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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족 (엡 5: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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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엡 5:21~33)


I. 가정의 신비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회사를 설립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학교를 세운 적도 없으시고 국가를 만든 적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만든 공동체는 교회와 가정, 두 개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이고, 우리가 어떻게 가정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은 행복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행복의 비밀을 교회와 가정 안에 숨겨 둔 것입니다.

이 교회와 가정은 그냥 만들어 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가 터져 피가 흐른 다음에야 교회가 세워졌고 아담의 옆구리가 터져 갈비뼈가 뽑혀진 다음에야 가정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교회와 가정은 그 만큼 소중하고 거기 행복을 가꾸는 일은 수고와 희생을 요한다는 말입니다. 교회 생활과 가정을 소홀히 하고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어떤 길도 없습니다.

노벨상 수상자 솔제니친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된 원인은 분명하고 단순하다. 그들이 가정과 교회의 중요성을 과소평가 했기 때문이었다"라고 단언을 했습니다.

이 땅의 종교들 가운데 가정의 중요성을 모르는 종교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기독교는 가정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행복의 비밀을 가정 안에 숨겨두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성령충만이라는 단어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부부간에 서로 사랑해라. 부모를 공경해라. 자식을 복음으로 잘 양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 혼자 기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가정 공동체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공동체의 행복이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가정을 만드심으로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종말의 날, 이 역사의 모든 마지막이 다가오는 그날 하늘에서 신부된 모든 성도들과 신랑되신 예수님이 천상에서 결혼 예식을 함으로 잔치를 베푸시는 예식을 행하심으로 천국을 열어가게 될 것임을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천국과 같습니까? 아니면 지옥과도 같습니까? 가정은 참 신비한 곳입니다. 이 가정은 큰 사람이 작아지고 작은 사람이 커지는 곳입니다. 밖에 나가면 높은 사람, 귀한 사람, 대통령 장관 대접을 받는 사람도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인사하고 낮아집니다.

제가 아는 사장님 한분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어린 손자의 말이 됩니다. 손자녀석은 할아버지를 엎어놓고 등, 허리에 걸터앉아 "이랴" 낄낄낄 하고 할아버지를 타고 온 방을 돌아다닙니다. 이게 가정입니다.

또 밖에 나가서는 아주 낮은 자리에서 어려운 일을 하다가도 집에 들어오면 황제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은 인류의 안식처입니다. 험한 세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이 편히 쉬는 안식처 말입니다. 

한 유명 연예인이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고 나니 뭐가 좋으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평생의 후원자, 항상의 후원자, 최고의 후원자가 생겼다."

옛날 어느 농가에서 명절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온가족이 둘러앉아 인절미를 만드는데 인절미를 만들다 말고 젊은 색시가 고물을 묻혀 사랑하는 남편 입에다 쏙 넣어주고 쏙 넣어 줍니다. 저만큼 시아버님이 바라보고 있는데 군침이 흘러갑니다. 체면 때문에 그것 나 하나 먹자 소리하지 못하고 먼 산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습니다. 때마침 시어머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아버님 드렸냐?" "아니 다 만들어서 드릴려구요." 그때 시어머니가 인절미를 한사발 담고 김치 국물을 곁들여서 남편에게 갖다 드렸습니다. 볼이 미어터지도록 몇 개 잡수시더니 아들 쪽을 향하여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놈아 너만 색시있냐? 나도 색시있다." 

