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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주시리라 (행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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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주시리라 (행 1:4~8)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니컬러스 케이시 주연의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평범한 경찰관 랭은 식당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오다가 마침 팁을 줄 돈이 없자 복권이 당첨되면 절반을 주겠다고 여종업원 ‘이본느’에게 약속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400만 달러 복권에 당첨되자 랭은 주저하지 않고 절반인 200만 달러를 약속대로 여종업원에게 줍니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약속은 어디까지나 약속입니다(Promise is promise).”

이 영화를 보면서 약속이라는 말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미 우리 사는 이 세상은 믿을 수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은행에서 대출을 한 번 받으려고 하면 서류에 도장을 얼마나 많이 찍는지 모릅니다. 모든 서류에 대하여 맨 앞장에 한번만 싸인을 해도 될 수 있을 법한데 페이지 마다 도장으로 빨갛게 도배를 하다시피 도장을 찍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말로 한 약속은 믿을 수 없으니 보증인을 세우고 도장을 찍고 서류가 복잡 할 수록 신뢰가 없는 사회입니다. 
보증인이 없어도 무슨 도장이나 서류가 아니어도 한번 약속한 것을 끝까지 지키는 신뢰사회가 되어야 건강한 세상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약속, 정부가 국민에게 한 약속들이 휴지 조각처럼 되어버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그래도 상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하여 민수기 23장 19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세상은 시끄럽고 복잡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지난 시간에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신 세 가지 약속에 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 약속은 무엇이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전 우리에게 주신 첫 번째 약속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약속이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약속에 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먼저 본문 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4:49절의 말씀을 보면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셔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은 요한 복음 14:16절에서도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전에 약속하신 이 말씀을 본문에서 부활 후에 다시 확인하시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그렇다면 주님이 보내주신다고 하신 성령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요14:6절에서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보혜사(保惠師) 라는 헬라어 Paracletos입니다. 은혜를 베풀며 가르치고 도와주는 스승 또는 변호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오시는 보혜사라는 뜻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보혜사로 오셨습니다. 
인자와 긍휼로 사랑과 자비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자들, 소외된 자들, 범죄하고 멸망 받을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푸신 보혜사이십니다. 그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사역을 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보혜사였고 이제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주의 자녀들을 가르치고 인도할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경은 성령님을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의 영이라고도 하십니다. 
성령에 대하여 말하려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삼위란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게 성부, 성자 성령 세 인격이 존재하는데 이 세인격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일체 즉 본질적으로 한분이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오해한 이론들이 있습니다. 삼신론과 양태론입니다. 
삼위일체론은 '세 인격의 한 하나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삼신론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태론(modalism)이 있습니다. 양태론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 역사에 따라 존재 양식을 달리하셔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부로 활동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성자로 그리고 현대에는 성령으로 활동하신 다는 것입니다. 양태론은 한 인격의 한 하나님을 주장합니다.

삼위일체를 오해하면 삼신론이 되거나 양태론이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다르게 활동하실 수 있습니다. 능력이나 영광이나 권능이 동등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세 인격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의 교리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에 대한 말씀을 나눠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AD 326년 니케아 공회에서 확정된 이후 수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과 성령의 감동을 받은 학자들에게 의해 정리되고 다듬어진 진리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과 충만하게 되는 것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겠으니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행2:1-2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말씀을 믿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하늘로부터 불같이 각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중생을 의미합니다. 죽었던 사람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호흡이 정지되었던 사람에게 심폐소생술을 하여 다시 맥박이 뛰고 호흡이 돌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생들은 기본적으로 영적으로 죽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영혼을 살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는 것은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님을 믿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성령님을 여러분의 마음에 보내시어 살려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나를 위해 주님이 보내주셔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적용 됩니다. 행2:3절에 보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도 각 사람에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으로 각 사람에게 임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내게 보내주신 순간에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내게는 믿음이 생기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나를 살리신 성령님은 내게 생명의 영이되시어 나를 떠나지 않고 내 안에 거주하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성령의 내주라고 합니다. 
내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내 영과 더불어 살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3:16절에서 우리를 향하여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신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젠 성령의 충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일까요? “성령 충만” 하면 우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능력을 생각합니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 충만의 전부는 아닙니다. 성령 충만이란 말 그대로 성령이 내안에서 충만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 충만을 구분할 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감성적인 충만 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감정이 뜨거워집니다. 즉 열심히 생깁니다. 차갑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두 번째는 은사적인 충만입니다. 성령이 내안에 충만하면 각종 하나님이 주시는 방언이나 병고침 또는 다른 신비한 체험과 같은 은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가 열리기도 하고 재능이 주어지기도합니다. 
세 번째는 인격적인 충만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이야기 할 때 첫째와 둘째까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의 가장 중요한 모습인 인격적 충만에 관하여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인격적 충만이란 우리의 심성이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심성으로 바뀌어가는 것입니다. 즉 나의 인격이 예수님의 인격으로 따라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 2:5절에서 너희 안에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우리 마음 안에 품으라고 했던 그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직접 대답을 하신 것 볼 수 있습니다. 마 11:29절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의 마음 즉 인격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오늘날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신자들에게 우선 시급한 과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성령 충만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어 기도하고 각종 방언이나 예언 환상을 보는 신비한 기적을 체험하고 영적세계를 안다고 해도 예수의 마음을 품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충만한 모습이 아닙니다. 

요한 복음 1: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영접한다' 는 말은 매우 성령충만과 관련되어서도 아주 중요 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의지적 결단에 따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제시하시는 조건을 전부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지금 우 리 주변에서 기독교라논 이름으로 벌어지는 일들과 매우 다릅니다. 
과거에 주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주님을 상대로 협상을 벌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의 조건을 전부 수용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이란 작은 문제 하나까지 주님의 말씀 즉 성경진리에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생각을 존중하고 주님의 말을 순종하며 주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주님의 인격이 이루어진 성령 충만한 삶은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우리의 귀를 거쳐 우리의 발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두 번째, 성령을 보내리가 하신 그대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셔서 이젠 성도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주하고 계신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기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내안에 나를 정복하고 나를 다스려 나로 하여금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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