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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마땅히 행할 길 (잠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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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행할 길 (잠 22:6)


가정의 달 5월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주님의 평강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린이날을 이틀 앞둔 어린이주일입니다. 우리교회에서는,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인 자녀들을 위해서, 5월 17일주일부터 한 주간을 교육주간으로 선포하고, 여러 가지 교육사역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런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벼슬이 높고, 돈도 많은 명문 대갓집에 후손이 없다가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가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고추가 달린 것만도 황공할 텐데, 금상첨화로 冠玉같이 잘 생긴 아이였습니다. 삼칠일이 지나면서 큰 잔치가 열렸습니다. 일가친척, 동네 이웃, 당대에 명망이 높은 현자賢者들도 여럿 초대를 받았습니다. 아기의 장래에 대한 현자들의 덕담을 듣고 싶어서였겠지요. 한바탕 잔치가 벌어진 후, 드디어 아기를 대면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기의 장래를 축복해주었습니다. 현자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첫째 현자는, 이 아이가 장차 높은 벼슬에 올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둘째 현자는, 선대의 몇 배 가는 甲富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셋째 현자는, 백세가 되도록 건강하게 장수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계속되는 현자들의 덕담 역시, 보통 사람들의 덕담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들이 현자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아기의 부모를 크게 만족시켰습니다. 그래서 현자들에게 큰 상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상을 내리고 보니, 아직도 덕담을 하지 않은 한 賢者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에게도 상을 주고 싶어서, 그 마지막 현자를 좌중 앞으로 불러내어서 아기를 위해서 좋은 말 한 마디를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 현자는 차례가 안 와서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습니다. 

그 현자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명문 대갓집 장손, 아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진실은, 한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 아기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Sein zum Tode, Heidegger). 그래서 그는 덕담을 강요받자 조심스럽게 입을 떼며 말합니다. “이 아이는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그 말 때문에, 그 현자는 그 즉시 두들겨 맞고 잔칫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는 이야깁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 자녀를 진정으로 축복하는 일이겠습니까? 돌잡이 행사이겠습니까? 덕담이겠습니까? 예전 돌잡이에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쌀과 돈, 권력을 상징하는 활, 학식과 학문을 상징하는 붓, 장수를 상징하는 실 등이 있었지만 요즘은 마우스도 있고(빌 게이츠), 야구공도 있고(박찬호), 골프공도 있고(박세리), 장난감 바이올린도 있고(사라 장), 스케이트도 있답니다(김연아).

우리나라 어린이날 역사에서 볼 수 있는 한 가지 뚜렷한 변천이 있습니다. 어린이가 ‘겨레의 새싹’에서부터 출발하여 ‘가족의 제왕’이 되었다는 겁니다. 역사적인 유래를 보면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썼습니다. 방정환 선생님이 “아해들을 半사람으로 보지 말기를” 호소하면서 ‘어린 사람’이라는 뜻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동몽童蒙, 아동, 소년, 아이, 애들, 애놈 등으로 불렸는데, ‘젊은이’ ‘늙은이’처럼 인격을 부여해서 ‘어린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겁니다. 

일제시대에는, 우량아 선발대회가 있었습니다(한 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몸의 근량을 달아보고, 키를 재보는 것을 부모의 책임. 동아일보 1929 5월 12일자). 그런가 하면 1920년대 30년대 전국 100여 개의 감리교계 유치원 감독을 맡았던 미국 선교사 ‘허길래’는 조선에서는 “가정생활의 중심을 어린이로 삼아 음식물을 어린이가 싫어하는 것은 식탁에 두지도 않고” “어린이가 심술 한번 부리고 몸부림 한번 하면 가족은 까닭 없이 항복하며” “어른들이 어린이 시하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부모들의 맹목적인 자식사랑이나 관대함을 지적하는 대목). 