오늘은 가정의 달을 맞으며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I. 나는 교회를 믿는다

오늘 본문 교회의 유비를 통해 가정을 설명하고 가정의 유비를 통해 교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믿는 가정에서 부부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님과 교회의 신비를 통하여 설명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접근해 보면 이 주장이 옳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또 어떤 이는 반대로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의 가장 기본관계인 부부관계를 통해서 설명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에베소서가 "교회론"을 주제로 쓰여진 책이라고 한다면 아마 이 후자가 옳은 것 같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의 심장속엔 교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이요 당신의 가족인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교회엔 하나님이 계십니다.
·교회엔 구원이 있습니다.
·교회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엔 은혜가 있습니다.
·교회엔 성령이 계십니다.
·교회엔 약속이 있습니다.
·교회엔 천국이 있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는 교회를 어머니로 섬겨야 한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비밀이 크도다" "이 신비가 크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경가 바클레이라는 사람은 평생 성경을 연구하고 교회를 섬기며 살아오셨던 사람입니다. 말년에 썼던 그의 책 가운데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는 교회를 믿는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때로 교회가 부패하고 허물과 모순 투성이로 보일 수 있으나 우리의 구원과 희망이 실현되는 곳은 오직 교회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20세기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몇 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인구가 폭발되었습니다. 비인간화 현상, 인간의 도구화 현상이 세계도처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구를 40번 폭파하고 능히 남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무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환경의 파괴와 공동체의 파괴입니다. 앞으로 100년동안 인류가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환경으로 돌이킬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공동체가 파괴되어졌습니다. 21세기 문이 열려지면서 얼마만큼 우리가 자연환경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파괴된 공동체를 어디서 얼마만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과제를 안고 새세기의 문을 열게 된 것입니다.

III.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

오늘 본문 25절 - 27절에 보면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 곳인가 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25절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애인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만큼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26절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나 자녀를 예쁘게 다듬기 위해 목욕을 시키고 마사지를 시키고 가능하다면 성형수술까지 시키는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이 본문에 그려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늘 씻어 주신다는 말씀은 한편, 교회가 늘 새롭게 씻어야 할 만큼 흠이 많다는 얘기죠. 주께서 깨끗하게 하지 않고서는 언제나 때묻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거룩하지 못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눈물로 닦으십니다. 피 흘려 보혈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다듬어 가십니다.

27절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망이요 꿈입니다. 우리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 - 하늘의 영광스런 임금으로 우리 앞에 찾아오실 것입니다. 하늘 혼인잔치의 신랑으로 오실텐데 그 앞에 단장하고 선 예쁜 신부가 있습니다. 그 신부가 누구입니까? 교회입니다. 성도들입니다. 하늘의 권세를 다 한 몸에 짊어지시고 이 땅을 심판하러 오시는 그 날, 나와 여러분은 주님 앞에 신부로 서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단장하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그분의 파트너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 하나 하나를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초라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신랑되신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교회는 그분의 유일한 사랑이요 꿈이요 자랑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믿음에 바로 서면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많이 사랑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혼인식장에서 신부를 비판하지 않듯이 교회를 함부로 대하거나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왜요? 교회는 예수님의 순결한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안에서 우리가 남편 아내의 허물과 약점을 감싸듯이 교회의 약점을 내가 안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피를 흘렸듯이 우리도 앞장서 헌신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내가 교회를 얼마나 존귀하 여기고 얼마나 헌신했느냐 하는 것이 천국 상급의 바로메타입니다.

세 남자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는데 천사가 하늘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이유인즉 "너희들은 아직까지 살았어야 할 사람들인데 행정상 착오로 너무 일찍 왔으니 땅에 내려가서 남은 일을 하고 오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상으로 한 가지씩 소원을 들어줄 테니까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첫째 사나이가 "나는 저 땅에 권력을 가져가기를 원합니다." 권력을 주어서 내 보내었습니다. 둘째 사나이는 "저는 재물을 원합니다." 재물을 주어서 보냈습니다. 셋째 사나이는 "저는 이상적인 아내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아내상을 얘기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아름답고 명랑하여 미남들이 주위를 졸졸 따라다니나, 다 버리고 나를 택해야 한다. 그녀는 건강하여 절대 아프지 않다. 그녀는 요리와 청소의 달인이다. 그녀는 세상에서 쇼핑을 제일 싫어한다. 남편이 집안일 돕는 것을 결코 바라지도, 생각지도, 꿈꾸지도 않는다. 이외에도 천사처럼 맘씨 곱고, 가정 교육 잘돼 있어 예의 바르고, 어머니처럼 헌신적이고, 낮에는 현모양처같고, 침실에선 요부같고, 외로울 땐 누나같고, 심심할 땐 동생 같고, 마음이 살랑댈 땐 연인 같고, 애 잘 낳고, 돈까지 잘버는 슈퍼우먼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작가 Bob Phillips의 「모든 남자들이 기대하는 이상형 아내감」중에서)

