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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튼튼한 가정을 세우는 10대 가치(제2편) (출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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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튼한 가정을 세우는 10대 가치 (제2편) 출애굽기 20:4~5
  
- 릭 워렌


지난 주부터 우리는 “튼튼한 가정을 세우는 10가지 가치”라는 제목으로 십계명에 대해 살펴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계명이 어떻게 우리의 가정을 세우고 더 튼튼하게 하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4-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 계명은 유대인이나 회교도,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두가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계명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합니다. 오늘 살펴볼 두 번째 계명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우상화하지 말라는 것과,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I. 어떤 것도 우상화하지 말라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초점을 하나님에게서 돌려 다른 것에 두게 하는 모든 것들이 우상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그 자체는 좋은 것일지라도, 하나님 대신 내 삶의 첫 번째가 된다면, 그것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상화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어떤 것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차고에 그들의 우상을 주차시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우상을 항구에 정박시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행 지하의 안전 금고 속에 그들의 우상을 넣어 둡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결해야 할 우상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역사상 어떤 문화에든 우상이 있었다고 고고학자들이 말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화에서나 커다란 신상, 혹은 작은 남신이나 여신상 등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인간은 사물이나 사람, 즉 무엇인가를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시대에는 세 가지 주된 우상이 있었습니다. 성(性)의 신인 바알이 있었습니다. 돈의 신인 맘몬이 있었습니다. 폭력의 신인 몰렉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우상들을 금속으로 만들어 가지고 다니지 않지만, 섹스와 폭력과 돈의 이야기를 보려고 영화관에 가서 수십 억 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받을 당시의 우상들은 돌, 바위, 진흙, 나무, 금속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금속으로 된 이미지가 아니라, 정신적 이미지를 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동양의 많은 가정들마다 신전이 있지만, 미국의 가정에 자리잡은 신전은 TV라 불리는 작은 상자입니다. 우리는 매일 저녁 TV를 켤 때마다 우리의 우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보다 이미지를 숭배합니다. 성공의 이미지, 부의 이미지, 상류계층의 이미지, 성적 매력이라는 이미지 등.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런 것들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아니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어”라고 말하며 자녀들을 양육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우상이 끼치는 해악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신명기 4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 너희는 깊이 삼가라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만들지 말라 ...” “자기를 위해”에 동그라미를 치십시오. 성경은 우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티셔츠에 우상을 새겨 가지고 다닙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헌신되어 있는지 자랑스럽게 밝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너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도 우상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1.우상은 나를 실망시킨다.

우상은 항상 실제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약속합니다. 예레미야 10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TV에서 우리 상표를 입으면 당신은 인기 만점이 될 것이고, 우리 상품을 구매하면 당신은 성공할 것이며, 우리 맥주를 마시면 더 이상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없을 것이고, 우리의 치약을 사면 성적으로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라고 떠들어댑니다. 그들은 항상 실제로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합니다. 

어떤 상품을 우편 카탈로그에서 주문했는데 물건을 받고서 실망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이 어떤 사람, 어떤 것, 어떤 상품을 하나님 자리에 둘 때마다, 혹은 누군가가 당신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거나 당신의 모든 행복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기대할 때마다, 당신은 반드시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상들은 항상 당신을 실망시킵니다. 

  
2. 우상은 나를 지배한다.  

경계하지 않으면, 결국 우상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에 동그라미를 치십시오. 당신이 어떤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때 두 가지 결과를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1)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것이 당신을 지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우상에 대해 “중독”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합니다. 일, 성, 스포츠, 술이나 마약을 비롯한 수많은 것들에 중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어떤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때 결국 그것이 당신의 삶을 조종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는 언제든 그것을 끊을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끊지 않습니까? 분명 그것은 당신의 삶을 지배하고 당신의 삶을 초점에서 멀어지고 산만하게 할 것입니다.

