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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불신감 (창 2: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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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감 (창 2:21~25) 
 
 
❚나는 다시 태어나도...

제가 아주 좋아하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가수 하수영 씨가 1976년에 부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입니다. 저도 1년에 한두 번은 노래방 가거든요. 그런데 노래방 가면 가끔 이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를 지금 다 부를 수는 없지만 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 이르러 저와 함께 노래방에 간 사람들이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정말요? 목사님 정말 그럴 겁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다시 태어나도 지금 남편을, 아내를 사랑하고 그 사람과 결혼하시렵니까? 갑자기 여러분 얼굴이 어두워지는데 바로 이 문제에 얽힌 짤막한 이야기 세 개를 들려드리지요.

첫 번째 이야기, 어떤 중년 여성이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나 어제 끔찍한 악몽을 꿨어. 얼마나 끔찍한지 지금도 마음이 심란해.” 친구가 묻습니다. “도대체 무슨 악몽을 꿨기에?” 중년 여성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실은 꿈속에서 우리 남편하고 다시 결혼하는 꿈을 꿨지 뭐야?” 무슨 뜻인지 잘 못 알아들으시는 모양입니다. 특히 남편 분들 말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 어떤 교회 여전도회에서 가정생활 세미나를 개최하고 그 교회에 출석하는 부인들을 초청했습니다. 사모님도 오고 권사님도 오고 집사님, 성도님도 오셨습니다. 그런데 강사가 부인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나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 남편과 결혼하겠다 하는 분 손 들어 보세요”라고 하자 딱 한 사람만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딱 한 사람만 손들었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그 한 사람도 참 신기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강사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남편이 그렇게 잘 해주시나요?” 그러자 그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그 놈이 그 놈인데요 뭐... 이제 겨우 길을 들여 놓았는데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다시 그 짓을 해야 하느니 그냥 지금 남편하고 살렵니다.”

