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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참 섬김의 도리 (막 7: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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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섬김의 도리 (막 7:10~13)


효가 사라지고 경로정신이 사라져 간다고들 개탄하기도 합니다. 왜 개탄하는가 할 때에 우선 효의 표현 방식부터가 달라졌다고들 합니다. 무조건 순종이 아니라 자기주장도 하는 게 요즈음 세대입니다. 이젠 사흘 눈 속에 빌어 죽순을 얻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럴 시간도 없거니와 슈퍼에 가면 언제나 쉽게 살 수 있습니다. 효의 개념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심청이만큼 불효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 눈뜨기 위해 딸이 죽어야했다면 그 아버지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야 할텐데, 그런 불효가 어디 있느냐는 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만고 효녀 심청인데 요줌 세대에게는 아니라고들 합니다.

현대 도시사회가 정착농경 시대와 같을 순 없습니다. 옛날 노인은 권위와 지혜의 절대적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일을 하는 생산자였습니다. 거기다 길어야 인생 60이었습니다. 모시기도 쉬웠습니다. 지금의 산업사회에선 노인의 의미부터 달라집니다. 도시생활에선 우선 기동성이 있어야 합니다. 단칸셋방에서 노인을 모시기란 쉽지 않습니니다. 도시에 오면 농촌노인의 지혜는 쓸모가 없어집니다. 거기다 이젠 장수시대, 80-90까지 입니다. 자식도 환갑 노인인데. 결론은 효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제일 편하고 그럴 수 있을 때 제일 행복한 노인이 된다고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어야 한다합니다. 절대로 서럽다고 우는 노인이 돼선 안 된다합니다. 찾아오면 반갑고 안 와도 괜찮은 노인이 돼야 한다합니다.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말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 어떻게 키웠기에 부모 입에서 이 말이 나오게 됐을까 물어 볼때 세상에 너밖에 없다고 키웠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니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부모 생각인들 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기를 위해 모든 걸 잘 해주는 사람, 죽을 때까지. 그게 당연한 걸로 알고 있는데, 효라니 생각조차 말아야 한 합니다. 잘난 놈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재주 있다고 논밭 팔아 도시로 유학시켜 놓으면 시골 부모 무시나 안 하면 다행이라 합니다. 제 잘나 잘된 줄 안다합니다. 진짜 효자는 공부 재주 없다고 구박받고 자란 사람이라 합니다. 집일이나 거들며 그럭저럭 지낸 사람이 집에서 부모를 모신다합니다. 그래서 굽은 나무 선산 지키고 버리데기 효자라는 말도 합니다. 그러니 신체적으로 건강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80, 90을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걸을 수 있는 노인이 돼야 한다고들 합니다.

9988곧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아야 한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건강에 각별 히 유념해야 한다고 합니다. 옛말에도 10년 우환에 효자 없다고 하였습니다. 거기다 요즈음 젊은이는 참을성도, 인내심도 없다합니다. 경제적 자립도 해야 한다 합니다. 죽을 때까지 자기 쓸 돈은 있어야 한다합니다. 사는 집도 저당 잡혀가며 다 쓰고 죽어야 한다 합니다.  손자에게도 용돈을 주는 노인이 돼야지 얻어 쓰는 신세가 되면 그날부터 설움덩이가 된다 합니다. 따라서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는 한 생산적 노인이 돼야 한다합니다. 75, 80까지 현역으로 뛰어야 한다합니다. 선진국에선 이 나이까지는 아직 노인이라 부르지도 않는다하기도 합니다.  이럴 수 있을 때 자녀들도 부담 없이 부모를 찾아 뵐 수 있다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정말 화기애애한 만남이요, 가정이 된다합니다.

사실 효는 아이들이 대여섯살 때까지 이미 낳고 길러주신 부모의 은혜를 다 갚은 걸로 생각하면 편하다 하기도 합니다. 아장거리는 걸음, 말 한마디 새로 익힐 적마다 아 손뼉을 치며 감동합니다. 그 순간을 지켜본다는 게 얼마나 즐거웠던가. 안아도 주고 사진도 찍고 세상의 기쁨을 아이들은 그때 다 안겨주지 않았느냐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효는 하되 바라지 않는 건강한 노년을 맞자고 하기도 합니다. 

서양에서 어떤 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모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서양에서 매우 드물다 합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아버지를 모실 수박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나이 점점 많으니까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해서 음식 잡수시다가도 음식을 자꾸 흘립니다. 그런데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한국도 그렇게 되어오지마는 서양에서는 큰상에서 온 가족이 다 앉아서 함께 먹습니다. 이 가정도 그렇게 한 상에서 식사를 하는 데 제일 높은데 앉은 할아버지가 음식을 줄줄 흘리니까 이거 참 창피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들과 며느리가 보기가 답답합니다. 그래서 부득이“미안 하지만, 할아버지는 딴 곳에서 잡수세요”하고 딴 상에다 잡수게 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대접하느라고 딴 상에다 드리는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서양에서는 대접이 아닙니다. 그저 주방 한 옆에 조그마한 상에다 따로 잡수시게 했는데, 그것도 아마 떠 넣기가 어려우니까 그랬겠지요, 그릇을 들고서 잡수려고 하더니 또 그릇을 떨어뜨려서 자꾸 깨뜨립니다. 자 그러니 그 다음에는 며느리가 성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거 원 안 깨지는 그릇이 없겠나하고 돌아보니까 주방 옆에 고양이 밥 주는 주발이 있는데 그게 나무 그릇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씻어서 거기에다 밥을 담아 들입니다. 아마 씻기야 잘 씻었겠지요.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가 이제는 주방 옆에 앉아서 그 고양이 밥 주발에 갖다 드리는 것을 조금씩 잡수고 그렇게 지냅니다. 