2)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있을 때, 당신은 정도를 떠나 타락하게 되고, 올바른 시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승진의 유혹으로 인해 자신의 자녀들의 삶의 결정적인 시기에 가정을 등한시하는지 아십니까? 혹은 명성을 얻기 위해 인격을 타협하는지? 혹은 이윤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던져 버렸는지? 주의하지 않으면, 우상, 즉 당신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당신의 정신을 빼앗고 당신의 가치를 상실시키게 됩니다. 그것이 당신의 삶을 지배할 것입니다. 당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그 사람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면, 그래서 항상 그들이 인정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면, 즉 그 사람이 당신을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고 당신에게 맞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선택하게 허용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단지 공동 의존성(역주-심리적으로 의존하는 관계) 정도가 아니라,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공동 의존성을 깨기 위해서는 당신의 삶의 첫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께만 근본적으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3. 우상은 당신의 모습을 왜곡시킨다. 

우상들은 당신을 변형시킵니다. 당신을 뒤틀리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정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우리는 닮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편 115편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리가 우상의 형상을 만들지만, 결국은 우상이 우리의 모습을 만들게 됩니다. 당신은 삶의 첫 번째로 두는 것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를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애초에 의도하신 모습에서 멀어지고 왜곡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여피 족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피 족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께서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 그 누구에게도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에게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의 삶 속의 우상이 무엇인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우상은 은행 잔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문제의 핵심을 찌르시며 “네 삶 속에 다른 신이 있어. 만일 네가 정말로 나를 따르기 원한다면, 네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와서 나를 따르라. 내가 네 삶 속의 첫 번째가 되도록 무엇이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피 족은 치러야 할 값을 계산해 보고서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근심하며 가버린 후,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포기할 필요가 있습니까? 당신이 무엇을 붙잡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모습이 되는 데 방해가 됩니까? “나는 이 관계를 놓고 싶지 않아. 이 관계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놓고 싶지 않아.” “나는 이 직업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계속 붙잡을 거야.” “나는 이 습관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고수할 거야.” 바로 그것이 우상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떤 것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데 당신이 그것을 놓을 수 없다면, 당신이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당신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드릴 때의 5만원이 얼마나 커 보이고 쇼핑몰에서 물건을 살 때 5만원이 얼마나 작아 보이는지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돈은 왜 그렇게 커 보입니까?

한 가족이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갈 때, 아버지가 예배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설교가 너무 길었고, 음악 소리가 너무 컸고, 실내가 너무 더웠다고 말하는 등 불평을 했습니다. 자동차 뒷좌석에서 이를 듣던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아빠, 1불을 내고 구경하기에 그렇게 나쁜 쇼는 아니었어요."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3편인 최후의 성전을 기억하습니까?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은 성배를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지진이 일어나서 땅이 갈라지고 영화 내내 성배를 찾아 다녔던 여자가 갈라진 틈으로 떨어집니다. 그녀는 성배를 붙잡든지 놓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목숨부터 구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잘못된 것을 향해 손을 뻗었고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놓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경계하지 않으면, 우상이 당신의 정신을 빼앗고, 당신을 지배하고, 당신을 실망시키고, 결국 당신을 파멸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 자신의 유익을 생각한다면 아무 것도 ... 직업, 여자친구, 꿈, 그 무엇이라도 네 삶에서 첫 자리에 두지 말라. 나를 첫 자리에 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Ⅱ.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이것이 우리 가정에 어떻게 적용됩니까? “나는 그녀가 걷는 땅마저 숭배해”라고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까? 경배는 최고의 사랑과 헌신을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나의 최고의 충성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어떤 사람, 어떤 직업, 어떤 것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서만 그럴 자격이 있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서 1장의 말씀처럼 살아갑니다.“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당신은 그런 사람을 압니까? 그들은 지금 다 해변에 나가 있습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창조주보다 창조물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 교회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적이고 이성적인 인간들이 얼마나 엉뚱한 것들을 경배하는지 생각할 때 경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을 경배합니다. 급진적 환경론자들은 나무들과 자연을 경배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피라미드, 부적, 별, 점성술에 경배하며, 수정공이 자신의 길을 인도해주고 능력을 주기를 바랍니다. 지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이 도대체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합니까? 

