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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하나님의 나라와 부모 (신 5:16, 눅 18: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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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와 부모 (신 5:16, 눅 18:28~30)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든 어버이들께 하나님의 크신 위로하심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를 하나님을 대신하여 양육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큰 면류관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유대격언에 “하나님이 온 세상 구석구석을 다 다니실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드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은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부모님을 하나님처럼 공경하고 부모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잘 따르고 잘 가르치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이 가정에서 효도하지 않으면 국가에 충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효하는 가문에서 충신이 난다(孝門忠臣)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가정적 종교입니다. 효의 종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효를 모른다고 오해하고 비난합니다. 실제는 충과 효와 사랑이 충만한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우리가 왜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구약의 제사는 신약의 예배인데 우리만큼 예배 열심히 드리는 종교가 있습니까? 기독교만큼 누가 국가를 위해 기도합니까? 기도원에 가보세요. 지금도 기도원에 모여 국가를 위한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릅니다. 부모에게 효하지 않는다고요?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세상에 살아계실 때 잘 모시는 것이 효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에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고요? 세상에 사랑을 가장 많이 베푸는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복지사업을 보면 알아요. 우리나라의 복지기관 가운데 80% 가까이가 개신교회나 교인이 하는 기관입니다. 
  
효도는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신 성경적 진리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효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부모를 거역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을 공경하라고 합니다. 성경은 모든 어린이를 내 어린이같이 가르치라고 합니다. 모든 부모를 내 부모같이 공경하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속담에는 “아이를 키우는데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를 온전하게 양육하려면 모든 사람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온 교회가 아이들을 내 자녀같이 돌봐야 합니다. 사랑으로 권하고 꾸짖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5:1에는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라고 합니다. 내 부모뿐만 아니라 모든 어르신들을 내 부모처럼 대하라는 말입니다. 어르신들을 꾸짖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명령이고, 우리가 다 그 길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식사 시간에 조금 흘렸다고 “그걸 흘리면 어떻게요?” 하면서 야단치지 마세요. 저도 요즘에는 제대로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먹고 나서 보면 흘러 있습디다. 어르신들이 조금 실수했다고 “까스 불을 켜놓으면 어떻게 해요?”하고 소리치지 마세요. 큰 소리가 서럽게 들리신답니다. “이런 말은 꼭 우리 집 이야기 같은데 누가 일러줬나?” 그러지 마세요. 제가 다 알아요. 성경은 단지 “권하라”고 합니다. 
  
성경은 많은 역설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하면 갈등이 생길 수 있는 말들이 있습니다. “부모를 버리라고?”라고 할지 모릅니다. 성경에는 난해한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판단이 불가한 것들이 많습니다. 죽으면 산다고 합니다. 잃으면 얻는다고 합니다. 지면 이긴다고 합니다. 이런 말들은 세상의 논리와는 정 반대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이런 역설들 대문에 세상은 기독교에 대하여 오해합니다. 하나님을 살인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을 가정파괴범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찬 때에 가족들도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먹는다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또 부모를 버리라고 하는 나쁜 종교라고 합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한다고 해서 독선적이라고 합니다. 

네로 시대에는 기독교인들을 로마 시내에 불을 지른 방화범으로 몰았습니다. 목사는 봉헌을 몽땅 다 거둬가는 줄 압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아버님이 예수를 믿지 않고 반대하셨는데 늦게 교회를 나오셨습니다. 아버지는 교회에 와 보시고는 아들 목사에게 “앞으로 용돈이나 두툭히 가져와라” 그러시더랍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씀 하세요?” 아들이 묻자 아버지는 “교회 가서 보니 돈을 몽땅 거둬서 다 네 앞에 다 갖다 놓더라” 그러시더랍니다. 
  
성경은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갈등관계에 있는 것을 가르칩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괴리 상태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상반됩니다. 세상에서는 보모를 공경해야 하고 절대로 버리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위해서는 부모를 버려야 합니다. 이런 모순과 역설과 갈등이 존재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부모의 관계를 성경을 통하여 보고 부모공경과 하나님의 나라 소유를 함께 얻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세상에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신명기 5:16에는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합니다. 성경의 근본 가르침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나 공통적 가르침입니다. 
 
