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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기대 (빌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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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대 (빌 4:8~9)


빌립보서4:8-9
(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하나님의 기대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멋있는 사람, 근사한 사람이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언급한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칭찬받고 덕이 있고 기림이 있는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근사합니까? 여러분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유교가 오랜 세월 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성인군자 상의 모습을 동경하고 존경합니다. 요즘은 물질주의가 세태가 워낙 강경해서 인격이고 뭐고 부자가 최고라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부자는 부러움의 대상일망정 존경은 받지 못합니다. 그에 합당한 인격을 갖출 때 비로소 사람들은 존경합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면 교회 안에서는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고 존경받으려면 인격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불교의 성철 스님이나 가톨릭의 김수한 추기경이 존경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불행히도 한국교회에서 유명한 목사님들이 많지만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분이 드문 것 또한 인격적인 존경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면 그것은 아마도 인격일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고귀하고 도덕적으로 탁월한 인격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비틀어졌습니다. 건전하지 못한 인격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회복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의 인격은 바로 오늘 8절에서 말씀한 그런 인격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8절에서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요구하고 있는 이 8개의 덕목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묵상했으면 합니다. ‘무엇에든지’라는 단어는 ‘무슨 일을 하던지’, ‘어느 때라도’, ‘어떤 환경에서도’ 라 바꿀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참되고, 어느 때라도 참되고, 어떤 환경에서도 참될 것을 요구합니다. 8절의 주동사는 끝에 나온 ‘생각하라’입니다. 이 8개의 덕목들을 생각하라는 뜻이지만 결국 이는 이 8개의 덕목에 해당하는 그런 사람이 될 것에 대한 요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8개의 덕목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흠모할 만한 인격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첫째, 무엇에든지 참되라 말씀합니다. 이는 거짓이 없는 마음과 행동을 말합니다. 둘째, 무엇에든지 경건하라고 말씀합니다. 영어성경에서는 noble 이라 하여 고상하고, 명예로운 사람이 될 것에 대한 요구입니다. 셋째 무엇에든지 옳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불의를 멀리하고 불의를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 무엇에든지 정결하라고 말씀합니다. 말 그대로 깨끗하고 순결한 삶을 의미합니다. 다섯째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호감이 가는 사람이 될 것에 대한 요구입니다. 여섯째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그 이름이 명성 있는 존재가 될 것에 대한 요구입니다. 일곱째 덕이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헬라 사회에서 덕은 곧 탁월성을 의미합니다. 곧 탁월한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기림이 있는 사람, 곧 칭찬받을 만한 사람,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에 대한 요구입니다.

8개의 헬라어 본래의 단어를 추적하여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8개의 덕목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능력도 탁월한 최고의 사람, 완전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될 것에 대한 요구입니다.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받고 있는 빌립보교회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부담스럽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원하는 바지만 우리 부족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의 소망은 좀 무리한 소망이 아닙니까? 저는 이것이 성취될 수 있는가를 묻기 전에 먼저 여기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 부모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이 최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가서 거기에 참석한 부모들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관심과 사랑과 기대가 읽혀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어린 자녀들이 있지만 부모는 자기 자녀가 최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최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 8개의 덕목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최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 멋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끊임없이 채찍질 하십니다. 모든 작품이 그렇듯이 끊임없이 깎고 다듬어야 위대한 작품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시키시는데 고난을 통하여 연단을 시킵니다. 고난만큼 우리 인격을 다듬는 훌륭한 도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어려움이 있거나 또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많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께서 내 인격을 더 정밀하게 다듬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자기 자녀가 아니면 그대로 놔둡니다. 그러나 자기 자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기대가 높기에 자녀에게 잔소리가 많아지는 법입니다. 

요즘 저희 집도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이유는 큰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첫시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다르고 또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긴장도가 다릅니다. 온 부모님들이 첫 중간고사가 나머지 3년을 결정하는 시금석이라 하여 이를 앞두고 매우 긴장하고 있고 저도 그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학원에 보내고, 또 더 좋은 학원에 보내기 위해서 안달입니다. 또 시험과 관련된 고급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안달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보기에 큰 아이는 너무 태평한 거예요. 학원에도 보내지 않아서 조바심 나는데 초등학교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하고 저렇게 태평스럽게 있는 모습에 화가 나서 잔소리가 많아졌습니다. 부모의 기대 때문이지요. 모든 부모는 자기 자녀가 최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부모들의 이런 기대라는 것은 자기 욕심일 경우가 많습니다. 또 먼 길을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는 완전합니다. 하나님은 욕심이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대는 믿을 만합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우리 인생의 첩경과 멀리 있는 목표를 정확히 보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를 책임지고 기르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 분이 우리 자녀들을 멋진 인생이 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런 하나님을 곁에서 도와드린다고 생각하십시오.

