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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엡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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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엡 6:1~3)


지난 5월 8일은 어버이 날이었습니다. 어버이 날을 여러분은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저는 양쪽 어머니께 전화로 인사만 드리고 내려가 보지 못했습니다. 밤 늦은 시간에 저의 큰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버이날인데 아침에 전화를 못드려서 죄송하다면서 말입니다. 아무튼 축하하고 감사합니다 라고 말로 얼버무리려고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뼈 있는 한 마디를 했습니다. ‘사람이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언제나 때가 있는 법이다. 그 때를 놓치면 좋은 일을 하고도 빛을 보지 못하고 크게 낭패를 볼 때가 있다. 전화를 해도 아침에 하는 전화와 저녁에 하는 전화가 큰 차이가 있을 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인 것 같다. 앞으로 그 때를 잘 사용하여야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조금 있으니 큰 아들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미안했든지 ‘길러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라는 문자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기호들로 된 그림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모든 일에는 항상 때가 있습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 부모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본다면 효도는 할 수 있을 때가 있고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아무리 효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효는 돌아가신 후가 아닌 살아계실 때 한번이라도 더 찾아뵙고, 사랑을 나눌 때 우리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드는 지혜입니다.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의 한 감리교회에서 25년간 주일학교 교사로 섬겼던 앤나 잘비스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11명의 형제 중에 9번째였던 그녀의 나이 41세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잘비스는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던 사람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무덤에서 자신을 낳고 길러주신 어머니의 고마운 사랑을 정기적으로 기념하는 날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잘비스가 어머니날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동기는 그녀가 12살일 때 교회학교 교사였던 어머니가 ‘성경의 어머니들’이라는 공과 공부를 마치면서 ‘주님, 언젠가 이 땅의 모든 자녀들이 어머니를 기억하는 어머니 날을 지키는 날이 오게 하소서’ 라는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비스는 어머니 무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의 기도처럼 반드시 어머니날을 갖게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출석하며 섬기던 앤드루 감리교회에서 1907년 5월 12일 주일 예배에 참석한 약 500여명의 교우들에게 손수 준비한 흰색 카네이션 500송이를 나누어 주고 어머니를 기억하자고 말하며 ‘어머니날’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다음 해인 1908년에 이 캠페인에 유명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백화점 왕이었던 워너메이커가 동참하여 버지니아 앤드루 감리교회와 필라델피아 백화점 강당에서 어머니날 캠페인이 동시에 이어졌습니다. 다시 6년 후인 1914년 헌신적 그리스도인 대통령이었던 우드로우 윌슨의 사인으로 어머니 날이 국가적인 날로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잘비스 여사는 자기 생애 마지막 20여년을 어머니 날을 상업화하려는 사회 풍조에 대항하여 진정하고도 순순한 날로 이 날이 회복되기 위한 싸움에 다시 헌신합니다. 예를 들어 가게에서 카드를 사는 대신 편지를 쓰자고, 가게에서 카네이션을 사지 말고 우리가 손수 카네이션을 만들어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자는 등의 캠페인을 벌렸습니다. 물론 그녀의 그런 노력은 상업주의를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그리스도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헌신으로 우리는 오늘 어버이 날과 어버이 주일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 국무회의에서 처음으로 어머니 날이 제정되고, 1973년 대통령령으로 어버이 날로 변경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쓰여진 시대에도 오늘의 시대 못지않게 급격한 윤리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전통 문화와 정신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시대였습니다. 젊은이들은 돈과 자유를 찾아 부모를 떠나 새로운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로마의 문화가 들어오면서 거대한 로마식 체육관들이 세워지고 그 체육관을 중심으로 젊은이들은 자신의 힘과 기예를 상품화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연예인이 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로 넘쳐났습니다. 성적인 문란으로 인해 가정은 붕괴되고, 부모와 자녀간의 전통적인 관계가 뿌리째 흔들렸습니다. 노인들이 사회에서 존중되기 보다는 사회의 짐이 되었고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가정의 전통적 윤리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상황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부모님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버이에 대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두 가지의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1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주 안에서’ 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부모님들이 나쁜 것을 가르치지는 않지만 잘못된 것을 요구하거나 나쁜 것을 가르치면 그것은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가르침과 요구가 부모님 보다 더 크고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안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든다면 너는 예수를 믿지 말라고 부모님이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관련되기 때문에, 나의 영원한 생명과 관련되기 때문에 모조건 순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잘 설득시키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님의 말씀은 자녀들을 위하고, 사랑해서 하는 말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듣기 싫어하는 것이 잔소리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그 잔소리도 결국은 자녀인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부모님의 중심을 알진대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이유를 ‘이것이 옳으니라’ 는 말씀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옳다는 말은 자연의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켜야할 도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그의 마음에 양심의 법을 주셨습니다. 어떤 문화권에서도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 옳다 라고 가르치는 곳은 없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순종은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의 법, 자연의 법입니다. 순종이라는 단어의 본래 뜻은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부모의 말을 듣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부모에 대한 효를 말할 때 부모님의 말씀을 존중할 줄 아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부모님에 대한 두 번째 책임은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공경’ 이라는 말이 헬라어의 의미로는 ‘굉장한 가치를 지니는 대상에 대한 부드럽고도 친밀한 반응’ 이라는 뜻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것이 외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공경은 내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부모를 존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두 개의 돌 판에 새겨 주셨습니다. 한편의 돌 판에는 1계명부터 4계명까지를 새기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사랑해야 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두 번째 돌 판에는 5계명부터 10계명까지 를 새겼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두 번째 돌 판의 첫 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자연법이 아닙니다. 양심의 법으로 우리들이 도리 상으로 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양심의 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외적인 순종도 중요하지만 그 순종은 부모를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네 부모에게 순종하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신 후에 두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3절입니다. 한 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주신 복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네가 잘되고’ 입니다. 다른 하나는 ‘땅에서 장수하리라’ 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 말씀을 착각하면 안됩니다. 잘된다는 것은 그저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을 잘 섬기며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사회 생활하는 가운데 어떤 상황 속에서도 건강하게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는 지혜와 힘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 보십시오.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고 섬기는 사람 가운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이 있습니까? 형제들과 의가 상한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공경의 의미에서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부모님께 효를 하는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잘합니다. 