우상숭배 배후에는 세 가지 동기가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엎드려 절할 수 있는 신상이나 형상으로 만들고 싶어할까요? 
  

1. 하나님의 소재를 제한하려는 시도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신상 속에 두거나 어떤 한 장소에 둘 수 있다면, 가령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다고 한다면, 혹은 수정공 같은 것 안에 하나님을 둘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내가 하나님 곁에 있고 싶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버리면 됩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신 것을 전혀 원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수정공이나 작은 상자 속에 넣어두고서 문을 닫아버리면서 내가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기분이 훨씬 더 좋아집니다. 나는 내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하나님께서는 어디든 계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하나님을 내 선반 위나 교회 안에만 둘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을 내 통제 하에 두었어. 나는 하나님의 소재를 제한시킬 수 있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성을 축소시키려는 시도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축소시키려 합니다. 하나님을 신상이나 작은 상자, 혹은 하나님은 성경 안에만 계시다는 개념 속에 국한시키면, 하나님은 덜 위압적이고 덜 위협적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없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손쉽게 다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는 창세기 1장 26절의 말씀을 뒤집어서 이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하나님을 만들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처럼 만들기 원한다”라고 말합니다. 또 “오늘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날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는 “이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만든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누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할 권위를 주었는가?”라고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개구리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당신의 기준에 맞추는 것일 뿐입니다. 나를 바꾸는 것보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 가진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훨씬 더 쉽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간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바꾸어서 “나는 하나님께서 그것에 신경 쓰신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나님은 부도덕을 눈감아주셔”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형된 자기만의 신학을 갖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활방식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처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하십니다. 

한 어린 소녀가 학교에서 그림을 그리며 “나는 하나님을 그리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그렇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모르는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제가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알게 될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이는 순진해서 그런 말을 하지만, 많은 어른들까지도 그렇게 합니다. ‘나 나름의 이미지로 하나님을 만들어서 내 생활방식을 정당화해야지.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기를 원하지만, 작은 하나님, 우리 뜻대로 정해진 하나님을 원합니다. 하나님이란 존재가 우리의 통제 밖의, 우리 손을 벗어난 사안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를 축복할 하나님만을 원하고, 하나님께서 내 삶을 그 뜻대로 운영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입니다.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지니(역주-아라비아 동화에 나오는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를 원합니다.

  
3. 사람들이 우상을 갖는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을 지배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자가 숭배를 받는 우상보다 더 큰 통제력을 갖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 뜻대로 다룰 수 있는 신을 원합니다. 

마치 어떤 소년처럼 말입니다. 한 소년이 새 자전거를 갖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기도해보지 그러니?”라고 말했습니다. 소년은 예수님께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새 자전거를 갖고 싶어요. 저는 지난 1년 동안 완벽했어요.” 소년은 그 말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편지를 구겨 던져버렸습니다. “예수님, 저는 대부분 착한 아이였어요.” 소년은 그 말도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역시 편지를 던져버렸습니다. “예수님, 저는 착한 아이가 되고 싶어요.” 그러나 소년은 그 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그 편지도 집어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거실에 가서 성모상을 가져와 수건으로 싸서 침대 밑에 숨겨두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를 다시 보고 싶다면 ...” 

엄청나게 많은 성인들이 성인의 방식으로 그런 일을 시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 마음대로 다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제게 이것을 해주셔야 해요.” “하나님, 저는 이것을 요구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고 하나님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삶의 첫 자리에 하나님을 모실 때의 세 가지 유익이 있다. 