이 얘기를 다 듣고 천국을 지키던 천사가 대답을 했습니다. 
"야, 이 사람아 그런 여자가 있으면 내 아내를 삼지 당신을 주겠는가?" 

세상 모든 여자들이 기대하는 이상적 남편상도 있습니다. 
그는 섬세하고 따뜻하고 이해심이 깊으며, 세련된 화술까지 겸비했다. 그는 당신을 위하여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는 사람이다. 그는 당신이 무리해서 몸살이라도 날까 봐, 집에만 오면 날렵하게 설거지를 하고, 음식을 차려 주고, 바닥을 쓸고 닦아 주며, 아이들과 놀아 주고, 빨래까지 완벽하게 널어 준다. 빌 게이츠처럼 똑똑하고, 로버트 레드포드처럼 분위기 있는 미남이며, 이외 신앙 좋고, 학벌 좋고, 키 크고, 잘생기고, 집안 좋고, 능력 있고, 매너 좋고, 거기다 차남이나 막내면 더욱 좋고, 어지간한 수준의 집과 차는 기본으로 갖춘 남자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세상에 이런 남자, 이런 여자는 없습니다.

가정이 무엇입니까? 호텔같은 방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값비싼 침대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서로 편안히 누울 수 있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인류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 진수성찬 없어도 괜찮습니다. 서로 웃으며 밥을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가정 아니겠습니까? 호화스런 저택에 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화목하게 살면 그만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값비싼 보석을 선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서로 소중한 줄 알고 살아가면 그만인 것입니다. 훌륭한 교양과 인격이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명성과 인물이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공동체가 가정공동체 아니겠습니까? 

창세기 2:25에서 가정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너에게도 실수가 있고 나에게도 허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노출되어지고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부끄럽지 않은 관계, 그게 가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은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내 실수가 드러나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 내 연약함이 허물이 드러나도 부끄럽지 않은 공동체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가정 공동체인 것입니다.

어릴때부터 눈썹이 나지 않은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오랜시간 혼자로 지내다가 결국 혼기를 놓치고 어느 연탄장수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눈썹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는 매일 남편보다 일찍 일어나 화장으로 눈썹을 그리고 자기가 눈썹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남편은 잘 속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의 일을 돕는 직원이 몸이 아파서 나오지 못하게 되어 그녀가 대신 남편의 일을 돕기로 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연탄을 나르는 일은 평생 처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지치고 힘들었고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남편이 잠시 쉬자고 말하면서 쉬는 동안 자신의 목에 감아두었던 수건으로 그녀의 땀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속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남편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눈썹만을 피해 조심조심 땀을 닦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는 자기 자신이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참된 사랑은 아픔을 감싸주는 것입니다. 약점과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IV. 함께 가꾸어 가는 공동체