세 번째 이야기, 어느 할머니의 팔순잔치 자리에서 한 손님이 짓궂게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영감님하고 결혼한 지 60년도 넘었는데 이제 너무 오래 살아서 싫증날 만도 하시잖아요? 그럼 할머니는 다시 태어나도 영감님하고 결혼하실 겁니까?” 할머니의 자녀손들 뿐 아니라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하객이 이 짓궂은 질문에 할머니가 어떻게 대답할까 집중하느라 요란스럽던 잔치 자리가 순간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난 다시 태어나도 저 영감과 결혼할거야.” 기대하지 않은 뜻밖의 대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있잖아요? 시골 할머니가 평생 같이 산 영감님을 두 글자로 ‘웬수’라고 부르고 “아니, 아니, 네 글자로 뭐야?”고 묻자 뭐라고 했다고요? ‘평생 웬수’라고 했다지요? 그런데 이 할머니는 60년 넘게 같이 살고도 “다시 태어나도 저 영감하고 결혼한다”니 신기한 일 아닙니까? 더군다나 영감님 성격이 어지간히 괴팍하고 깐깐해서 할머니가 평생 고생하신 것 자녀들뿐 아니라 주변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도 할머니가 그렇게 대답하니 참 뜻밖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자녀들과 하객들이 다 고개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저 영감 괴팍한 성미 맞추며 평생 고생하며 살았는데 이제 겨우 적응되고 남편도 옛날 같이 않아 그런대로 괜찮게 되었는데 왜 생판 모르는 다른 남자 만나 괜한 고생을 다시 한단 말이야? 다시 태어나도 난 저 영감과 꼭 다시 결혼할거야.” 참 멋진 할머니입니다. 사실 이 세 번째 이야기에 등장한 남편이나 첫 번째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한 남편이나 다를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다들 부인에게 그리 잘해주지 못 했고 완벽한 남편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다 부족한 남편들입니다. 그런데 별로 차이가 안 나는 비슷한 남편하고 살면서도 “저 사람하고 또 만날까봐 끔찍하다”는 반응이나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반응도 있는가 하면 “난 다시 태어나도 저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가정의 달 두 번째 주를 맞아 부부와 가족 사이에 존재하는 불신에 틈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부부뿐 아니라 가족 간의 불신의 틈을 해결하는 방법을 말해줍니다. 세 가지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첫째, 아내는 남편의 갈빗대로 만들어 졌다(21절)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가지고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어떤 분은 갈비뼈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체에 수많은 뼈가 있지만 갈비뼈는 심장을 비롯해 가장 중요한 장기를 보호하는 뼈라고 합니다. 그래서 배우자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뜻에서 갈비뼈로 아내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비뼈는 가장 친하고 가깝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아랍에서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내 갈비’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를 가장 소중하고도 가장 가까운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이지요. 서로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신뢰감이 없이는 소중한 존재가 될 수도, 가까운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함께 알고 공유하며, 심지어 부끄러운 것도 함께 알아야 진정한 부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부부가 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24절)는 것입니다. 24절에 부부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했는데 여기서 ‘합한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다바크’입니다. 착 달라붙다, 굳게 결합하다, 충실하다는 세 가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부는 달라붙게 만드셨습니다. 부부는 평생을 손잡고 동행해야 합니다. 무엇을 해도 늘 함께 하고 어디를 가든지 늘 함께 가야 합니다. 평탄한 길, 좋은 길뿐 아니라 험한 길, 힘든 길도 말입니다. 또 하나님은 부부를 굳게 결합하게 만드셨습니다. 너무도 굳게 결합해서 이 부부 사이를 그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가 함께 간다고 말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죽음조차도 부부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어야 합니다. 왜요? 함께 천국 가서 영원히 살 테니까요. 어떤 세상의 어려움이나 시련도, 그 어떤 유혹이나 죄악도, 심지어 죽음조차도 부부를 갈라놓을 수 없도록 우리 부부는 견고하게 결합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은 부부를 서로에게 충실해야(faithful) 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부부는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 믿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부부가 서로 밀착하고, 견고하게 결합되고, 서로에게 충실해지면 그 가정은 어떤 틈도 없는 가정이 됩니다.

셋째,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부부는 이렇게 어떤 가식도 부끄러움도 없어야 합니다. 서로 가식의 옷을 입고 온갖 치장으로 나를 꾸미지 않아도, 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면서, 심지어 부끄러운 모습까지 다 드러내도 서로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믿어주고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부부 사이가, 가족 사이가 과연 그렇습니까? 이렇게 벌거벗어도 서로 부끄럽지 않던 아담 하와 부부가 죄를 지은 후 서로 부끄러워하며(창 3:7)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립니다. 이것은 죄가 서로에게 부끄러울 일, 숨겨야 할 일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죄는 부부 사이에, 부모자식 사이와 가족 사이에 서로 숨겨야 할 부끄러운 일이 생기게 만듭니다. 죄 때문에 서로 숨겨야 할 부끄러운 일이 생기면 가족 간의 신뢰가 깨어져 틈이 생기게 됩니다.