해방 후에는, 어린이를 ‘새 나라의 어린이’로, ‘새 나라의 새 주인으로 ‘어린이는 나라의 일꾼 부지런히 공부하여 새 나라의 역군이 되자’는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 때 불렸던 동요가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윤석중 작사, 박태준 작곡).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어린이날이 공휴일로 제정되었지만(1975), 이때부터 어린이는 가족의 영광을 위해서 입시전쟁에서 싸우는 전사戰士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이(자녀)가 가족을 지배하는 제왕의 위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선일보에서 오랫동안 글을 쓰셨던 이규태 씨는 “어린이는 왕이다”는 이상한 논리는 우리나라에서만 통하는 논리가 아닌가 싶다며 ‘가족의 제왕’이 된 어린이의 위상에 강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버스나 전철을 타보면, 어린이를 앉히고 어른이 서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 아닐까 싶다. 영국 같은 데는 장거리가 아니고는 비록 빈자리가 있어도 앉지 않는 것이 상식인데, 그래서 이 작은 임금들은 집안에서는 폭군이 되고, 집밖에 나가면 자신의 이해(利과 害)를 주장하고, 쌈 한번 하지 못하는 약군弱君이 된다···어린이가 괄시당한 시절에 생겨난 ‘어린이날’의 의미는 이제쯤 달라져야 할 것 같다. 독수리가 새끼를 깃으로부터 떨어뜨리는 그런 자립을 재촉하는 날이었으면 한다”(이규태, 「逆說 어린이날론」. 1985. 5. 5).

이런 사회적인 변천과정을 겪으면서 기업들이 주도하는 어린이날이 또 한몫을 톡톡히 해왔습니다.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식의 광고카피가 나오기 시작했고, 1994년 한 분유회사에서는 “내 아기는 다르다. 내가 남들과 다른 것처럼 내 아기는 그 누구와도 다르다. 무엇이든 최고의 것을 주고 싶다. 아기를 키우는 데는 연습이 있을 수 없으니까”라는 광고 카피가 나왔습니다(기업의 상업성에 휘둘리고 있는 어린이 교육관 대변). 

기러기 아빠 문제도, 심각한 우리사회의 문제입니다. 한 30대 여성 회사원은, ‘아침에 기러기아빠 상사의 책상에서 빈 빵 봉지를 발견하고 눈물이 날 뻔했다’고 합니다.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빵 조각으로 저녁을 때우는 한국의 아버지상이 떠오르더라는 겁니다. 아버지뿐이겠습니까? 남편과 생이별해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외롭게 살아야 하는 아내인들, 따뜻한 세 끼 밥 먹을 수 있겠습니까? 자녀를 위해서 이처럼 자기를 희생하는 부모,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부모의 일방적인 자기희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볼 일입니다. 부모 된 우리의 자식사랑과 교육은 이런 사회적인 환경, 가치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 6). 

여기에서 솔로몬은, “마땅히 행할 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길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길을 따라 살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지요.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출세의 길, 성공의 길, 부자 되는 길, 권력을 잡는 길, 성공했지만 패망하는 길, 권력을 잡았지만 그것이 치욕이 되는 길,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성경은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인생의 길,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다 하셨지요, 그 길이 있습니다. (2)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사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길을, 성경에서는 ‘우리 조상 다윗의 길’이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 없이 산 인생의 길을 ‘아합의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합의 길을 좇아 삽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해주는 증언입니다. 유다 왕, 므낫세라는 왕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왕 위에 즉위하자,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이었던 ‘아합 왕의 행위’를 따랐습니다. 그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보십시오.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서,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山堂들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日月星辰을 경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성전에 제단을 쌓고, 또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또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우상을 성전에 세웠더라”(왕하 21, 1-7). 

문제는, 므낫세의 악함이 므낫세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가 다스리던 온 유다백성들의 보편적인 죄악이 되었다는 점, 주목할 일입니다. 
“이 백성이··· 므낫세의 꾐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여러 민족보다 더 심하였더라”(왕하 21, 9).