 “공경하라”는 말은 ‘티마’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십계명 제 5계명을 인용한 말입니다. 출애굽기 20:12에는 “공경하라”란 말을 히브리어로 ‘카베드’라고 썼습니다. 이 말은 ‘무겁다’는 뜻입니다. 부모를 무겁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가볍게 여기라 혹은 경홀히 여기라는 말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습게 여기라는 말일 것입니다.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말들을 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엄마, 모르면 가만히 있어”, “어머니 때와는 달라요”, “제가 알아서 해요” 등은 경홀히 여기는 말들입니다. 아버지를 경홀히 여긴 아들이 성경에는 있습니다. 노아의 아들 가운데 함이란 아들이 그랬습니다. 아버지가 포도주에 취하여 옷을 벗고 있을 때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떠벌였습니다.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하여 아버지의 몸을 가렸습니다. 그 후에 함은 아버지를 가볍게 여긴 벌을 받아 셈과 야벳의 종이 되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그렇습니다. 아버지를 반역하여 아버지의 왕좌를 탐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아들을 멸망당하게 합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의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12살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다녀오신 후에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합니다. 아마 그의 아버지 요셉이 하는 목수 일을 열심히 하셨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를 걱정하셨습니다.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고 하시며 어머니를 맡겨 주셨습니다. 성경 속의 착한 인물 디모데도 공경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5에는 “이 믿음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라고 합니다. 공경했으니 믿음의 대를 잘 이어받았을 것입니다. 믿음을 잘 전수하였던 아들입니다. 믿음을 전수받기 위해서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믿음과 인격과 가업을 전수 받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효’(孝)자는 ‘노’(老)를 ‘자’(子)가 업고 있는 모습입니다. 늙은 부모를 자녀가 업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늙은 부모를 잘 업어드려야 효가 되는 것입니다. 공자는 ‘인(仁)의 기본이 효이다’라고 했습니다. 맹자는 ‘땅위의 일 가운데 으뜸이 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부모에 대한 효를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모 공경의 조건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라고 합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려면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면 부모를 공경하게 됩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막바지일 때 남군의 리(Lee)장군은 아포마톡스에서 북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전 남부의 사령관이었던 헨리 와이즈의 아들은 이제 막 태어난 미합중국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아들은 이 일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너는 가문에 오점을 남겼구나.” 헨리 와이즈는 단호하게 대답하였습니다. 남부 연합군의 전 지휘관인 아들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리 장군께서 그렇게 하라고 조언하셨습니다.” 와이즈는 1분도 안되어 자기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그렇다면 상황이 다르구나. 리 장군이라면 어떤 조언이라도 옳지.” 이 말 가운데서 헨리 와이즈의 결단은 존경할 만합니다. 리 장군에 대한 신뢰는 모범입니다. 아들의 순종도 돋보입니다. 모두가 옳았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언제나 공경할만해야 합니다. 
  
부모공경은 기독교가 아니라도 도덕의 기초입니다. ‘부모를 거역하라’는 윤리나 경전이 없습니다. ‘삼강’의 첫째는 ‘부위자강’(父爲子綱)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이라는 말입니다. ‘오륜’에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친함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탈무드에는 “아버지가 다른 사람과 논쟁을 하고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편을 들으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를 자녀가 공경하지 않으면 누가 공경하겠습니까? 내 아버지 내 어머니가 최고라는 자긍심을 늘 가져야 합니다. 
  
부모공경은 반드시 대가가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하십니다. 장수는 고대 관념에서 축복의 상징입니다. 생명이 길기만 하면 안 됩니다. 생명이 길되 복이 있어야 합니다. 복이 없이 생명만 길면 화가 됩니다. 그래서 ‘수즉다욕’(壽則多辱)이란 말도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 위해서 부모를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형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오해할 소지가 다분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버린 자’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 있게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다 버린 사람들입니다. 무산자들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난나와 다른 여성들이 소유로 주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아마 제자들이 이 말씀을 할 때에 젊은 관원을 의식하고 한 말일 것입니다. 자신의 물질을 버리지 못해 주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젊은 부자관원과는 다르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물질은 버렸지만 정말 버릴 것을 버렸는가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버리는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버리는 대상은 집과 아내와 형제와 부모와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가장 귀한 것, 버리지 못할 것을 버려야 버리는 것입니다. 
  
