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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넘치게 하리라 (살전 2:17~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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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게 하리라 (살전 2:17~3:13)
 
 
바울 일행이 떠난 후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지속적인 환난 속에 있었습니다. 잠시 후면 돌아올 것으로 기대했던 그들의 스승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은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과,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증폭시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발신자들은 데살로니가 사역에 대한 변증(2:1-12)과 감사(2:13-16)에 이어서, 그들이 돌아가지 못한 것과 관련해서 변증(2:17-3:10)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3:11-13)합니다.

2장에서 사용된 ‘유모’(7)와 ‘아비’(11)라는 단어들은 떨어져 있는 어린 자녀를 그리워하는 부모를 연상케 합니다. 그런데 17-20절에서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 일행의 불타는 애정이 여러 방식으로 확장 표현됩니다. “너희를 떠난”은 직역하면 ‘너희로부터 잃어버린바 된’인데, 적극적으로 떠나지 않고 원치 않게 떨어져 나온 상황이었음을 설명했지요. 이때 부모 잃은 고아를 의미하는 ‘아포르파니스텐테스’(avporfanisqe,ntej)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 일행이 교회로부터 찢겨져 나온 것 같은 상황에 있음을 절묘하게 표현했습니다. 부모 잃은 고아 심정에 있어서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지요. 또한 비록 어쩔 수 없이 떨어졌지만 “얼굴”일뿐 “마음”이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 그들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고 강조합니다.

18절에서는 가만히 앉아서 마음으로만 그리워하지 않았음을 드러냅니다. 계획의 차질이 생겨 돌아가지 못했다고 하지 않고 “사단이 우리를 막았”다고 표현하지요. 사단의 훼방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돌아가려고 강렬하게 시도했음을 드러냅니다. 그런 후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 일행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들인지를 사랑 고백하듯 밝힙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19-20).

환난 속에 있는 사람은 흔히 고아의 심정을 느낍니다. 나만 환난을 받으며, 나만 공동체에서 따돌려진 것처럼 외로울 때가 있지요. 아무도 내가 겪는 문제에 공감하는 이가 없는 것 같을 때면 군중 속에서도 고독을 느낍니다. 현대사회는 가족 공동체 속에서조차 외로움을 느끼는 구조로 변하고 있고, 특히 아버지의 외로움이 점점 문제가 되어갑니다. ♪아빠! 힘내세요♬ 라는 동요에 가슴 뭉클해지는 가장들이 많지요. 성도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체험한 성도라 할지라도 지속되는 환난 속에서는 위로와 사랑의 격려가 필요합니다.

말씀을 보면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만으로 만족하라고 가르치는 대신, 36.5도에 불과한 그들의 사랑을 열심히 표현합니다. 경상도 사람은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라며 무뚝뚝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바울 일행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변명합니다. 그들을 잊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사랑하노라고 유모처럼 아비처럼 위로합니다. 위로하면서 그들 역시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인해 위로를 받습니다(2:11; 3:2, 7). 냉철한 이성과 따뜻한 감성과 적극적인 의지를 가진 복음 전도자의 모습이지요.