다시 교회로 돌아가십시다. 
교회가 그토록 고귀한 공동체라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뒷짐지고 구경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주님이 또 씻어 주실텐데 아무렇게나 살고 흙탕물에서 놀아도 좋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랑을 기쁘게 하려면 늘 자기를 가꾸어야 합니다. 천국가족의 전통을 세워가기 위해 각자 자기 역할을 잘 알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식장은 부부가 된 날이 아니라 부부가 되기로 시작하는 날입니다. 완성의 날이 아니라 출발의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저절로 부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젊은이들은 결혼만 하면 저절로 부부가 되는 줄로 압니다. 아니요. 부부가 되기로 첫 출발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부란 마주 보고 누우면 한 몸이 되지만 등 맞대고 돌아누우면 지구를 한바퀴 돈 다음에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게 부부입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부부관계는 깨어집니다. 부부관계는 값비싼 댓가를 지불해 가며 행복을 심어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천국가족, 교회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예배에 겨우 참여하고 헌금만 한다고 천국가족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당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힘쓰고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다. 이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요 우리 모두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우리는 혼자 존재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신앙생활은 절대 혼자 유지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떠나면 그 날로 우리 신앙은 살아남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닥불과 같습니다. 작은 모닥불이라도 하나 둘 셋 넷 모이다 보면 나는 너를 뎁혀 줍니다. 너는 나에게 불을 나누어 줍니다. 내 불은 네 불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불이 행복의 불이 점점 커지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 둘씩 뿔뿔이 흩어져 가기 시작하면 이 불들은 하나씩 둘씩 꺼져가고 마는 것입니다. 혼자 놀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 몸은 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세포들이 서로가 서로를 돕습니다. 세포 가운데 병이 들면 다른 세포들이 일제히 달려가서 그 세포를 도와줍니다. 영양분을 나눠줍니다. 그런데 암세포는 혼자 노는 세포입니다. 다른 세포들이 열심히 함께 놀 때 혼자노는 세포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된 이 암세포는 세력을 확장해 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종양을 만드는 것입니다. 악성종양, 암세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죠. 암세포는 영양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고 영양을 빼앗아서 혼자 날름날름 삼킵니다. 그리고 결국 생명을 앗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노는 세포는 위험합니다. 성도들과 더불어서 소그룹 안에서 사랑을 나누고 상처를 나누며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고 용납받으며 서로 세워주는 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믿음생활에 모여서 사랑 나누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위험한 세포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나이든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는 사랑하지만 입술로 표현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도 이런 훈련을 받기도 합니다. 가정 세미나에서 어떤 강사가 목사님들에게 "하루에 몇 번씩 사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하십니까?" 대부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날 강의 숙제는 강의 끝나면 바로 사모님께 전화해서 사랑한다고 고백하기였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동료들은 옆에서 확인을 합니다. "여보, 잘있지. 나도 잘 있어. 그런데 여보, 그런데... 자꾸 시간을 머뭇거리니까 친구들이 빨리 고백해"라고 하자 목사님은 "사.. 사.. 사.. 사찰 집사님 잘 있어"라고 하더랍니다.

V. 돕는 배필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말씀하시고 바로 하와를 만드신 것이 아니고 아담을 이끌어 동산으로 나가시더니 생물들의 이름을 짓도록 했습니다. 물고기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번역이 뭔가 좀 신통치 않아요. 뭔가 이상합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아담의 돕는 배필은 될 수 없었다." 저들에게 자기 나름대로 짝이 있었습니다. 짝이 없는 것은 나 하나밖에 없구나.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아내를 맞이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생물들도 아담의 배필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와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 땅에 모든 좋지 못한 것들을 좋게 만드시기 위하여, 행복하지 못한 것들을 행복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기쁘지 못한 것들을 기쁘시게 만들기 위하여, 피곤한 인생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하여, 돕는 배필을 만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남자를 돕는 여자의 역할만을 얘기하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돕는 배필은 '남성 명사형'입니다.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더 많이 도우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입니다. 돕는 배필이 된다고 그러니까 자존심 상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뭘 못나서 남이나 돕다가 죽어! 아닙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돕는 배필이라고 그랬습니다. 돕는 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도울 수 있습니까? 힘있는 자만이 도울 수가 있습니다. 강자만이 약자를 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서적인 보완의 관계, 성격적인 보완의 관계, 성적인 보완의 관계, 영적인 보완의 관계에 있는 사람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라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돕는 배필 : 에제르. 이 말은 강한자가 약자를 도울 때에, 하나님께서 상처난 영혼을 치유하실 때에,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실 때에, 힘없는 자에게 용기를 더하여 주실 때에, 하나님이 인간을 돕는 전능한 손길을 얘기할 때에 "돕는다" 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내 손은 이미 천사의 손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면 내 힘은 이미 전능한 하나님의 손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돕는 배필입니다. 