저는 솔로몬의 생애를 보면서 효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 왕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그가 올린 기도는 ‘아버지 다윗 왕처럼 나라를 하나님의 정신으로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였습니다. 즉 아버지 다윗을 생각하며 아버지에 대한 공경, 즉 존중함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의 유언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런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지혜와 그가 구하지 않는 모든 부와 명예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아버지 다윗 왕에 대한 공경함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대장부가 되라’ 는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성적으로 문란했습니다. 7천명이나 되는 여인들을 거느렸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지략을 믿었습니다. 그는 주변 나라들의 공주들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정략적인 결혼을 했습니다. 그 결혼의 지참금으로 아버지 다윗이 이루어 놓은 땅들을 이방 민족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는 이방 여인들이 가지고 오는 모든 신상들을 위해 산당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주변 나라들과 정략적인 결혼을 통해 자신의 안전을 도모했습니다. 결국 솔로몬은 망하고 맙니다. 자신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후대들도 망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나라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땅에 우상들이 들끓어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혼탁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의 말과 그 뜻을 거역했습니다.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았고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실패한 왕이 되고 맙니다. 나라가 혼란스러워졌고 자손들은 불행해졌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축복의 계보에 선 사람 가운데 부모를 공경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노아의 아들 셈이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그렇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이 그렇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안에서 효자들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뜻을 존중히 여겼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의 축복의 계보를 이어 나갔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가정들이 효를 행하는 가운데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요셉으로 이어지는 축복의 계보를 이어가는 축복의 가정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잠언서 1장 8-9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부모님을 존중히 여기고 효를 다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에 면류관과 목에 금사슬을 걸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꼭 이뤄질 것을 믿습니다. 

옛날 이조 시대에 어느 임금님이 한양을 떠나서 개성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개성에서 임금님 행차와 함께 큰 행사를 열었습니다. 개성에서는 임금님 행차에 대한 대대적인 광고를 했습니다. 곳곳에 방을 붙였습니다. 깊은 산골에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나이 많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임금님이 개성에 행차하신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날부터 어머니의 안색이 더 안 좋아지셨습니다. 아들이 어머니께 ‘어디 더 아프신 곳이 있으시냐’ 고 물어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이 나라 백성으로서 임금님의 얼굴을, 용안을 한번도 뵙지 못하고 죽게 되는구나. 임금님이 개성에 오신다는데 내가 건강하면 개성으로 가서 임금님의 용안을 한번이라도 뵙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그런 소원을 들은 아들은 임금님이 오시는 날을 기다렸다가 오십리가 넘는 길을 어머니를 업고 개성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임금님이 행차하시는 길목에 서 어머님이 임금님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임금님이 행차하시면서 길가에 어머니를 업고 있는 아들을 보았습니다. 그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임금님이 성 안에 도착해서 신하들에게 길거리에서 어머니를 업고 있던 아들을 데려 오라고 명했습니다. 신하들에 의해 영문도 모른채 불려온 아들은 두려움에 떨며 임금님 앞에 섰습니다. 임금님이 아들에게 ‘병든 어머니를 업고 길가에 서 있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임금님께 모든 일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다 들은 임금님이 그의 효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신하들에게 이 효자에서 금 백냥과 쌀 한 섬을 상으로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개성에는 불효자로 소문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임금님께서 병든 어머니를 업고 임금님의 행차를 본 효자 아들에게 큰 상은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불효자는 임금님이 한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행차하시는 날에 원치도 않는 병든 어머니를 억지로 등에 업고 임금님이 잘 보이는 길목에 서 있었습니다. 행차하던 왕이 그 모습을 보고 그를 불렀습니다. 불효자는 거짓말로 ‘어머니가 임금님의 용안을 뵙고 싶어해서 이렇게 힘들게 업고 길에 나왔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때 임금님이 신하를 불러서 이 아들에게도 금 백냥을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불효자의 나쁜 의도를 잘 알고 있는 신하들이 ‘임금님, 저 놈은 불효자이옵니다. 병든 어머니를 업고 나온 것은 효도하는 마음에서 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해서 큰 상을 받았다고 하니 그 상을 받고 싶어서 어머니를 억지로 업고 나온 것입니다. 저 놈은 상을 줄 것이 아니라 벌을 주어야 마땅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임금님은 허허 웃으시면서 ‘효도는 흉내만 내도 좋은 것이니라. 그런고로 저에게도 상을 주거라’고 말했습니다. 임금님의 이야기를 들은 불효자는 크게 뉘우치고 진짜 효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지요? ‘효도는 흉내만 내어도 좋은 것이니라’는 임금님의 말씀은 새겨 들을만한 이야기입니다. 

어버이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부모님께 진정한 효를 다시 한번 다짐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효도는 흉내만 내도 좋은 것이니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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