3장 1, 5절을 보면 바울 일행은 “참다 못하여” 디모데를 보냅니다. 그 까닭은, 첫째로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하려 했고, 둘째는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었고, 셋째는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였습니다(2, 3, 5). 성도가 이 땅에서 환난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이어서 바울 일행은 그들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들이 필요했습니다(3, 4). 이때는 실라도 마게도냐 지역으로 떠났거나 혹은 떠날 상황이었기 때문에 바울만 아덴에 홀로 떨어져 있기를 감수해야 했습니다(행 18: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을 한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를 위한 최선책을 모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단이 막아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바울 일행의 사랑은 이처럼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6-8절은 디모데가 가져온 데살로니가 교회 소식을 들은 바울 일행의 반응입니다.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euvaggelisame,nou)는 ‘복음을 전하다’는 의미의 용어인데 얼마나 크게 기뻐했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당시 바울 일행은 재정적으로 “궁핍”했고 “환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고 했고,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 했습니다. 뒤집으면 그 동안은 죽을 것 같았다는 뜻입니다. 바울 일행을 죽을 만큼 힘들게 했던 것은 궁핍과 환난이 아니라 환난 가운데 있지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돌아볼 수 없는 현실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는 태도는 “너희 믿음”과 연결됩니다. 바울 일행을 간절히 보고자 한다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일군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그들이 전해준 복음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 일행의 권면을 간사나 부정이나 궤계가 아니라고 믿고 있으며, 바울 일행의 삶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로 평가하지도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일행은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9-13절의 감사와 기도를 드립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인해 누리게 된 “모든 기쁨”으로 인해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를 생각하다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고 “주야로 심히” 간구하지요.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구절들에서 왜 “너희”의 믿음이 “우리”를 위로하고, ‘너희’의 굳게 섬이 ‘우리’를 살게 했다고 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바울 일행은 환난 속에 남겨진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인해 죽을 것 같이 마음 졸이며 두려워하다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소식으로 인해 살 것 같이 됩니까? ‘우리’와 ‘너희’는 서로 떨어질 수 없도록 연합된 ‘한 몸의 지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개인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수양을 위해서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자아(自我)의 완성이 아니라 ‘교회아(敎會我)’의 완성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바울 일행이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크게 위로를 받았던 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믿음에 굳게 서서 교회아 의식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단은 사도 바울의 때처럼 성도 간의 위로와 격려를 막습니다. 말씀을 전해주고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관계, 그 이상으로는 목회자와 성도가 서로에 대해 애정이 없는 관계, 군중 속에 파묻혀서 예배를 드린 후에는 서로 냉랭하게 헤어지는 관계는 성도간의 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이미 교회아에 대한 의식이 약하고, 개인주의에 빠져 있는 모습이지요. 나 홀로 신앙생활을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홀로서기는 ‘한 몸의 지체들’이라는 의식을 망각했기 때문에 성도의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3장 11-12절에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한 바울 일행의 기도 제목 두 가지가 등장합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오시며”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기도를 받으시는 분으로 간주되고 있는데요, 한 마디 기도 속에서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자라도록 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엿보입니다. 이 기도는 약 5년 후 3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마게도냐 지방을 방문할 때 응답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행 20:1; 고전 16:5; 고후 2:13).

두 번째 기도는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 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입니다. 대부분의 문제에서 성경은 ‘넘치지 않는 절제’와 ‘필요한 만큼의 적당함’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더욱 많아 넘치게’되기를 간구합니다. 그 이유는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3)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사랑의 위로와 격려가 성도 간에 흘러넘치는 것은 신앙을 견고하게 해서 환난 중에서도 흠 없는 거룩함으로 오실 주님을 맞이하게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바울 일행은 지연이나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닙니다. 그들은 친인척도 아니고 동향 사람들도 아니었지요.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남남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역사했을 때, 그들은 어떤 지연과 혈연보다도 더 강한 결속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유모와 젖먹이 같은 관계, 아비와 자식 같은 관계, 잠시라도 떨어지면 고아와 같은 심정이 되어 열정적으로 보기를 힘쓰는 영적 가족이 되었습니다. 항상 기억하고 감사하며, 주야로 간구하는 관계입니다. 서로에게 무의미한 존재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 큰 의미를 가진 존재들이 되었지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체험한 성도의 관계는 원칙적으로 이러해야 마땅합니다. 로마서 12장 5절에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외관상으로는 떨어져 있어도 한 몸으로 신비하게 연합되어 있습니다.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지체들 중에 한 지체로서 존재합니다. 팔이 아플 때 팔만 아프지 않고 몸 전체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픈 지체가 회복되기까지 다른 지체들이 협력하여 중단 없이 혈액을 통해 치료 물질과 영양분 등을 보냅니다. 성도가 한 몸이라면, 환난 중에 있는 성도를 향한 다른 성도들의 사랑은 중단 없이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온전하여지기까지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복음 전파자의 애씀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선택함이 오히려 사랑의 수고를 더하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 간의 사랑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히려 성도 간의 사랑을 통해 표현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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