  
1. 기쁨 - 성취 

하나님을 당신의 삶의 첫 자리에 모시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때, 다른 곳에서 찾던 모든 성취와 보람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편 37편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이 약속을 보십시오. 나의 행복을 주님 안에서 찾는다면 ... 다른 것에서 찾지 않고, 주님 안에서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보장됩니다. “한번 해보거라. 나를 첫 자리에 두어보거라. 나를 제일 먼저 사랑하고 나를 첫째로 경배했을 때, 네가 삶에서 항상 원해온 것을 내가 이루어주는지 보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얘기를 나눠본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제가 후회하는 것은 제 삶을 그리스도께 더 일찍 드리지 못한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성취하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는데 저는 그것을 다른 곳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대신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이미지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이미지는 실체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2. 나를 해방시킨다 -- 자유 

하나님을 당신의 삶의 첫 자리에 모시면 이전에 결코 느껴보지 못한 자유를 경험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당신은 어마어마한 자유를 경험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왜 하나님을 내 삶과 가정의 첫 자리에 모실 때 나의 가정이 자유로워집니까? 

1)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대해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초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서른 명의 사람들을 기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은 서른 명을 동시에 기쁘게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저를 지켜보시는 당신 한 분을 의식하며 살겠습니다. 하나님은 제 삶의 첫 번째이시며, 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항상 옳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매우 편안하게 해줍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줍니다. 
  
2) 내가 자유케 됩니다.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완전한 용서를 받습니다. 더 이상 자책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현재에도 자유로워집니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 깰 수 없던 습관들을 깨뜨릴 새로운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미래에도 자유롭고, 죽음이 두렵지 않으며, 내가 어디로 갈지 압니다. 이렇게 나는 과거, 현재, 미래 모두에 대해 자유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3) 나를 개발시켜 줍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첫 자리에 모실 때 내가 개발됩니다. 나의 잠재력이 개발되고, 하나님께서 처음에 내게 뜻하신 고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모습의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당신은 좋아하는 것을 닮습니다. 당신이 숭배하는 것을 닮습니다. 만일 돈을 좋아하면 물질적이 됩니다. 자신을 숭배하면, 더 이기적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사랑하면 그리스도를 닮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 안에 사랑, 희락, 화평 및 그 외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성품들이 개발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실 때, 당신의 잠재력이 완전히 구현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대로의 온전한 당신이 되고, 당신이 원하는 그대로의 온전한 가정이 되려면, 하나님을 당신의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스티브와 코니 루튼바   

스티브: 

코니와 나는 12년 전에 미션 비에호로 이사 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간선도로를 달리거나, 신문을 펴면 미션 비에호 회사가 광고하는 “캘리포니아의 약속을 이루세요”라는 문구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광고는 바로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집을 샀고, 새 사업을 시작했고, 가정을 이루었고, 하나님께서 세 명의 귀한 자녀를 축복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캘리포니아의 약속을 의지하며 추구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우리가 우상 숭배자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릭의 정의에 따르면,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나와 코니는 아동기부터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을 신뢰해왔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주님을 공경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대학교에서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며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 지 모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1983년에 둘째 아이 카일이 태어났을 때, 우리는 캘리포니아의 약속이 과연 그 말대로 그런 것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많은 이웃들과 친구들의 삶에서 문제들이 불거져 가정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절친한 친구들의 결혼생활이 깨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 위기 속에서 의문이 꼬리를 물던 시기에 한 친구가 그 당시 라구나 힐스 고등학교에서 모이던 작은 교회에서 릭 워렌이라는 목사님이 매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설교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지 않은 지 실로 여러 해 만에 우리는 한 번 가서 이 교회를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내 심령을 가득 채우는지 놀라웠습니다. 정말로 이 강단에서 화살이 나와서 내 심장 한 가운데에 꽂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어지는 몇 주 동안 나는 어서 다음 주가 되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싶어 안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내게 너무나 딱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내가 릭에게 전화를 걸어서 우리의 비밀들을 다 털어놓은 것이 아닌지 따진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나를 대상으로 설교문을 작성한 것이 아닌가 느낄 정도로 내게 딱 맞는 설교였습니다. 그렇게 몇 주와 몇 달을 보내는 동안 우리의 삶에 빛이 비취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습관들을 걸음마 단계로나마 실행하기 시작했고, 물론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어린 자녀를 격려하듯이 우리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또 다른 큰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3년 전에 코니와 내가 몇 달 동안 논의한 후, 우리의 사업체를 매각하고 전임 사역자가 되기로 결정한 때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서 섬기게 하실지 간절히 찾았는데,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우리를 이 교회로 인도하셔서 전임 사역자로 섬기게 하셨습니다. 나는 그 때 정말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목회자의 아들로서 37년 동안 이런 개념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부친께서 설교하셨듯이 나도 설교할 수 없다면 나는 사역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릭 목사님처럼 내가 말씀을 전할 수 없다면, 어떻게 내가 사역자라 자칭하겠는가’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지난 3년 동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나에 대한 예수님의 사역 요건은 릭이나 부친을 닮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된 그대로의 나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다른 사람들과 다른 영적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열정, 능력, 성격, 인생 경험을 내게 주셨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엄청난 죄책감을 떨어버리고 정말로 스티브 루튼바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빌리 그레이엄이나 다른 누구와도 같을 필요가 없습니다. 