‘길’이라는 것은, 나 혼자서만 다니는 길도 혹 있지만, 길은 불특정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게 하는 기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길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 어느 길을 가르치느냐?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결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길’이 그 사람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만일, 자기 ‘인생의 길’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면, 세상사는 사람들 누가 염려하며, 걱정하며 살겠습니까? 그저 자기가 가고자 원하는 길로 가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길이 자기 길이 될 것이고, 그 길이 곧 형통의 길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부모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레미야 10, 23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 앞에는 수많은 길이 놓여 있지만, 그 길 중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도 있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길도 많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의인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무릇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입니다(시편 1, 6). 

“마땅히 행할 길”은, 하나님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랐던 ‘조상 다윗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길 되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르쳐야 한다는 겁니다. 이 길은, 우리와 자녀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가야하는 길이고, 그 길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할 길이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 길입니다.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는 그 길(the Way)입니다. 이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는 겁니다. 특히, ‘아이 때’에 가르치라 했습니다.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라’ 했습니다.

이 길을 아이 때 가르치라는 것은, 다른 길을 배우고 가기 전에, 白紙와 같은 인생의 바탕에다, 하나님의 길을 선명하게 그려주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길, 생명의 길, 복음의 길을, 어릴 적에 자녀의 人生에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려주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교회 교육위원회에서 우리 부모님들께 던지는 캠페인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당신의 자녀는 주일아침, 어디에 있습니까?󰡕입니다. 매우 작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 하나 속에 여러분의 자녀들의 일생이 결정되고, 生死가 갈리는 인생의 중대사가 다 걸려 있습니다. 
2,000년 전 유대민족의 지도자였던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예루살렘 대표자).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A.D. 70년, 예루살렘의 패망이 목전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는 최후의 순간에 유대인이 로마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그가 찾은 답은, 신앙교육이었습니다. 유대민족이 로마를 이길 수 있는 길은, 토라말씀에 대한 교육에 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던 학교와 도서관, 율법학자들을 보존하기 위해서 자신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합니다. 마침내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도 퍼뜨리게 합니다. 이유는, 묘지가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던 로마군 ‘베스파시아누스’ 사령관을 만나서 담판을 짓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관을 타고 예루살렘 성 밖으로 빠져나가 베스파시아누스를 만나는데 성공합니다. 만나자마자, 그는 사령관을 󰡔황제여!󰡕라고 불렀습니다. 군사령관이 놀랍니다. 바로 그 때 전령이 옵니다. 로마 황제가 죽고 원로원에서 베스파시아누스를 새로운 로마의 황제로 선출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혜안에 감동을 받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벤 자카이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고 약조합니다. 그 때, 랍비 벤 자카이가 요구한 것은, 지중해 해변에 위치한 인구도 적고, 아무런 생산품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城도 없는 자그마한 󰡔야브네 거리󰡕만은 지금 대로 保全해주기를 요구했습니다. 승낙을 받았습니다. 온 예루살렘 성이 초토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브네 거리’는 아무런 피해도 없이 고스란히 保全됩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야브네 거리에는, 유대인의 탈무드가 있는 도서관이 있고, 학교가 있고, 많은 탈무드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 대신, 유대인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지키게 해주는 하나님의 말씀 토라와 그것을 가르치는 학교와 랍비들을 최후의 선택으로 삼았던 겁니다. 마땅히 행할 길인,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북한의 가장 큰 主敵은 美國도 아니고, 남한도 아닙니다. 예수쟁이들입니다. 북한당국자들은, 북한이 예수쟁이들에 의해서 결국은 무너질 것이라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1,000여개가 넘는 지하교회가 있습니다. 그 지하교회 교인 중에는, 성경책 한 권 얻기 위해서 20년을 기도한 사람도 있고, 무려 40년을 기도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늙어서도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정에 사랑하는 자녀들을 基業과 賞給으로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부모 되게 하시고, 주의 길을 그 마음에, 인생에 분명하게 닦아 주는, 선구자적인 부모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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