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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주 안에서의 가정이 되게 하라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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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의 가정이 되게 하라 (엡 6:1~4)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1-4)

아침에 집을 나와 거리를 헤매던 젊은이들이, 일터에서 온종일 직무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저녁이 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가정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평안히 쉬게 하는 안식처입니다. 돌아가야 할 가정이 없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돌아가고 싶은 가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마치 뿌리 없는 풀과 같을 것이며 살아가는 것도 마치 지옥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이 어떤 가정이냐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어떤 가정을 이루고 사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성공과 함께 행복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해리스라는 사람이 미국 사람들에게 ‘새해에 당신들의 소망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96%가 행복한 가정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비해 돈을 많이 벌어 잘 살고 싶다는 사람들은 1.8%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바라는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서 ‘진정한 가정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 고 질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성서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주안에서의 가정’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 안에서의 가정’입니다. 에베소 5장과 6장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정의 생활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안에서의 가정을 바로 세워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럼 주안에서의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주안에서의 가정은 서로의 관계를 존중하는 가정입니다.
   
성서에 보면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말씀은 서로의 관계성을 귀히 여기고 존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관계성을 주님과의 관계처럼 가지라는 것입니다. 가정에 대한 기독교의 본질적인 명제는 서로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들 간에 서로 아끼며 섬기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함으로 서로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부부의 관계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소유의 관계가 아니라 존재의 관계입니다. 
소유의 관계로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관계의 대상을 내 틀에 가두어 놓고 내게 필요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면서 강요하며 억지를 부립니다. 그러나 존재의 관계로 관계성을 만들어가는 관계대상의 나와 다른 특성을 귀중히 여겨주며 나와 다른 그 특성을 나와의 조화를 통하여 더욱 풍요한 삶을 창조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신의 아내와 자녀를 소유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 다루듯 하고, 물건 취급하듯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식을 자신의 소유로 보아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한 희생의 대용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이의 적성이나 이상이나 꿈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자식에게 강요함으로 자신의 대리만족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노엽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 소유의 관계가 될 때, 그 가정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존재의 관계는 주님 안에서의 가정에서만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축복된 삶입니다. 존재의 관계로 서로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관계성을 귀중히 여기는 가정이 되어야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가정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인격을 존중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면서도 가정에서는 아내와 남편이나 자식과 부모에게 무례히 행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여자교인이 이불을 싸들고 교회에 왔답니다. 그 이유를 물은즉 자신의 남편은 교회에서는 천사와 같은데 집에서는 그렇지 못하기에 천사와 같은 남편과 살기 위해 이부자리를 싸들고 왔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한 풍자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생활과 신앙생활을 균형 있게 하지 못함을 지적한 것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관계를 그리스도와의 관계처럼 바로 세우는 데 있습니다. 서로를 존 귀히 여기고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관계를 바로 세울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복한 삶을 이루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의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되는 가정입니다. 
   
자녀들의 부모에의 참된 순종은 사랑 안에서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부모의 양육은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가정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될 수 있고, 그 사랑을 나누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랑이 결핍될 때, 가정의 관계성은 병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대화와 함께하는 생활은 피폐해져 가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고귀한 자존심을 상실한 채, 부정적인 자아 속에서 두려움과 공포 속에 살면서 미움과 시기와 불신의 자아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이유는 사랑의 결핍에 있는 것입니다.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는 아기가 태어 난지 12개월까지는 중요한 한 가지를 배우게 되는 데, 그것은 바로 신뢰감이라고 했습니다. 갓난아기가 제일처음 눈을 떴을 때 처음대하는 부모의 웃는 얼굴과 사랑스런 표정은 일생을 지배하는 신뢰감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의 바른 자아확립이라든지 신뢰성은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형제끼리의 사랑의 나눔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이런 사랑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누는 가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데,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누는 가정이 될 때, 그 가정은 상처를 치료하고, 영혼의 피로를 푸는 천국과 같은 가정이 될 것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이 죄인들아!’ 하면서 우리들을 죄인으로 인 쳐서 쓸어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미래를 보시고 끈질기게 적극적으로 사랑하시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감정이나 느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하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조건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가정이 주안에서의 행복한 가정인 것입니다.
   
저는 세 여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의 아내와 두 딸입니다. 저희 집은 그렇게 부유하지 못합니다. 재산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평하지 않고 모두가 감사하면서, 정성껏 서로를 위해 노력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정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되는 것을 체험하고 나누고 있기에 행복한 가정이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가정이 되면 어떤 어려운 환경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 사랑을 충분히 나누는 곳이 될 때, 새로운 힘을 얻는 곳이 됩니다. 이렇게, 주안에서의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누는 가정입니다.
   
   
주안에서의 가정은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가 있습니다. 
   
성서본문은 ‘주의 교훈과 훈계로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가정은 서로의 비밀을 감추고 숨겨두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의 모든 모습이 가장 솔직하게 표현되는 곳입니다. 가정은 현실문제가 그대로 노출되는 곳이기에 그 문제를 새롭게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무엇으로 가정을 새롭게 하며 가정을 지키느냐 하는 기준이 중요합니다. 성서본문은 ‘주의 교훈과 훈계로 하라’고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훈계로 하라는 것입니다.   
   
교훈을 뜻하는 희랍어 ‘파이데이아’라는 말은 교육, 훈련, 징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벌을 통한 훈련 즉 징계로 잘못된 점을 교정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훈계라는 말 ‘누데시아’는 말을 통하여 훈계하는 것을 뜻합니다. 때로는 책벌하기 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고 훈계함이 가정을 지켜주는 것이 되고 가정을 새롭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태인은 어려서부터 신명기 6장의 ‘쉐마’의 말씀으로 가정을 지켰습니다. 쉐마의 말씀, 곧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대로 살아가게 하는 생활교육에 철저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일반민족 보다 두뇌가 6배나 발달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6:4-9)
   
인간이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을 아는 경험은 특별한 경험으로 그 경험은 인간 삶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하심 안에 살게 하고 인생 사고와 삶의 폭을 넓혀줍니다.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함은 가정을 주안에 있는 가정이 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시86:11)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바로 아는 가정,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가 있는 가정이 생명과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고 건실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두 가지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많이 가지는 것이고, 둘째는, 많이 배우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고 행복하게 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경험,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의 경험을 등한시합니다. 열심히 버는 것, 공부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시 할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는 데서 인생실패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몇 해전 TV에서 영재교육의 난점에 대하여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19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이 그 날부터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교훈과 훈계를 떠나서 인간이 소유하는 것과 지식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며,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를 나누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서입니다. 주안에서의 가정은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를 나누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가정이 되는 데서입니다.
   
주안에서의 가정을 이룸으로 참된 행복을 창조하시는 가정의 역사를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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