모든 부모들은 이런 점에서 칼릴 지브란이『예언자』에서 노래하고 있는 부모의 소유의식에 대한 경계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당신의 자녀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당신을 통하여 나왔을 뿐 당신이 만든 것은 아니다.
비록 그들은 당신과 함께 있지만, 당신에게 소유된 것은 아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줄 수는 있지만 당신의 생각들을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들의 몸을 머물게 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영혼을 머물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은 미래의 집에 살고 있으며,
당신은 꿈속에서조차 그곳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들처럼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지만
그들을 당신처럼 만들려고 하지는 마라.
생은 뒤로 돌아가거나 어제에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저는 하나님의 그런 기대가 멋있게 성취되는 것을 요셉의 모습 속에서 확인합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부터 해와 달과 열한 별로부터 절받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라는 높은 자리에 앉게 하는 기대와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총리의 그릇에 맞게 갈고 다듬어 가셨습니다.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게 했습니다. 그것은 더 큰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승승장구할 때 그의 아내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것은 애굽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많은 유력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또 그곳에서 제반 행정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잘 해몽했지만 그는 잊혀진 채 지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때가 되매 요셉은 바로의 꿈을 정확히 해몽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대비책까지 제시합니다.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애굽의 총리 자리에 오릅니다.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벼락출세한 것처럼 보였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오랜 세월 동안 그를 준비시켜 왔습니다.

요셉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탁월하고 덕이 있는 최고의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명품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향하여서도 이 기대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완성을 향하여 가는 존재입니다.

생각하라

위대하고 덕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그런 좋은 것들을 생각하는 마음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8절의 주동사는 ‘생각하라’입니다. 생각에서 행동이 나오고 행동이 쌓여서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뱃속에 아이가 있을 때부터 태교를 시작합니다. 특별히 보고 듣는 것에 주의했습니다. 생각의 힘이 아이에게 전달되고 그런 심성을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태교의 원조는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으로부터입니다. 태임은 문왕을 잉태하고 태교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 태교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눈은 사악(邪惡)한 빛을 보지 않았고, 귀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입은 오만스런 말을 하지 않았다. 서 있을 때는 발을 헛딛지 말고, 다닐 때는 걸음을 천천히 하며,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말고, 고기도 바르게 잘린 것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무엇을 보느냐가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 인격이 결정될 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인격도 결정이 됩니다. 자녀들의 영혼은 백지와 같습니다. 부모들이 어렸을 때 무심코 한 말이나 생각의 파장이 자녀들의 인격을 형성합니다.

이것은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상황과 환경이 있고 그 안에는 아름답고 긍정적인 것도 있고, 추하고 부정적인 것도 있습니다. 성인의 경우에는 자신이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좋은 것 보고 좋은 것 생각하기로 결정할 수 있고, 또 반대의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선택의 결과에 따라 우리 행동과 인격이 결정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양면 중에서 참된 것, 바른 것, 고결한 것, 정결한 것, 칭찬할 만한 것, 덕이 되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들을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 있고 빌립보교회에는 분열이 있습니다.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좋지 않은 것만 바라보면 우리 인격도 좋지 않은 인격이 됩니다. 감옥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하고 벽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그 인격이 달라집니다. 감옥에서 자기 억울한 일과 불편함과 곧 닥칠 두려운 심판만 생각하다면 우리 영혼은 마귀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는 순간에도 자기가 매임으로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되는 것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기 고난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일임을 인하여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난 가운데서 빌립보 교회의 사랑의 모습을 보며 기뻐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감옥에서 오히려 홀가분하게 그동안 자기가 의지했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오히려 가장 고상한 지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것을 향하여 달려가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이것이 가장 참되고, 고결하고, 덕이 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빌립보 성도들도 자기들 안에 분열이 있지만 분열만 바라보면 답답하고 은혜가 떨어집니다. 한편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만 들끓게 됩니다. 그러나 이 순간 우리는 자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하고 한없이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그렇게 참된 것, 좋은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안에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사람을 보면 똑같이 어려운 환경이지만 그 어려움 때문에 강도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성자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이슬을 먹지만 뱀은 그것으로 독을 만들고 소는 젖을 만듭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집니다. 제가 부목사시절 모셨던 목사님 중에 이중표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별세 신앙으로 유명했던 분입니다. 이 분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학교를 다니지만 도시락을 싸갈 수 없어 점심 때만 되면 수도가에 가서 물로 배를 채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학교 동산에 누워 하늘을 보면서 “배는 물로 채우지만 가슴은 하늘로 채워다오.”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가난이 그를 삼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큰 꿈을 꾸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한국교회에 존경받는 목회자가 되었고, 그분의 설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가난이 싫어서 집을 뛰쳐나갔던 사람도 많습니다. 가난이 싫어서 부자 되겠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혈안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걔 중에는 강도나 도둑이 되어 악의 소굴로 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모를 원망하고 가슴에 한을 품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생각의 차이 입니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물론 우리 환경이 우리 인격에 영향을 주는 면이 많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우리의 인격을 결정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이 긍정적인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되기를 바랍니다. 상황이 어렵지만 그 가운데서도 주시는 하나님의 좋은 것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잃어버린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있는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점을 보려고 한다면 모든 일이나 모든 사람이 우리 스승이 될 것입니다. 단점만 보려한다면 바로 우리 사는 세상이 지옥이 될 것입니다.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바울은 단지 말로만 그렇게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려면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모범입니다. 누가 모범을 보이면 쉽게 따라 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자기에게서 배우고 듣고 보고 또 자기가 전해준 대로 행하라고 요구합니다.