목적이 잘못되어 버렸지만 잘못 버린 사람도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오래 전에 일본 명문 대학을 졸업하셨습니다. 그 때는 한참 일본의 대학들이 이념의 대결이 심할 때입니다. 그 분은 공산주의의 이념을 지키기 위하여 학교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습니다. 분명히 자신의 중요한 지체를 버렸지만 아무 가지 없이 잘못 버린 것입니다. 
  
버리는 대상이 잘못되면 더 큰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릴 것은 안 버리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이 백성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버린 말들입니다. 하나님을 버리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세상의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목욕물 버리다 아기까지 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잘 분별하는 것이 지혜이며 신앙입니다.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버리거나 버릴 것을 버리지 않으면 이 둘 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중세 철학에 명언이 있습니다. “모든 선택은 포기이다”. 선택은 수많은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비와 친척과 고향과 집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게 하십니다. 모세에게는 손에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경험과 이론을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백성을 이끌게 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문과 지식과 물질과 로마시민권을 다 배설물 같이 버렸습니다. 하나님만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더욱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물질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송을 작곡한 조지 베블리 쉐아는 촉망받는 성악가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방송국에서 비싼 값에 제의가 들어왔고,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파격적인 제의를 버리고 빌리 그래함 제단에 들어가 찬양하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오신 총망 받는 외과의사이셨습니다. 미국에 전문의 공부하러 갔다가 변화되어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목사로 보람 있게 사역하고 있습니다. 
  
재물을 버린다는 것은 작은 일입니다. 하지만 인격을 버린다는 것은 운명을 건 큰 모험입니다. 수도사들을 보세요. 하나님 위하여 부모, 형제, 재물, 지위, 학력, 가정, 실력 모두 다 버리고 평생을 주님께 헌신하고 살아갑니다. 제가 만난 수도사들은 한 결 같이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학력도 경력도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다 버리고 평생을 수도원 안에서 살아갑니다.  
  
제자 됨의 삶에 수반되는 희생의 대가가 있습니다. 버린다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은 순종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버리면 반드시 대가가 따를 것입니다. 다 버린다고 하지만 인간은 때로는 몹시 약해집니다. 예수님을 위해 다 버리고 온 제자들이지만 마가복음 14:50에 보면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제자라고 하더라도 약해지면 버리지 말아야 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재물을 버려도 온전히 자신을 버리지 못하면, 완전한 헌신이 아니면 예수님을 버립니다. 성경에는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자도 있다고 합니다. 남자로서 가장 어려운 결단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온전하게 버리지 않으면 고자가 되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버립니다. 아무 가치 없이 몸만 버리게 됩니다. 
  
조지 베블리 쉐어가 작곡한 노래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의 가사를 보세요.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우리가 버리되 온전하게 버려야 합니다. 부모를 버리라는 말은 하나님 제일주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모는 우리의 효의 대상이지 절대로 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제사를 드리는 대신 효도합니다. 대신 추모예배를 드립니다. 부모는 우리의 예배의 대상, 제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 형제, 아내, 남편 누구도 신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자녀가 신이 되어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가정이 많습니다. 우리 자녀를 위하여 공을 드리는 것만큼 하나님께 공을 드려보세요. 아마 교회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세는 이미 백성들에게 신격화되었습니다. 모세가 보이지 않게 되자 백성들은 “우리를 이끌 신을 만들자”라고 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백성들에게 정말 하나님 같이 될까봐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에 어떤 존재도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 제일주의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 사고를 가져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결론 

이슬람은 알라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립니다. ‘지하드’는 ‘노력’이란 뜻을 가진 거룩한 전쟁, 성전이라 합니다. 지하드는 알라를 위한 전쟁입니다. 코란, 수라 3:195에는 “그들의 집을 떠났거나 추방당했거나 나의 길에서 순교한 자, 성전하였거나 살해당한 그들을 속죄하여 줄 것이며, 강이 흐르는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이것이 알라로부터 받을 보상이라 그 중 좋은 보상은 알라에게 있노라”고 합니다. 알라를 위해 버리면 보상을 주겠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종교라기보다 생명 그 자체입니다. 생명의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서 가장 귀한 것을 버리면 현세에서 여러 배를 주십니다. 내세에서 영생을 보상하십니다. 
  
우리의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부모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너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부모 공경은 세상에서도 잘 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를 위해서라면 이 땅에서 가장 귀한 것들, 절대로 버리지 못할 가장 귀한 것까지 버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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