한 번은 그 아들과 며느리가 거리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까 너 댓 살 난 아들아이가 나무 목침 같은 것을 하나 갖다 놓고는 주머니칼로 부지런히 가운데를 파냅니다. 그래서“야, 너 무엇 하느냐?”하고 물어보니까“나무 그릇 만들어요, 나무그릇”합니다. “나무그릇은 만들어서 뭘 하려고 그러느냐?”하고 다시 물어보니까“아버지 늙은 다음에 밥 담아 드려야지요”
우리가 웃으시는데 이것은 꼭 우리가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부모를 잘 공경하지 않으면 이 다음에 우리 자녀가 우리를 공경하지 않습니다.
 
효도하고 순한 사람의 그 아들이 효도하고 순한 아들을 낳고 거스리는 아들은 이 다음에 자기를 거스리는 아들을 낳는 다(효순환생효순자 오역환생오역자(孝順還生孝順子 惡逆還生惡逆者)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부모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비들은 부지불각 중에 부엉이 효(梟)자를 쓰면 글 쓴 손가락을 등불에 태우는 소지(燒指)로 속죄했다합니다. 이 한자를 보기만 해도 세안(洗眼)이라 하여 더럽혀진 눈을 씻었다합니다. 부엉이는 제 어버이를 잡아먹는 새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불효를 응징할 때 부엉이를 잡아 나뭇가지에 널어놓곤 했기에 나무(木) 위에 새(鳥)를 얹어 부엉이 효(梟)자로 삼았다합니다. 죄인 목을 베어 전시하는 것을 효수(梟首)라 함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합니다. 그래선지 새타령에 온갖 잡새 다 날아드는데 부엉이만은 소외시켰고 소설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에도 초청되지 않았다합니다. 그런데 효의 윤리 풍토인 우리나라에 부엉이인간이 속출하고 있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부모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사사 시대 베들레헴에 나오미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얻어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한 남편의 아내가 되고, 또 두 아들까지 얻게 되었으니, 나오미는 참으로 복된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던 나오미는 가나안을 덮친 기근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나오미와 가족들은 기근을 피하기 위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버리고 모압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사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약속하신 거룩한 땅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애굽에서 400년 동안의 종살이를 청산하고 40년 간의 광야 생활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와 그 가족들은 너무나도 쉽게 약속의 땅을 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이들의 앞길에는 더 큰 어려움과 고난이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모압에 이주한 나오미는 그 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나오미는 이전 가나안에 있을 때보다 더 못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다시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귀향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두 며느리를 고향 모압 사람에게로 돌려보내려고 하였습니다. 모압 여인들인 며느리들은 아무래도 이스라엘 땅에서 생활하기가 어려웠기에, 차라리 고향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시어머니였습니다.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딸들아 되돌아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룻1:11-14)

큰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돌아가나 둘째 며느리 룻은 재가를 반대하고 끝끝내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백성이 자기의 백성이 되며,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룻은 홀로된 시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하며, 타국에 이르기까지 따라 오는 참으로 신실하고 훌륭한 며느리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경외하던 랍비 요시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요시아가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시아야, 너는 하늘나라에 가면 '레네스'라는 푸주간 주인 곁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푸줏간 주인을 제일 멸시하였습니다. 

요시아는 꿈에서 깨어나서도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메시지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레네스'라는 사람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한 시골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요시아가 직접 찾아가 "왜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제가 노모님을 모시고 있는데 노모님이 병석에 누워 계셔서 갈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요시아는 그 순가 하나님께서 왜 그 꿈을 보여주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부모를 귀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 두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한 신문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소개 되었습니다. 서울 금천구의 이효진(29)이라는 여인이 시어머니 이성숙(52)에게 간 이식을 해 준 이야기 입니다. 이효진씨의 시어머니는 간 이식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성숙씨의 남편과 아들 삼형제는 모두 이식 부적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때에 며느리가 자원했습니다. 조직검사 끝에 판정을 받았습니다. 시어머니는 앞으로 아이도 낳아야 하고, 직장도 다녀야 함으로 며느리의 간을 이식 받을 수 없다고 거부 했으나 며느리의 완강한 청으로 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삼성병원에서 10시간의 사투를 거친 수술을 마친 며느리는 “겁도 났지만 시어머니를 친어머니 같이 여겨 당연한 도리로 수술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희생을 동반한 아름다운 효의 모습입니다. 부모를 위한 자녀들의 희생적 효는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복되게 하는 일입니다. 