사람들은 보고 듣고 배운 대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자녀들은 우리가 만든 작품들입니다. 자녀 교육의 고전적인 명제 중 하나가 “문제 자녀는 없다. 다만 문제 부모만 있을 뿐이다.”입니다. 자녀는 부모들에게서 배우고 보고 들은 바를 행합니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고 하는데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언어나 우리 무의식 가운데 우리는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었고 자녀들은 그것을 행했을 뿐입니다. 자녀들은 우리들에게서 전달 받은 그대로 행합니다. 무관심하고 상처를 주었다면 그 무관심과 상처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제가 예전에 있던 교회에서 한 자녀가 있었는데 그 자녀가 틱 장애를 앓고 있었습니다. 틱 장애라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몸이나 어깨 신체 일부를 움찔하는 장애입니다. 자녀의 틱 장애를 치료하러 갔는데 그 정신과 의사는 그 부모가 먼저 정신과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부모가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그 엄마가 그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분노와 상처들이 치유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아들은 고칠 필요도 없이 틱 장애가 멈추었습니다. 예민했던 아들이 엄마의 냉정함 때문에 불안을 느껴 그런 틱 장애가 생겼고 엄마의 마음이 여유로워지니까 불안증세가 사라지면서 틱 장애가 그친 것입니다.

우리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데 어느 순간에 자녀에게 가르쳐주고 전달해 줍니다. 자녀는 받은 그대로 행할 뿐입니다. 그러니 부모 노릇하기 참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자녀를 양육해서 상처들이 대물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대에 그런 악순환을 끊어야 합니다. 자기 기분이나 방식대로 자녀를 기르지 말고 사랑과 주의 말씀으로 자녀들 양육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좋은 부모나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만큼 큰 복도 없습니다. 좋은 스승이 모범을 보이면 제자들은 자연히 스승처럼 살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이중표 목사님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이분은 성향상 보수적인데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한신대에 입학을 했습니다. 한신대는 원래 한국신학대학이었는데 그 약칭으로 그렇게 불렸습니다. 이분이 한신대에 입학한 이유는 이 ‘한국’이라는 명칭 때문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민족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신학교를 갈까 고민하다 ‘한국’이라는 말을 보고 즉시 한신대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이렇게 민족의식이 투철하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과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역사 시간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상을 가르치시다가 이때 여인들이 당했던 아픔을 전하시면서 수업 시간에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이 눈물을 잊을 수 없었고 그것이 민족을 향한 사랑으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그렇게 살게 되고 그렇게 살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가 다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승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듣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안타까운 것은 이런 스승들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대 교회의 목회자들은 좋은 조직가나 설교자는 될지언정 좋은 스승이 되지 못합니다. 학교와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성적과 경쟁으로만 몰아갈 뿐이지 좋은 인격적인 감화를 주지 못합니다. 사회는 좋은 스승을 인정하고 존경하게 만들기보다는 어떻게든 흠을 잡고 깎아내리기에만 바쁩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세상의 스승 없음을 한탄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말씀 속에 나타난 두 분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분은 예수님이고 또 한 분은 사도 바울입니다. 이 두 분은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담스러우면 인간인 사도 바울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 우리는 그와 같은 형상으로 닮을 것이요, 그와 같이 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인격의 연단의 과정은 결코 의지의 훈련이 아닙니다. 유교에서는 자기 수양이 중요하고 불교에서는 자기 부정이 중요합니다. 모두 의지의 훈련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의지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9절 하반절을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말씀으로 마칩니다. 우리 인격의 연단은 하나님의 기대와 계획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평안하게 맡길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내 안에 이룬다는 그 목표만 놓치지 않고 붙잡고 있으면 됩니다. 모두가 그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멋있고 근사한 인격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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