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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여호와를 앙망하는자 (사 4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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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앙망하는자 (사 40:27~31)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지금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사회학적인 말로 표현하면 신인류입니다. 옛날 사람들이나 지금의 어른들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며 인류인 것입니다. 이 어린이들은 우리가 전혀 보지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며, 우리가 전혀 생각도 못한 것들을 보고 자라는 세대들인 것입니다. 이들의 생각은 기존 어른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라온 환경이 다릅니다. 문화는 계속해서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문화와 역사를 초월해서 영원한 인생들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문화에만 길들여진 사람들은 직업의 전문성을 가지고 살지는 모르지만 결국 문화가 쇠망하는 것처럼 결국 쇠하여지고 마는 것입니다. 

엘리제사장은 자식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였습니다. 삼상 2:29절에 보면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하셨습니다. 
엘리제사장의 자식들은 결국 그 아버지 앞에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시대의 문화만을 쫓아서 살았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으며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집에서 자랐지만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온갖 못된 짓은 골라가면서 배웠습니다. 삼상 2:12에 보면 엘리제사장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량배였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때에는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고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대표작인 '노인과 바다'라는 단편소설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소설은 인간의 행동주의를 가장 아름답게 묘사한 소설로 손꼽힙니다.  이 소설에서 조각배 한 척을 몰고 대양으로 나가는 노인이 나옵니다. 노인은 바다에서 일종의 대형 상어인 "티뷰론"을 좇습니다. 이 상어를 향하여 전의를 불태우며 상어와 불꽃튀는 사투를 벌인 끝에 포획에 성공합니다. 노인은 상어를 끌고 항구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피곤에 절어 잠에 빠집니다. 그리고 항구로 돌아왔을 때는 고기 떼들이 상어를 다 뜯어먹고 난 뒤였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뼈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 소설의 결론입니다. 