❚가정 안의 불신의 틈

오늘날 가정에 위기가 닥쳐왔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합니다. 가정이 해체되고 붕괴되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이혼율이 세계 1위니 2위니 하는 논쟁이 벌어질 정도로 부부가 갈라서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에 따른 자녀들의 양육권 문제나 자녀들의 방황도 큰 문제입니다. 부부뿐 아니라 부모와 자식 관계도, 또 형제 관계도 큰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위기에 처한 가정, 무너지는 가정이 그토록 많을까요? 물론 가정들마다 나름대로 이유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그 모든 이유를 종합해 보면 ‘불신감’(不信感), 즉 부부 간의 불신감, 부모 자녀 사이, 형제자매 사이, 가족들 간의 불신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부부 사이의 불신의 골이 너무 깊습니다. 한 마디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 인간이 나가서 무슨 딴 짓을 할까?” “혹시 나에게 뭔가 숨기는 것이 없나?” 서로 서로 의심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불신의 틈이 너무 큽니다. 자녀가 부모를 신뢰하지 않고 진심으로 존경하지 못하는데 부모는 이런 자녀에게 권위로 억누르려고만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못 믿어서 “저 놈 어디 가서 딴 짓 안 하나” 의심하고 감시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바로 이런 불신의 틈을 타서 우리 가정을 위협하고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부부나 부모 자식 간의 불신감, 가족들 사이에 있는 불신의 골을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감시’입니다. 그런데 잘 감시한다고 되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의심해서 늦게 집에 들어올 때마다 어디 갔다 왔냐, 누구 만났냐 꼬치꼬치 묻고 “웬 회식이 그렇게 많고 웬 친구 부모는 그렇게 많이 돌아가시냐” 따지고 그것도 부족해 주머니를 뒤지고 핸드폰 통화내역을 확인하면 되겠습니까? 아니요.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꾸미고 완벽한 알리바이도 만들 수 있습니다. 핸드폰 통화야 집에 들어가기 전에 지우면 그만이고 회사동료에게 부탁해서 알리바이도 그럴듯하게 꾸미면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의심해서 자녀의 동선(動線)을 매시간 파악해서 얘가 어딜 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파악하고 핸드폰으로 매 시간 통화하면서 감시하면 자녀들이 딴 짓 못할까요? 아니요. 너무 순진하십니다. 얼마든지 부모 눈을 피해 딴 짓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눈을 살짝 살짝 피해 우리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감시해도 안 되고, 야단 치고 잔소리해도 안 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 들으세요. 예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내 남편이, 아내가, 내 자녀가 진정 예수님을 만나면 된다는 것입니다. 내 남편이 딴 짓 할까봐 감시할 시간에 남편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도록, 그냥 교회 다니는 수준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기도하고 애써야 합니다. 자녀가 딴 짓 하고, 나쁜 길로 갈까봐 감시할 시간에 그 자녀가 예수님 만나도록, 예수님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고 가르치면 되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불신하고 자녀를 불신해서 감시하고 따지기 시작하면 오히려 불신의 틈은 점점 더 벌어집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불신의 틈을 마귀 사탄이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감시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틈을 타서 가족들은 점점 더 내게서 멀어집니다. 가족들 사이에 불신감은 점점 더 커지고 그 틈 때문에 가정이 갈라지고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방법이 틀렸습니다. 불신이나 감시가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 배우자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내 자녀가 진정 하나님을 만나면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경외(敬畏)라는 말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수백 번 나옵니다. 이 경외라는 말은 공경하면서도 두려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믿게 되면 하나님을 공경할 뿐 아니라 두려워하게 됩니다. 죄를 지으려다가도 하나님이 두려워 죄 짓지 않게 됩니다. 전에는 사람들 눈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내의 감시하는 눈, 부모의 눈만 피하면 얼마든지 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사람들은 몰라도, 배우나자 부모는 몰라도 하나님은 아신다고, 빤히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죄 안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가족 사이에 있는 불신의 틈을 메우고 우리 가정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 받은 가정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명심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결코 슈퍼맨 같은 남편, 뭐든지 잘해내는 남편, 완벽한 남편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마찬가지로 완벽한 아내, 내 마음을 100% 만족시키는 아내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불가능한 일입니다. 완벽한 부모나 자녀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불가능합니다. 부족한 것이 당연합니다. 서로에게 완벽한 만족을 줄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남의 남편이나 아내는 완벽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 그 사람하고 한 번 살아보면 어떻게 될까요? 눈에 낀 콩깍지는 사흘이면 떨어지고 금세 그 사람의 부족한 면, 약점이 눈에 보일 것입니다. 자녀는 또 어떻고요? 남의 집 자식들은 왜 한 결 같이 착하고 예의 바르고 공부까지 잘 한답니까? 왜 남의 집 자식은 다 잘나 보이고 완벽해 보입니까? 

