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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하나님 나라의 주인 (눅 18: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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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주인 (눅 18:15~17)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5-17)

우리들이 잘 아는 이야기 한 가지 먼저 드립니다.

직업이 외교관인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일에 쫓겨서 외국에 출장도 잦고 모든 일이 너무 바빠서, 그래서 가정과 아이들에게 신경을 별로 쓰지 못 했다 합니다. 모처럼의 휴일을 맞이한 그는 ‘오늘은 좀 낮잠이나 실컷 자고 미루었던 책이나 보면서 하루를 쉬겠다.’ 생각을 했는데 그의 아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지 말고 아이들과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닦달을 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집에 있었다가는 아내 등살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부득이 아이들과 같이 낚시질을 나갔답니다. 아이들은 좋아서 마구 뛰면서 한껏 즐거워했습니다.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 온 이 외교관, 그 날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합니다.
‘오늘은 아이들과 낚시를 다녀왔다. 소중한 하루를 낭비해 버렸다.’

그의 한 아들이 훗날 그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일기장을 들추어 보았는데, 바로 그 날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답니다.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다녀왔다. 나의 일생에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었다.’

잘 아는 이야기임에도 우리들은 여진히 낭비된 시간이라고 느낄 때가 많지는 않은지요?
여러분은 어느 쪽이신지요? 

가정의 달인 5월 첫 주, 어린이 주일, 자녀 양육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주일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든, 미래를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흘린 땀방울이 10년 후 나의 명함이 된다”는 어느 광고 카피는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18세기는 민중을 발견한 세기요, 19C는 여자를 발견했으며, 20C는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1C에 사람 수에도 들지 못하던 어린이를 존귀히 여기고 사랑해 주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사시던 그 유대 사회에서는 사람을 셀 때 누구만 세었을까요? -> 
정답은 “사람만 세었다”입니다. - 물론 “군대 수”가 정답입니다만....

어린이와 여자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던 시대, 바로  그 때에 주님은 어린 아이를 귀하게 여기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눅 18: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어린이 주일에 늘상 나오는 그 메뉴이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함께 살펴보고 이 자리에 계신 성도 모든 분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어린이에게는 지지, 격려가 필요합니다.

지난 주 수요일 밤 EBS에서 흥미로운 실험의 이야기가 방송되었습니다.
인간의 두 얼굴 제 2 편 이었는데, 그 중의 한 실험입니다.

두 눈을 가린 어린이는 고무공을 앞으로 던집니다.
그러면 맞은편에서 어머니가 바구니로 그 공을 받는 것입니다.
결과로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12개 이상 많이 넣은 집단과 7개 밖에 넣지 못하는 2팀의 작은 집단입니다.
그런데 그 두 집단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7개 넣은 집단의 어머니들은 두 눈을 가린 어린이가 공을 던질 때마다 “아니, 아니, 그 쪽 말고 이쪽, 아니야”라면서 부정적인 언어가 주류를 이룹니다.
많이 넣은 집단의 어머니는 두 눈이 가려져서 동일하게 서툴지만 “옳지. 잘 했어, 아이구 잘 하네.” 등등의 긍정적인 언어가 주류를 이룹니다.

우리 주님은 이미 우리의 절망적인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이미 베드로의 마음 속에 그의 허풍 가득한 그 결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막14:29-31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그럼에도 주님은 그를 통해 이루실 일을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시몬이라는 이름 대신에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며 이미 예견해 놓으셨던 주님이십니다.

부활 후 갈릴리에서 주님은 그에게 ‘그렇게 배신하지 않겠다더니 꼴 좋다.’ 하지 않으십니다. 따지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실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황을 둘러보면 이런 설교가 필요 없을 만큼, 사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지지와 격려 정도가 아닌 환상적인 믿음 과잉증이 있습니다.

제 아들 녀석이 갓난 아기 시절, 이 녀석이 음악이 나오니까 손을 휘젓는 것이 카라얀의 그 열정적인 모습과 딱 매치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신학교 시절, 교회 음악에 큰 관심이 있었고, 일반적인 목회가 아닌 음악 목회에 대한 유혹을 많이 받았었습니다. 중간에 신학 대신에 음악을 전공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었다가 음악에 대한 열정만 주셨지 재능은 주시지 않았음을 알게 된 제게, 아들을 통해 꿈을 이루시려나 보다 하고 흥분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신의 못 이룬 꿈을 자녀들을 통하여 이루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똑같이 자녀들의 학교 성적이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여지없이 스트레스 받는 많은 엄마들. 기억하십시오.
그 아이들은 바로 여러분, 엄마, 아빠를 닮은 것 아닌가요?