그러나 돕는 배필이 바라는 배필이 될 때, 이 짝궁들은 시시한 것 가지고 잘 싸우게 됩니다. 반면 돕는 배필이 될 때, 시시한 것 가지고 쉽게 행복해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매일매일 부딪히는 부부싸움의 논제가 주로 무엇이었습니까? 거창한 문제, 대단한 문제 가지고 부부싸움하게 되던가요? 

어떻게 하면 성령충만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 가지고 부부싸움 해 보신 분 계십니까? 삼위일체론이 아주 어려운데 어떻게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 때문에 이견이 생겨서 싸워 보신 분 계십니까? 이불 니가 개라 네가 개라. 조금 늦으면 전화 한통 주면 될 텐데 손이 없냐 발가락이 없냐? 이번달에 용돈이 많으니 적으니, 운전하다 말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운전대 맡겼으면 입이나 다물고 있어라. 유치원 얘들이나 싸울 수 있는 주제가 우리의 부부싸움의 주제 아니었습니까? 이게 부부 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일상생활 한 가운데서 행복을 느낄 때는 언제였습니까? 참으로 시시한 것 하나가 나를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불행하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 존슨이라는 사람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내 아내가 헬라어를 줄줄 외울 때보다도 저녁 식탁을 맛있게 준비해 놓고 나를 기다리고 다소곳이 앉아있을 때가 참으로 행복했다. 참으로 아름답게 보여졌다."

새 차를 선물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고, 차 문만 열어줘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돈을 들여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꽃송이 하나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둑한 월급 봉투가 아니라 하더라도 "여보, 생활비 넉넉하게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이 말 한마디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부인들은 남편이 밥만 맛있게 먹어줘도 행복합니다. 거기다가 먹다말고 "야! 맛있다. 끝내준다. 죽여준다" 한마디만 하면 온종일 피곤이 싹 가셔지는 것입니다. 그게 부부간의 행복 아니었습니까? 때로는 유치해 보이기도 하지만 행복의 신비가 거기에 있습니다. 

언젠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한 부부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서로 이혼을 하기로 하고 별거중인 부부였던 모양입니다. 남편이 이대로 가정을 깨뜨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잘못으로 파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아내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용서를 구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나님, 할 말을 가르쳐 주세요."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낼 때 "네가 말할 것을 염려하지 마라. 성령님이 가르쳐 주신다."는 말씀이 생각나더랍니다. 그리고 아내를 찾아가 첫 사랑을 나누던 바닷가를 함께 걸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내는 도무지 내키지 않았지만 곧 헤어질 사람이니 소원을 들어주자 싶어 함께 바닷가로 말없이, 재미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파도가 밀려드는 바람에 아내가 넘어졌고 바다 밑으로 아내의 손에 끼워있던 결혼반지가 빠졌습니다. 비싼 반지가 아깝긴 했지만 곧 헤어질 것이니 차라리 잘됐다 싶었습니다. 그순간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망설이기만 하던 남편이 자기 반지를 빼 물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남편의 엉뚱한 행동에 아내가 묻습니다. "왜 그랬어요?" 남편이 상기된 얼굴로 대답합니다. "당신 반지가 외로울 거 아냐, 내 반지가 함께 있으면 당신 반지가 외롭지 않을 거야."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함께 울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손을 잡고 약속이라도 한 듯 "난,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라고 외쳤습니다. 

혼자 있으면 외로워 하나님은 가정을 주시고 교회를 주셨습니다. 
가족을 주시고 교우들을 주셨습니다. 서로 소중히 여기십시요. 
하나님의 주신 선물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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