캘리포니아의 꿈과 약속을 추구하던 우리 가족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 지난 몇 년 간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코니: 

우리는 삶을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고, 세 명의 자녀를 양육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는 것이 어떤 차이를 일으키는지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몇 년 간 배운 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보이는 본에서 더 많이 배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우리를 긴장시키는 일이어서 우리는 함께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자녀들이 첫 번째 사역 대상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다른 영역들에서 섬기는 것도 좋아하지만, 최우선순위는 우리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가정 사역에서 정말로 요긴한 세 가지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우리가 실수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가족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날마다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랑보다 훨씬 크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규칙들을 따르며, 우리가 부모이지만 우리의 규칙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기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보여주신 그 완전한 본을 우리가 자녀들에게 보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첫 자리에 모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규칙들을 따른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우리는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교회에 갑니다. 스티브와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삶에서 중요한 것, 우리가 사업을 하면서 배운 것,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욱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녀들에게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사람들을 어떻게 섬길 수 있으며,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보여줄 수 있어서 기쁩니다.

캘리포니아의 약속처럼, 사회의 모든 것들은 “이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우상화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가치 위에 가정을 세우기란 쉽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우리 집은 기독교 집안입니다. 우리 집에는 아무 우상도 없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 속에 우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상에는 외적 우상도 있고 내적 우상도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작은 신상들에 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우상은 금속이 아니라, 정신적 우상들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당신의 그 상상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미지입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가진 이미지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바른 이미지를 갖게 하기 어려운 부모의 이미지를 갖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 위에 앉아 계시면서, 당신이 전부 A에 B 하나를 받아 오면 “왜 더 잘하지 못했어”라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성난 의붓아버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곁에 있는 것을 싫어하고 당신의 삶에 대해 지극히 무관심하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유약한 할아버지의 이미지로 생각하여, 당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막고 싶어도 막지 못하고 눈감아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잘못된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우상들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사실 그대로 알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이 정말로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을 알기를, 그것도 정말로 분명히 알기를 원하셔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리셨습니다.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관계를 형성하셨습니다. 내가 직접 하늘의 위대한 영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볼 때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원합니까? 정말로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어느 날 빌립이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명백합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삶을 볼 때 당신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개미들과의 소통을 원하셨다면 개미가 되셨을 것입니다. 만일 개들과의 소통을 원하셨다면, 개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과의 소통을 원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가정을 세우고, 튼튼한 개인의 삶을 세우려면, 처음 이 두 가지 사안을 해결해야 합니다. 

첫째로, 당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로 모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하나님의 참된 이미지를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이 두 가지를 아직 하지 못했다면, 오늘 예수님을 알게 되기를 강력히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예수님, 저는 예수님을 알고 싶습니다. 제 삶에 들어오십시오. 저의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이번 한 주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분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릭 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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