우리는 실수한 어린이들을 지지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넘어진 어린이들을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심한 어린이들에게 용기를 넣어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삶 속에서 배웁니다.
비판 속에서 자란 아이는 비난을 배웁니다.
적대감 속에서 자란 아이는 싸움을 배웁니다.
놀림 속에서 자란 아이는 부끄럼을 배웁니다.
수치심 속에서 자란 아이는 죄책감을 배웁니다.
관대함 속에서 자란 아이는 참을성을 배웁니다.
격려 속에서 자란 아이는 자신감을 가집니다.
칭찬 속에서 자란 아이는 고마움을 배웁니다.
공명정대함 속에서 자란 아이는 정의를 배웁니다.
배려 속에서 자란 아이는 신앙심을 가집니다.
인정받고 자란 아이는 자신을 소중히 여깁니다.
사랑 속에서 자란 아이는 세상에서 사랑을 발견합니다.

[출처] 격려 속에서 자란 아이가 자신감을 배운다. _열린 책들

어린이들은 지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으로 장래의 삶이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혹여,
삶에 자신 없어 위축되어 있을 때, 가장 강력한 힘의 소유자이신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지지하고 격려하고 자랑스러워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은 어린이들을 무조건적으로 편 드셨습니다.

어린이들은 주님 앞으로 모여 듭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행하셨던 여러 기적들을 보면서 그런 기적의 현장에 대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리고 부모들의 극성으로 이들은 주님 앞에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꼭 나오는 한 마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애들은 가!” 라는 말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었습니다.
충청북도 단양 산골짜기 동네에 찾아 온 약장수가 있었습니다.
연극도 하고 영화도 보여주고, 노래도 하다가 중간 중간에 약을 파는 것입니다.
물비누도 팔았고, 그 물 비누를 지금의 샴푸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제품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크레졸 비누물이었던 듯 합니다.
신기한 구경거리가 많은 그 곳에 가 보고 싶었지만 가까이 가면 경비 아저씨들이 외치는 한 마디가 있었습니다.
“애들은 가”

그때 모범생이며 지적 호기심 강한 한 아이가 개구쟁이들과 함께 포장 쳐 놓은 옆구리를 가르고 약장수 공연장 안으로 뛰어 듭니다.
하지만 머리만 들어간 채 하늘로 솟아 있는 엉덩이는 그만 경비하는 아저씨 손에 잡혔습니다. 다른 녀석들은 다 도망가고 혼자 잡혔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나요?
잡힌 어린 꼬마 녀석을 본 경비 아저씨는 한 눈에 될 성 싶은, 눈이 초롱초롱하고 뭘 시켜도 제대로 할 것 같은 한 녀석임을 눈치 챘는데 그 꼬마 녀석의 이름이 “김철”이었답니다.
그래서 구경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대 위로 올라가서 크레졸 비누물 광고 모델로 데뷔했습니다.

모델료는 그 날 공연 다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맨 앞 자리에서..

보통 이런 판에는 애들은 낄 수가 없습니다.
애들은 돈벌이가 안 됩니다.
애들 상대로 할 상황이 아닌 것입니다.
어른들만 상대하기도 벅찹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둘러선 제자들도 몰려드는 아이들을 향하여 꾸짖습니다.
“애들은 가!”

그럴 때에 주님은 작은 어린이 편에 서서 말씀해 주십니다.

눅18: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어쩌면 많이 분주하셨던 주님을 지켜 드리려는 제자들의 선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 힘 없어 밀리는 어린이들을 방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어린이들을 향하여 주님은 무조건적으로 편들어 주셨습니다.
외면치 않으셨습니다.
품에 불러 들여 주셨습니다.

어린이들에 비해 외형적으로, 그리고 체격적으로 힘 있어 보이는 어른 된 여러분.

진지하게 여쭤봅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힘이 있으십니까?
강하신지요.
혹시 세상의 다양한 일들 앞에서 무너지고 절망하며 가슴치며 억장이 무너짐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신지요.
차마 아내가, 그리고 내 자녀들이 보면 안 될 약하디 약한 모습으로 직장에서,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가슴 졸이며 살아 온 지난 날은 없으셨나요?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수퍼 우먼,  대한민국 아주머니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슴 부여잡고 가정 생활과 자녀 양육에 지친 나날들은 아니셨는지요.
바로 그런 어린이 같은 작아진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시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그렇게 약하디 약해진 우리들을 오늘 주님은 무조건 편들어 주시는 분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형제들에게 팔려 애굽까지 내려간 요셉을 편들어 주시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 앞에 선 엘리야를 우리 주님께서 편들어 주셨습니다.
사자굴 속에 던져진 다니엘의 편이 되어 주셨고
풀무불 속에 들어가 있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사단이 욥을 시험하여 극한까지 내 몰렸을 때, 하나님은 욥의 편에 서 주셨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포기할 수 없다고, 우리 편에 서시겠다고 외치시는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고멜을 다시 품에 안게 하신 모습을 통해 증명해 내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이 내 편 되어 주시니 이제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합시다.

우리 주님은 지지와 격려로 어린이들을 세우셨습니다.
힘 없는 그들을 편드셔서 품에 안아 주셨습니다.

2009년을 살아가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힘없는 우리들이 세워지길 원하십니다.
힘없는 우리들을 편들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을 품에 안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주인 삼아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선포하실 그 나라의 주인 된 자로 이 땅에서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쓰임 받으시고 헌신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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