평론가들은 소설 속의 주인공인 노인은 바로 헤밍웨이 자신을 묘사한다고 말합니다. 헤밍웨이는 어릴 때부터 힘센 흑인들과도 팔씨름을 해서 이길정도로 건강했다고 합니다. 그의 별명이 챔프 즉 챔피언이었습니다. 챔피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헤밍웨이는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했습니다. 정말 인생을 멋지게 잘 살았다고 생각할 만큼 그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여 살았습니다. 그런데 인생 말엽에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뼈다귀 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헤밍웨이 인생의 마지막이 사실상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장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결국 이 소설은 소설가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경외함이 없이 열심이 행동하고 열심히 전투적으로 산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싸우기는 싸웠습니다. 하지만 왜 싸웠는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싸웠는지 몰랐습니다. 무엇인가를 추구했지만 그 목적은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지금 그렇지 않습니까? 초등학교 때는 무엇 때문이지는 몰라도 학원을 서너곳씩, 또는 데여섯 곳 씩 다닙니다. 그리고 중학교때는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좌우지간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무엇 때문인지 목적도 모른채 대학에 가려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대학에 가서는 1학년 때부터 취업하려고 또 열심히 공부합니다. 졸업하고는 입사해서 짤리지 않으려고, 남들보다 먼저 진급하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진급한 다음에는 집을 사려고 합니다. 진 산답시고 교회생활, 영적생활 생각지도 않고 변방 구석 같은 곳에 가서 삽니다.  그리고는 새벽예배와 수요기도회는 거리가 머니 당연히 못나오고 주일도 자주 빠집니다. 
그 다음에는 더 큰집 구하려고 안달을 합니다.  화장실이  하나뿐인 아파트가 불편하다고 화장실 두개 달린 아파트를 소유하기 위해서 이것 저것 희생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공부 시킨다고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아이를 위해서 이사도 하고 기러기 아빠노릇도 합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성공적으로 살았습니다. 남들이 하는 것 다 해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말년을 맞아 인생이 무엇인지 뒤돌아보면, 노인이 바다에서 얻은 상어처럼 뼈 밖에 남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실재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누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촌년 10만원"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자 홀몸으로 힘든 농사일을 하며, 판사 아들을 키워낸 노모가 있었더랍니다. 이 노모는 밥을 한끼 굶어도 배가 부른 것 같고, 잠을 청하다가도 아들 생각에 가슴 뿌듯함과, 오유월 폭염의 힘든 농사일에도 흥겨운 콧노래가 나는 등 세상을 다 얻은 듯 해 남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이런 노모는, 한해 동안 지은 농사 걷이를 이고 지고 세상에서 제일 귀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 한복판의 아들 집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제촉해 도착했으나, 이날 따라 아들 만큼이나 귀하고 귀한 며느리가 집을 비우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판사이기도 하지만, 부자집 딸을 며느리로 둔 덕택에 촌노의 눈에 신기하기만한 살림살이에, 눈을 뗄 수 없어 집안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뜻밖의 물건을 보게 됐습니다. 그 물건은 바로 가계부였습니다. 부자집 딸이라 가계부를 쓰리라 생각도 못했는데, 며느리가 쓰고 있는 가계부를 보고 감격을 해,그 안을 들여다 보니 각종 세금이며 부식비, 의류비 등 촘촘히 써내려간 며느리의 살림살이에 또 한번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조목조목 나열한 지출 내용 가운데 어디에 썼는지 모를 "촌년 10만원"이란 항목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무엇을 샀길래? 이렇게 쓰여 있나 궁금증이 생겼으나 1년 12달 한달도 빼놓지 않고, 같은 날짜에 지출한 돈이 물건을 산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용돈을 보내준 날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촌노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아들 가족에게 줄려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이고 지고 간, 한해 걷이를 주섬주섬 다시 싸서, 마치 죄인된 기분으로 도망치듯 아들의 집을 나와 시골길에 올랐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성공하고 좋은 머느리가 집 안에 들어와도 하나님 경외함이 없으면 "촌년 10만원" 취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간 도리의 근본인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함이 없이 아무리 노력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노인과 바다의 결말 밖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묵상할 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고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 62:1에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세계의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불가사의한 것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유대민족이라고합니다. 3500여년 동안 숫한 외국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도 오늘날까지 흔들림이 없이 그 민족을 지탱해 올 수 있었던 유대민족의 저력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것이겠습니까? 정확히 노벨상 수상자의 24%가 유대인입니다. 미국 지성계를 움직이는 유명교수들의 30%가 유대인입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The News and World Report 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을 움직이는 30명의 인사중 5%가 유인이라고합니다. 미국전체인구의 3.2% 밖에 안되는 소수민족중의 소수민족인 유대인이 그 어떤 다수 민족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여론을 좌우하는 뉴욕타임즈가 유대인의 것입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뉴욕 증권시장에 기침을 한번 하면 세계의 경제는 폐렴에 걸린다고 합니다. 유명한 변호사 의사 과학자 우주공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유대인이라고합니다. 세계사에 거목처럼 버티고 선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제대로 번듯한 나라 한번 갖지 못하고 수 천년을 이민족의 침략만 받으며 살아왔던 작고 약한 유대민족에게서 이처럼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큰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읍니다.

그러나 답은 간단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비록 피곤하고 무능할지라도 여호와를 앙망하기만 하면 능력을 주시고 힘을 더하여 주시기 때문인줄로 믿습니다. 

강한 나라 만든다고 고대 스파르타에서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3개월이 될 때 문밖으로 내어던져놓았습니다.그리고는 문안으로 기어들어오는 아이는 젖을 먹여 살리고 비실비실해서 문안으로 기어들어오지 못하는 아이는 굶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토록 강하게 키웠던 스파르타제국은 지도에 이름도 없이 망했는데 그렇지 못한 유대민족의 자녀들은 지금 세계를 움직이고 있읍니다. 그것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거역한 민족은 아무리 스프르타교육을 해도 망하는 것입니다. 

인류는 급속도로 문화가 바뀌고 있습니다. 원시 사회에서 농업사회로 바뀌는 것이 5000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농업사회에서 산업(공업)사회로 바뀌는 것은 500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산업(공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바뀌는 것은 50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문화가 바뀌는 것은 5년도 걸리지 않습니다. 빠른 속도로 변해만 가는 세상에서 우리 자녀가, 우리 인류가 쇠약해지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살 수 있는 비결은 여호와를 앙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자라는 것은 불량자로 자라는 것이며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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