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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사랑의 가족 (막 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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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가족 (막 3:31~35)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어 예수를 불렀다. 무리가 예수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 구부러진 못
어버이 주일을 앞두고 한 주간 내내 부모님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세상을 앞서 떠나가신 부모 앞에서 죄인 아닌 자식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치사랑이 내리사랑을 못 당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일찌감치 교회에 다닐 꿈도 꾸지 않는 막내아들을 하나님께 바쳐버린 어머니의 기도 덕분인지/때문인지 지금 목사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나하고는 상의도 없이 주님의 제단에 아들을 바쳐버린 어머니가 고맙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합니다. 어머니를 상기할 때마다 제게 떠오르는 느낌은 따스함과 고요함입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일본 작가인 엔도 슈사쿠가 <<깊은 강>>이라는 책에서 고백하고 있는 바는 바로 저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소년 시절부터 어머니를 통해서, 내가 단지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따스함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손을 잡았을 때의 그 따스함, 안아 주셨을 때의 체온의 따스함, 사랑의 따스함, 형제들에 비해 특히 모자랐던 나를 돌보아 주시던 따스함! 어머니는 나에게 당신이 말하는 양파[하나님] 이야기를 언제나 해주셨습니다만 그때 어머니께는 양파란 이 따스함보다 한층 강한 응어리, 즉 사랑 그 자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따스함의 근원에 있었던 것도 양파의 한 부분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엔도 슈사쿠, <<깊은 강>>, 181쪽 오오츠가 미츠코에게 보낸 편지 중

저도 어머니의 따뜻함과 고요함의 근원에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한 부분이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시인 정호승은 벽에서 빼낸 구부러진 못에서 늙어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시인은 벽에서 빼낸 구부러진 못을 차마 옛날처럼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벽에 쾅쾅 박지 못하고, 헝겊으로 닦아놓는 까닭은 그 못이 아버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공중목욕탕에 가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 드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말 그대로 아버지는 구부러진 못과 같습니다.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아무리 펴려고 해보아도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못> 부분

가족의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의 총량을 온 몸으로 견뎌내고 이제 세월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하고 있는 늙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애잔합니다. 구부러진 아버지의 등은 어쩌면 가족들을 위해 그가 평생 감당해야 했던 희생과 헌신의 징표인지도 모릅니다. 가족이 또는 가정이 무엇이길래 부모들은 그렇게 희생적인 사랑을 보이는 것일까요?

• 예수의 출가
백과사전은 가정을 “혼인관계 및 혈연관계로 구성된 가족구성원들이 공동 생활하는 장소 또는 조직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좁은 의미의 가정은 주로 가족이 살아가는 공간적 장소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의 가정은 인간관계에 초점이 주어지는 가족(family), 생활과 거주 장소에 초점이 주어지는 집(house), 공동의 소득에 근거한 생산 소비 활동의 단위인 가계(household), 의식주를 비롯한 일련의 가족자원 관리활동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브리태니커 사전). 참 건조한 규정이지요? 가정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우리 속에 어떤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떤 이는 가정을 ‘둥지’ 혹은 ‘품’으로 표현합니다. 그에게 가정은 세상살이에 지친 그를 품어주고 세상에서 받은 상처와 스트레스를 해독해주는 곳입니다. 어떤 이는 가정을 ‘감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권위주의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이들이 대개 그렇습니다. ‘하라’와 ‘하지 말라’는 말이 쉼 없이 울려 퍼지는 가정은 벗어나고픈 질곡이 됩니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부모의 보호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출12:1) 명령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집을 지키고 있던 큰 아들은 착한 아들이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헤아릴 줄 모르는 철부지였습니다. 

예수님도 가정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혼인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새롭게 탄생하는 가정을 축복하셨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킴으로 잔치의 흥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부부 관계를 파경으로 몰아가는 일을 막으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정이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라는 목표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가두는 차꼬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역사 변혁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내 자식은 그 일에 끼지 않았으면 하는 게 부모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일까요? 주님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 달라는 어느 제자의 요청에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눅9:6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매정한 말씀처럼 들리는 게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마10:37)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가정은 우리를 사사로운 정리와 인정에 묶어두어 보편적인 가치나 공공성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패거리 의식’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끈끈한 정’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좋지요. 하지만 그 끈끈한 정이 불의를 합리화하는 데 활용된다면 그것은 단연코 극복되어야 할 정서입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반칙을 하더라도 우리 편이니까 혹은 잘 아는 사람이니까 눈감아준다면 사회의 기초인 공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사회가 외형적인 근대화는 이루었지만 정신적 의미의 근대화는 이루지 못했다는 지적은 정당합니다. 도덕적 정당성이나 덕이 없는 사람조차 잘 아는 사람이기에, 내 식구이기에 용납하는 일 때문에 우리 사회는 불신의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적으로 출가한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주체라 할 수 있습니다. 

