 내 부모님으로부터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소설 중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한 장면.
자기 졸업증명서를 한 통 떼어 서울 올라오는 인편에 들려보내면 고속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다 받겠다는 서울 용산2동사무소에 임시채용된 큰아들의 전갈을 받고 졸업증명서를 직접 들고 기차를 타고 난생 처음 서울에 올라와 밤늦도록 초행인 서울길을 헤매다 추위에 온몸이 언채 어느 청년의 안내로 동사무소에 겨우 찾아온 엄마가 아들의 숙소인 동사무소 숙직실에서 잠들면서 나누는 이야기...

살을 에는 겨울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숙직실, "나는 벽쪽에 자야 잠이 잘온다"고 우기며 몸으로 찬바람을 막아주던 엄마가 나직히 거내는 말...

너는 내가 낳은 첫애 아니냐. 니가 나한티 처음 해보게 한 것이 어디 이뿐이간? 너의 모든게 나한티는 새세상인디. 너는 내게 뭐든 처음 해보게 했잖어. 배가 그리부른 것도 처음이었구. 젖도 처음 물려봤구. 너를 낳았을 때 내 나이가 꼭 지금 너였다. 눈도 안 뜨고 땀에 젖은 붉은 네 얼굴을 첨 봤을 적에... 넘들은 첫애 낳구선 다들 놀랍구 기뻤다던디 난 슬펐던 것 같어. 이 갓난애를 내가 낳았나... 이제 어째야 하나... 고단헐 때면 방으로 들어가서 누워 있는 니 작은 손가락을 펼쳐 보곤 했어. 발가락도 맨져보고. 그러구 나면 힘이 나곤 했어. 신발을 처음 신길 때 정말 신바람이 났었다. 니가 아장아장 걸어서 나한티 올땐 어찌나 웃음이 터지는지 금은보화를 내 앞에 쏟아놔도 그같이 웃진 않았을 게다. 학교 보낼 때는 어땠게? 네 이름표를 손수건이랑 함께 니 가슴에 달아주는데 왜 내가 의젓해지는 기분이었는지. 니 종아리 굵어지는 거 보는 재미를 어디다 비교하겄니. 어서어서 자라라 내 새끼야. 매일 노래를 불렀네. 그러다 언제 보니 이젠 니가 나보다 더 크더구나. 어서어서 자라라 했음서도 막상 니가 나보다 더 커버리니까는 니가 자식인데도 두렵데. 
부모가 하고 싶은 말 -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성경에는 부모에게 최대의 효를 이룬 모리아 산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모리아 산상에 올라갑니다.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여기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억장이 무너졌던 아브라함!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알지? 네가 바로 번제할 양이다." 아들 이삭을 묶어 나무단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아들 이삭이 반항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바치라 말씀하셨군요." 깨끗이 순종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

모리아 산상의 사건은 효도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효자였습니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 효자였습니다. 효자끼리 만나는 자리가 모리아 산이었고 하나님께서는 모리아산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저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효도하는 저들의 몸을, 저들의 가정을, 저들의 삶을 통하여 이 땅에 복을 펼치기를 주님께서 원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엄청난 보화를 준비하시고, 효자들을 통하여 이 땅에 복을 펼쳐가기를 원하십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효도사건은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효를 완성하셨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일찍이 양아버지 요셉을 잃었습니다.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마리아의 집에서 30년동안 목수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러나 공생애를 시작하신 3년간은 가정을 떠나 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온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 온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험한 고통을 당하시며 죽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눈물 젖은 두 눈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자식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되는 어머니의 눈이었고, 이 땅에 어머니를 남기고 먼저 떠나가야 하는 자식 예수님의 눈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여자여!"는 극존칭임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이었을까요?

이 땅의 모든 오고 오는 세대속에서의 부모와 자식들의 아픔과 상처, 책임의 의무를 화해시키는 말씀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효도를 완성하신 말씀이셨습니다. 이어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그때부터 그 제자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효도를 완성하신 예수님!
부모와 자식간의 모든 허물을 화해시키신 예수님! 십자가에서 그 모든 짐을 지금 홀로 담당하여 피흘리고 계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화해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화해 사건은 하나님과 많은 인간의 화해의 사건이었고, 사람과 사람의 화해의 사건이었는가 하면, 이 땅의 모든 어버이들과 자식들간의 무거운 짐.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무거운 짐, 자식을 말씀으로 제대로 양육하지 못한 어버이들의 무거운 짐을 다 깨끗이 녹여 버리는 십자가의 놀라운 사건! 복음중에 복음! 기쁨이 아니고 또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 자식들을 향하여 남들처럼 아름답게 교육시키지 못했고, 남들처럼 비단옷 입히지 못하고 진수성찬 먹이지 못해서 못내 마음이 아프신 분 계십니까? 효도해야 되겠는데 내가 부족하고 미련하여 효도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짊어지고 계신 분 계십니까? 이 시간에 주님께서 그 고통의 짐을 다 담당하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내 자식, 주님앞에 맡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어버이를 효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의 모든 자녀들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공경은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나 동정이 아닙니다. 부모님을 무겁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러러 받드는 마음이요, 존경하며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분의 자녀가 된 것을 자랑과 긍지로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부모공경의 깊이 만큼 은혜를 받습니다.


효도가 무엇입니까? 한자어는 이 효도에 대해 퍽 재미있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 시골에는 닷 새 만에 장이 서곤 했습니다. 장날이 되면 아들은 그 동안에 해서 모은 나무 단을 지게에 잔뜩 싣고서 아침 일찍 장에 나가서 나무를 팝니다. 저녁이 되면 어머니는 밥상을 준비해 놓고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데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서 가만히 집에 머물러 계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동구밖까지 나가서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드디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멀리 산모퉁이를 돌아서 마을로 되돌아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애틋한 심정이 되어서 좀 더 멀리, 좀 더 자세하게 보기 위해서 동구밖에 서있는 나무 위에 올라갑니다. 그 모습을 한자에서는 어버이 친(親)자로 묘사를 했습니다. 어버이 친자가 어떻게 씁니까? 설 립(立)자 밑에 나무 목(木)자, 그리고 오른쪽에 볼 견(見)자를 씁니다. 나무 위에 올라서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바라보는 그 어머니의 애틋한 심정이 바로 어버이 친(親)자입니다. 

한편 아들은 준비해 간 나무를 시장에서 모두 팔고서 그 돈을 가지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반찬도 사고 또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고 동구밖까지 나와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들은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어머님! 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다리도 불편하실 텐데, 집에 가만히 계시지 않고요!" 그러면서 아들은 등에 지고 있는 지게를 내려놓습니다. "어머님! 어서 이 위에 올라앉으세요. 제가 어머님을 업어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것을 한자에서는 효도 효(孝)자로 표시를 했습니다. 효도 효자는 어떻게 씁니까? 늙을 노(老)자 밑에 아들 자(子)자가 있습니다. 아들이 연로하신 어머님을 등에 업고 가는 모습이 효도 효(孝)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이와 같은 친(親)이 있고, 효(孝)가 있는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옛말에 「효도는 흉내만 내도 좋다. 효도는 흉내만 내도 복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 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 발이 다 닿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히 없어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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