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버이주일] 자녀들아 너희 부모에게 (엡 6:1~4)

  • 잡초 잡초
  • 334
  • 0

첨부 1


자녀들아 너희 부모에게  (엡 6:1~4)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5월 8일 어버이날, 교회주변 저녁시간 풍경을 보니 식당마다 불이 다 밝혀져 있었고, 부모님 모신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하는 모습, 참 보기 좋았습니다. 교회력으로는 5월 첫 주일이 어린이주일, 5월 둘째 주일이 어버이주일인데, 순서가 좀 잘못되었다 생각됩니다. 

성경을 보면,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말씀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난 후, 이어서 “또 아버지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말씀하십니다. 부모님 순종과 공경이 먼저이고, 자녀 양육의 문제가 그 다음입니다. 

이 말씀을 따르면, 어린이주일을 먼저 지키고 어버이주일을 지키기보다는, 어버이주일을 먼저 지키고 어린이주일을 지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신학적인 큰 고민 없이 5월 5일 어린이날, 5월 8일 어버이날로 지키는 우리사회 규례를 따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순서를 바로 잡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가정들을 가만 보면, 부모자식 관계에서 무게중심이 자식에게 너무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중심이 기울어진 배와 같아 보입니다. 이제는, 이대로 가다가다는 침몰할 수밖에 없는 배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옛말에 “내리사랑(손윗사람의 손아랫사람에 대한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치’ 접두사, 위로 올라가다는 뜻, 치닫다, 치솟다;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에 대한 사랑)은 없다”고 했습니다. 왜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는가 생각도 들지만, 안타까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정의 중심이 자식에게만 기울어지고, 내리사랑에만 기울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위아래 서로 상통하는 관계의 ‘중심 가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사회변동이 급변한다 해도, 변하지 않고 흐르는 중심 가치, 전통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문제는 한쪽으로 치우친 가족관계 속에서는,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존경받기는커녕 도리어 자식들에게 복수당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데 있습니다. 자식으로부터 순종과 공경을 받을 수 있는 부모의 권위는 무엇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까? 

오늘 저는, 보통 말하는 天倫이라는 부모자식관계가 아니라, 자식들이 부모님께 순종해야만 하는 이유, 원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네 부모님께 순종하고,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그렇게 하면 네가 잘 되고, 땅에서 長壽하리라 하셨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문제의 요인은, 잘못된 자식사랑 특히 자식교육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아버지로 살아가기 참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집에 돈만 잘 벌어다 주면,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었고,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돈 잘 벌어다 주는 것이 최고의 아버지였을 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살림과 육아는 책임진 어머니 몫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들의 사회활동이 커지면서, 어머니가 책임지던 가정살림과 자녀교육의 축이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버지, 어머니가 자식 교육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돈 벌어 왔는데, 그것을 몰라주는 자식들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식들은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미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자녀교육은, 때를 놓치면, 때를 놓친 만큼 놓친 때의 교육은, 그저 상실로 남고 맙니다. 돈 많이 번 다음에, 승진한 다음에, 아파트 장만한 다음에, 자녀에게 신경 쓰겠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을, 자식들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자식들은 때를 놓친 부모사랑이 상실된 채로 성장해갑니다. 그로 인한 부모자식간의 간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유치원 차가 오면, 배 아프다고 방바닥에 뒹구는 아이, 유치원 차만 가고나면 배 아프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자식에게 못다 해 준 사랑 갚으려고 가끔 외식하며 맛있는 거 사줍니다. 유명 메이커 옷, 신발도 사줍니다. 값나가는 장난감도 안겨줍니다. 비싼 교재 사줍니다. 좋은 학원 보내줍니다.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40년 만에, GNP 400배를 일궈낸 나라입니다. 소득 1만 불 달성하는 데, 일본은 100년 미국은 180년 영국은 200년 걸렸지만, 우리는 30년 만에 해낸 나라입니다. 50여년 전만해도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한강의 기적이라 할 수 있는 이 놀라운 성과 뒤에는,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과 자식사랑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교육열과 자식사랑이 우리나라를 여기까지 오게는 했지만, 이제 는 그것이 도리어 나라를 위태하게 만들어버린 요인이 되었습니다. 사교육 팽배, 무리한 선행학습(1, 2년 먼저 다 배워오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선생님들도 학원가서 배워오라고 합니다. 선행학습이 교육학적으로도 도움이 되지도 못하는데 말입니다, 뇌 발달에 맞게 교육해야 효과가 있고, 의미가 있는데, 말입니다. 선행학습 만큼 고비용저효율 없습니다. 선행학습하는 돈의 1/3만, 제 때 교육, 제 때 복습 교육에 투자하면, 공교육도 살고, 학생도 살고, 부모도 살고 모두 삽니다. 선행학습, 월반학습은 천재 끼가 있는 소수의 영재들에게만 필요한 방법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모두 다 천재로 만들려고 합니다). 조기유학으로 인한 기러기아빠, 팽귄아빠 문제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과도한 교육열로 인한 저출산의 문제는 우려할 만한 수준입니다. 지금과 같은 출산율이라면 800년 뒤에는, 지구상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어지고 만다고 합니다. 과도한 교육열의 부메랑 중 하나는, 급속한 고령화입니다. 우리나라가 고령화 되는 속도가 가장 빠릅니다. 이 모든 문제들보다 더 염려스러운 궁극적인 문제 하나가 더 있습니다. 부모자식 간의 관계단절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권위상실입니다. 부모의 존재가치에 대한 자식의 무관심, 순종하지 않음, 공경하지 않음, 불효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러라고 키운 자식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현실은 정반대로 나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대다수의 부모들은 우리시대의 大勢요, 時流요 흐름인 왜곡된 자식사랑, 자식교육에 편승하여, 인생을 다 소진하고 있습니다. 오직 자식의 일류대학 진학, 취직, 성공 그것이 자식교육, 자식사랑의 전부입니다. 그 다음은 없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 있다지요. 한국에서 자식 교육시키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1) 엄마의 정보력, (2) 아빠의 능력, 아빠의 능력만으로는 어림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3)할아버지의 경제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야, 소위 말하는 이 시대 주류 사람들의 교육을 시킬 수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중에, 그러지 못하신 분이 계시더라도 절대로 낙망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그 길이, 오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하나님 언약의 중보자가 되어야]