• 가족에 대한 재정의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집을 떠나셨습니다. 유대사회에서 그것은 부덕한 행위였습니다. 주님은 한 집안의 장남이셨고, 장남은 아버지를 대신 해 가족들을 건사할 책임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에 대해 들려오는 풍문은 가족 모두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미쳤다’, ‘귀신들렸다’는 소문이 고향 마을에까지 이르렀으니, 가문의 망신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온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의 불신을 탓하기에 앞서 그들이 느꼈을 상실감을 헤아려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족들은 주님이 계신 집 안에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님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주님은 가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혈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태도야말로 진정한 가족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를 가장으로 하여 모든 사람이 가족이 되고 형제가 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계셨던 것입니다. 들뢰즈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말을 빌자면 주님은 혈연으로서의 가족을 ‘탈영토화’ 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새로운 가족으로 ‘재영토화’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셈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그런 뜻에 부응하여 형성된 새로운 가족입니다. 교회에 속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됩니다. 성도들은 기쁨도 함께 하고, 슬픔도 함께 하는 새로운 가족입니다. 

-세상은 그가 가진 영향력이나 힘의 크기에 따라 사람들의 서열을 매깁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서로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해 나갑니다. 힘과 재능의 크기는 역할의 차이일 뿐 서열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는 스스로 만족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풍성하게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세상은 쓸모를 가지고 사람들의 우열을 매기지만, 교회는 가장 연약한 지체가 가장 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이 원리가 깨지면 교회는 새로운 세상의 전초기지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경쟁’이지만, 교회를 지배하는 원리는 ‘협동’입니다. 교회는 남보다 앞서가는 열 걸음을 경축하기보다는 남들과 함께 걷는 한 걸음을 귀히 여깁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또 다른 원리는 ‘지배’이지만, 교회를 이끄는 원리는 ‘섬김’입니다. 예수님은 뭇 민족의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은인으로 행세하지만 제자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며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눅22:24-30)고 말씀하셨습니다. 

• 아방가르드
우리는 폭력과 부패가 만연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무례함이 일상적으로 저질러지는 세상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과 행태들이 두려움도 없이 자행되는 세상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족을 만들라고 명하십니다. 상호귀속의 공동체, 나눔과 평화와 친절함을 경험할 수 있는 공동체, 어느 누구도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공동체, 연약한 사람도 무능력한 사람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받고 받아들여지는 공동체 말입니다. 이런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우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그들의 가슴에 자존감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섬기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들, 그들에게 주어지는 명예로운 호칭은 ‘Familia Dei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가버나움 속을 심방했습니다. 저는 속원들이 서로를 얼마나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는지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속원들 모두 중앙 아메리카의 카리브해에 있는 자그마한 섬나라 아이티(Haiti)에 살고 있는 소년 소녀들의 대부모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백만의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오다가, 그나마 병이 들어 노동력을 잃어 버려진 이들의 후예들이 그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그 나라 아이들은 진흙으로 만든 쿠키를 먹고 지냅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속원들 모두 그들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몸이 아프면 진료를 받고,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후원금을 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그런 인연은 이제 아이들의 사진을 걸어놓고 날마다 기도 중에 기억하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주님이 가족의 외연을 넓힌 아방가르드였다면 그들 또한 가족의 울타리를 확장한 아방가르드들입니다. 그들 가슴에 심겨진 주님의 마음이 속원들로 하여금 그런 일에 동참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물론 가버나움 속 식구들이 아니더라도 월드 비전을 통해서, 굿네이버스를 통해서, 기타 다른 단체들을 통해서 이런 일을 이미 실천하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입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나 자신을 바칠 때 가장 깊은 기쁨을 맛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이들 속에 가장 값진 보화를 숨겨 두셨습니다. 그들에게 다가서는 이만이 그 보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어머니는 사랑의 따스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은 그런 어머니를 만나지 못해 쓸쓸한 이들이 많습니다. 혈육의 어머니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도 마땅한 일이지만, 냉랭한 세상에서 가슴앓이 하고 있는 이들에게 사랑의 따스함을 전하는 일도 또한 소중한 일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품고 세상에 나가 가족의 외연을 끝없이 넓혀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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