윌슨이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계속 공부를 할 수 없었는데 그의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과 피땀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합니다. 윌슨이 대학을 졸업하는 날,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참석했으나 어머니는 평소에 입는 남루한 옷을 입었고 전차에 시달리면서 참석한 것입니다. 대학총장이 수석 졸업자인 윌슨에게 상장과 상품, 금메달을 증정하였습니다. 그것을 받아든 윌슨은 자기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어머니의 희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희생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고 어머니 역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윌슨은 단상에서 목 메인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의 영광은 저의 것이 아닙니다. 이 영광은 저를 이렇게 기르셨고 가난 중에서 도 온갖 고생을 다하시면서 저의 학비를 대어주셔서 공부하게 하신 제 어머님의 것입니다." 

아들의 연설이 들려올 때 윌슨의 어머니는 남루한 옷차림과 초라함을 부끄러워하며 고개조차 못 드시는 것이었지만 윌슨은 자기의 목에 걸려 있는 금메달을 벗어서 어머니의 목에 걸어주었고 그가 받은 상장과 상품도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주었습니다. 정말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학생들과 학부형들은 그 감격적인 장면에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그 어머니의 사랑의 희생과 효성을 갈채하였습니다. 

충북 제천 출신으로 판사가 된 분이 있는데 그는 허리가 굽은 장애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술과 도박에 빠져 있었습니다. 손가락까지 잘라봤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다시 노름을 했습니다. 손가락이 다 잘려나가 손으로 화투를 잡을 수 없게 되었을 땐 대리자를 세워 노름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가산을 탕진하고, 온 가족은 어머니의 삯바느질 품을 팔아 겨우 연명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한밤중에 집에 들어와서 노름 밑천을 내놓으라고 어머니를 닦달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홧김에 마루에 있던 어린 그를 마당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이 일로 그는 곱사등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함께 놀아줄 친구들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만 열심히 하였고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습니다. 판사가 된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아버지를 언제나 잘 모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판사를 존경하였습니다. 효도하는 모습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효성에도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복음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효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부모님이기에 효도 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었는데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참다운 부모공경의 차원입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어떤 처지나 어떤 상황에서도 공경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참다운 신앙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손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데 대하여 시비를 걸어오자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말을 빌어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다음(6,7절), 그들이 제5계명을 어떻게 가증스러운 방법으로 폐기하고 있는가를 통박함으로써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합니다.  유대의 '장로의 유전'이 인간을 어떤 모양으로 타락하게 하며, 율법 자체를 모독하고 있는가를 예수께서는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유대의 '장로의 유전'에 집착한다는 것은 인간을 위선자로 만들기에 합당한 독소가 들어 있다는 합니다.  부모 공경에 대한 율법의 가르침은 인간의 계명 중 첫째 계명입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막 7:10) 이란 말씀의 상반절은 십계명 중 제5계명을 인용하신 것이고(출20:12), 하반절은 이 계명에 대한 보충 교훈으로서 출애굽기21:17에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제5계명은 인간에 대한 계명 중 첫째 계명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생활의 기본이 '효'에 있음을 가르치며 만일 불효가 심하면 사형에까지 처하도록 율법으로 정해 놓은 것은 그만큼 부모 공경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분이며 경건한 삶의 의무입니다. 효는 모든 덕의 근본입니다. 그리고 자기 수양과 자기 정립의 기초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다만 물질적인 공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효는 전인격적인 애정의 봉사이어야 하고 마음으로부터의 존경이어야 합니다. 조그마한 인색함이나 오만도 그 앞에서는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효는 집 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 밖의 사회적 처신에 있어서도 그의 언행이 부모의 명예를 손상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품성과 행동은 가정교육이 바탕이 되어 있으므로 그의 품행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곧 그 부모의 명예에 직접 관련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 공경을 회피케 하는 유대 장로들의 유전을 지적합니다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막 7:11)입니다.

'고르반'이란 하나님께 드린 헌물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다 거룩한 목적에 우선적으로 바쳐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원래는 부모에게 공양하는 물질을 하나님께 바치는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어떤 물질이 최선의 목적에 사용되었을 때 차선의 목적은 이미 그 안에서 동시에 달성되었다고 보거나, 최선의 목적이 달성되면 차선의 목적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들의 유전은 이러한 고르반의 진의를 악용하도록 하는 올무가 되었습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막7:12-13)합니다.

유대 장로들의 유전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고르반 제도를 악용하도록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부모를 부양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자기 재산이 하나님께 '고르반'되었다고 서원함으로써 부모부양의 책임에서 벗어났으며, 그렇다고 '고르반'된 자기 재산을 당장 하나님께 바치지 아니해도 되었으므로 이러한 장로들의 유전은 백성들로 하여금  제5계명을 범하는 죄와  '고르반'되었다고 서약하고서도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께 바치지도 아니하는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지적한 유대 장로들의 유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부모님과 어르신들을 바로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것을 교훈 하십니다

이 말씀을 되새기며 참 섬김의 도리를 다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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