자식들로부터 존경받고, 공경 받고, 순종 받는 길이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권위를 회복하는 길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모의 권위,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부모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 보십시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順從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恭敬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중요한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長壽하리라.”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문자적인 의미를 뛰어넘는, 역사적인 의미에 관심을 기울이셔야 합니다. 이 말씀은 그냥, 부모님께 자식들이 무조건 순종하라, 공경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님께 順從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恭敬해야만 하는 이유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부모 되신 분들이 痛感하셔야만 합니다.

그 비밀을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요즘 쓰는 말 있잖습니까? 부모는 자식에 대한 수직적인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데, 어느 자식이 부모님 공경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부모가 자식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 생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무엇에 의해서, 부모가 자식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중보자, 전수자가 될 때입니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로부터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하는 계승자가 될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言約이 부모 자식의 관계 속에서 전수되고 계승이 될 때, 거기에서부터 자식이 부모님께 순종하고, 공경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이런 말씀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기에 무슨 역사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까요?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제일 먼저, 아브라함에게 임했습니다(창 12, 1-3). 그 말씀이 아브라함에게서 그 아들 이삭에게로 전수됩니다. 그리고 이삭에게 전수된 그 언약의 말씀이 야곱에게로 계승됩니다. 세대 간의 고리고리마다,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언약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치는 도망자 야곱이 루스 광야에서 밤에 곤히 잠잘 때, 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하신 한 마디 말씀이 있지요. “나는 여호와니 너의 祖父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 28, 13-14).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이삭에게서 야곱에게로, 야곱에게서 그와 그의 후손에게로 전수되고 계승되었고, 계승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에, 자식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고, 공경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통로, 전수자, 중보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자식에게 순종 받고, 공경 받는 부모의 권위, 축복의 통로가 되는 특권은, 부모가 되었다고 해서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부모 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회복할 때, 주어집니다. 그럴 때, 자식은 부모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공경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의 첫 책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이 족보에는 무엇이 흐르고 있습니까? 이 족보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전수되고 계승되는 부모자식관계가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저 단순한 혈통을 말하는 족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통로가 된 족보가 어떻게 흘러왔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경건한 유대인 부모는 자식들에게 반드시 ‘쉐마 교육’을 시킵니다. ‘쉐마’(שםע,들으라)는 뜻이지요. 신명기 6, 4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唯一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쉐마 교육을 평생 시킵니다. 자식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전수하는 부모의 역할을 한다는 거지요. 이 ‘쉐마’교육이, 모든 교육의 근본이고 기본입니다. 

또 유대인 아버지들은 자식에게 머리에 손을 얹어 말씀의 전수자 아버지로서 축복기도해 줍니다. 그 기도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는데, 지금까지도 계승되고 있습니다. 자식이 의자에 앉으면, 아버지가 서서 자식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기도해줍니다. 특별히 아버지가 임종할 때, 자식에게 비는 축복의 기도는, 대를 잇는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한국학생들은 고등학생 때가지는 세계 올림피아드에서 1-3등을 휩씁니다. 그런데도 노벨상은 못 받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올림피아드에서 상위권에 입상했다는 소식 못 듣습니다. 그런데도, 노벨상의 30%가 유대인들이 받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느라 고등학교 때가지, 신앙교육도 유보시킨 채, 진을 다 뺍니다. 그러고는, 정작 공부다운 공부가 필요한 대학시절에는 공부 안하고, 취업한다고 취업공부에 매달립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고등학생들에게도 오전 내내 토라를 가르칩니다. 탈무드를 가지고 토론하고 논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계 유수대학에 진학합니다. 대학진학해서 그때부터 그들은 평생을 공부합니다. 

자식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자식과 공감하는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기준을 둔 분명한 원칙과 일관성을 가지고 자녀들과 공감할 수 있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선택권을 자식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대신 판단해주고, 대신 생각해주고, 대신 결정해주기 보다는, 자녀의 판단을 믿고, 설령 자녀의 판단이 잘못되었더라도, 자신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자녀와 대화하기 위해서 먼저 경청해야 하고, 부모의 견해 ‘나’를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너 정말 이럴 거야?” “너는 도대체 왜 그래?” “너 또 양말 이렇게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놨구나, 너 커서 뭐가 될래?” 하기보다는 “네가 양말을 이렇게 뒤집어서 벗으면 엄마가 다시 뒤집어야 하니까, 엄마가 힘들어”라고 하면 아이가 미안한 맘 가지지 않겠습니까?

말씀의 권위를 회복합시다. 말씀의 전수자가 되십시다. 완벽한 부모 세상에 그 누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 된 나에게, 하나님 신앙을 가르쳐 준 부모님이시라면, 순종하고 공경해야 옳습니다. 부모님이 내 인생의 축복의 통로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게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 가르쳐 주신 아버지와 어머니, 정말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불순종 하지 않습니다. 저도 자식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전수자 되고, 축복의 통로가 되고 싶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