그럼 한 번 그 자녀들하고 살아보시겠습니까? 며칠 동안은 서로 눈치 보고 예의 차리느라 조심하겠지요. 하지만 며칠 지나 긴장감이 풀리고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나기 시작하면 그 자녀들의 약점도 보이고 못난 부분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부모도 남의 집 부모는 다 잘 살고 자녀도 잘 이해하고 뒷바라지도 잘 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한 번 그런 부모하고 살아 보세요. 어떻게 되나. 그러니 기억하십시오. 세상에 완벽한 남편이나 아내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에 내 마음을 100% 만족시킬 배우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녀도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팔순 할머니처럼 내 남편 괴팍하고 성격도 이상하지요. 남의 집 남편에 비해 부족한 면도 많이 보이지요. 자식도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내 ‘돕는 배필’입니다. 오늘 본문이 앞에 있는 18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들어 주셨답니다. 이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짝’이라는 우리말과 아주 잘 어울립니다. ‘짝’이 뭡니까? 단순히 서로에게 어울리는 존재, 서로를 돕는 존재가 아닙니다. 짝은 한 쪽이 없으면 쓸모없는 것입니다. 젓가락이 한 쌍이 되어야만 쓸모가 있지 한 짝만 있으면 어디에 씁니까? 장갑도 양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꼭 둘이 되어야만, 한 쌍이 되어야만 쓸모가 있는 것입니다. 부부도 그렇습니다. 한 쪽만 있으면 쓸모가 없어요. 가치가 없습니다. 왜요?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부부란 이렇게 부족하고 약한 두 사람이 만나 짝이 되어서, 한 쌍이 되어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약함을 메워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보고 “넌 왜 그렇게 부족하냐? 왜 그렇게 완전하지 못하냐”고 묻는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이 당연한데, 그래서 하나님이 둘이 만나 서로 돕고 채워주도록 ‘돕는 배필’로 만드신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답은 이것입니다. 남편도 부족하고 불완전합니다. 아내도 부족하고 약합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한 두 사람이 만나 짝이 되어서 조화를 이루고 서로를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 부부입니다. 부모와 자녀도 다 부족합니다. 부모도 부족한 인간이고, 자녀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부족한 부모와 부족한 자녀가 만나 서로를 완성해 나가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가족은 서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 믿어줘야 합니다. 부족하지만 믿어주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상대방을 잘 밀어주고 지원해 주어서 완성을 향해 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이러라고 만드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수행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볼 때 정말 완벽해 보이고 100% 행복해 보이는 가정들, 남편도 아내도 멋지고 자녀도 대단하고 저 가정에 무슨 걱정이 있을까 싶은 가정에도 반드시 틈은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틈이 눈에 안 보이기에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사고가 나서 머리를 다쳤을 때 아예 머리가 터져서 피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좀 끔찍해 보이긴 해도 오히려 안전하다고 합니다. 눈에 안 보이지만 피가 안 나오지만 속으로 터져서 피가 머릿속으로 흘러가면 훨씬 더 위험하다는 군요.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밖으로 안 드러나도 그 속에 안 보이게 틈이 생기면 더 위험합니다. 차라리 좀 시끄럽고 남들 보기에도 문제 있어 보여도 우리 가정이 더 건강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인정해 주십시다. 그리고 포기할 것은 포기합시다. 내 맘대로 내 뜻대로 가족을 움직이려는 욕심은 포기하되 서로의 장점은 장점대로, 또 부족한 면은 부족한 대로 인정하고 믿어줍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만져주십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만들어 가십니다. 흔하디흔한 흙, 얼핏 보기에는 더럽고 지저분해 보이는 진흙을 가지고 도공이 멋진 도자기 작품을 만들어 가듯 하나님의 손길은 내 부족한 배필을, 내 자녀를, 내 부모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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