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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자녀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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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엡 6: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축복을 저와 여러분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이 땅에 두 기관을 세웠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가정이요, 나머지 하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가정과 교회를 하늘의 축복을 전해주는 통로로 세웠다고 한다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르긴해도 사단은 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이 두 기관을 공격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봅니다.

오늘 날 이 세상의 그 어떤 기관보다 영적으로 가장 공격을 받는 곳이 가정과 교회입니다. 수많은 가정들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대게 성격차이로 깨어진다고 합니다. 혹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위태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영적인 위협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부부 사이의 관계만 위협 받는 것이 아니고, 부모와 갈등 역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 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자식을 버리는 부모, 부모를 포기하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IMF 이후 고아원에 아이들이 부쩍 늘었다고 합니다. 부모들의 수명이 짧아졌나요? 아닙니다. 양쪽 부모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아이들이 고아원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TV에서 방영된 한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다가가서 “왜, 우니?” 라고 묻자,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 엄마가 조금만 있으면 데리고 온다고 하는데 엄마가 오시지 않아요?” 눈물을 흘리면서도 참을 줄 아는, 벌써 눈치가 생긴 6-7살쯤 보이는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는 고아원에 온지 3개월이 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 아이의 마음에 생긴 상처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 마음의 상처가 치유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시대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IMF 시절 유행하던 단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효도관광입니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효도관광을 떠나고자 하면, 많은 어르신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고 합니다. 부모님 해외 구경시켜드린다고 함께 나가서 길도 모르는 곳에 부모님을 떼어놓고 자기들은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효도관광이 현대판 고려장이 되버린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포기하는 이러한 시대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늘의 축복을 전해주는 통로인 가정을 다시 회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복들을 우리가 체험할 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대대로 물려 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면, 1-3절은 자녀가 부모를 어떻게 섬겨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의 말씀은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다루어야하는지를 단 한절에 명령어로 담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엡6:4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에게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사용된 ‘교훈과 훈계’, 그리고 ‘양육’이라는 단어는 모두 적극적인 훈련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들입니다. 자녀 양육은 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자녀 양육은 자녀를 낳고 데리고만 있으면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적극적인 교육의 비전을 갖고 양육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의 자녀들은 하늘을 나르는 비전의 주인공들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자녀 양육의 원리는 무엇이겠습니까? 1. 아버지가 양육의 궁극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늘 에베소서의 본문(6:4)은 ‘아비들아’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왜, 어미들아 하지 않고 ‘아비들아’ 했을까요? 이 말을 하게 된 사회적 배경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로마시대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로마시대엔 “빠드라아 뽀데스따스(Patria potestas)”라는 법률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법이란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자는 자기 자녀에게 절대적인 소유권이 있었습니다. 자녀를 버릴 수도 있었고 심지어 노예로 팔 수도 있었습니다. 자녀 교육이라는 명분아래 채찍질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성경은 혁명적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로 노엽게 하지 마라. 로마의 법률이 아니라 주님의 교훈으로 양육해라. 네 법이나 전통이 아니라 주님의 훈계로 양육해라!” 여기 주동사는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비 여러분, 여러분들은 자녀들의 양육에 얼마나 진지한 관심을 갖고 기도하며 아내들과 협력하고 계신지요?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바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 너무 바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바빠하고 있으신 일들이 내 자녀의 미래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란 말입니까? 요즈음 자녀들은 "우리 아빠는 나빠는 아니지만 바빠”라고 한답니다. 우리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남자들이 직장 상관들이나 동료들에게 저녁이나 주말 시간을 함께 할 것을 요구받았을 때 “난 오늘 저녁에 내 자녀들과 약속이 있습니다”라고 자연스럽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오늘날 가정에서 일어나는 최대의 불행의 뿌리는 가정에서의 ‘아버지 부재 현상’이라고 지적합니다. 도연애자 자녀들과 알콜 중독자 자녀들의 가장 보편적인 원인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때문이라는 것은 이제는 상식이 되어가고 있지만, 이런 상식적 불행의 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최근 한국의 아빠들에게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독수리 아빠, 기러기 아빠 그리고 펭귄 아빠입니다. 독수리 아빠는 언제나 자녀와 함께 있어주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자녀 곁으로 날아가는 아빠이고 ,기러기 아빠는 일년에 가까스로 두세 번 자녀들에게 얼굴만 보여주는 아빠랍니다. 그런데 펭귄 아빠는 아예 아내와 자녀들에게서 단절되어 팽 당한 아빠들이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아빠입니까? 제발 독수리 아빠가 되십시오.

오늘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명문대학에 좀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요즘 부모들의 많은 관심입니다. 그 이유는 명문 대학에 들어가면 그래도 그 자녀 앞길에 여러가지 가능성이 많이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아들들이, 자녀들이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던 그 어머니들이 모여서 어떤 “자녀들이 명문대학에 들어가는가?” 토의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옛날에는 자녀만 혼자 똑똑하면 명문대학에 들어가고 모든 것이 좋았지만, 이 엄마들의 생생한 토론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명문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자녀의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학원을 다섯, 여섯 개 정도 뛰어도 전혀 지치지 않는, 그래서 자녀들의 체력이 튼튼해야 됩니다. 두 번째는 좀 재미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재력이 있어야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 연세 많으신 어른들 교육 아직 안 끝났습니다. 예, 우리 손자 손녀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재산을 지금 쓰기 위해서 굉장히 계획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대에 돈을 벌어서 이 자녀들에게 정말 필요할 때 투자하기 위한 돈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산이 있지 않으면 자녀를 명문대학에 보낼 수 있도록 투자를 하기가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엄마의 정보력과 분석력입니다. 어느 학원에 어느 선생님이 유명한가, 어떤 길을 걸어가면 이 대학에 이 자녀를 입학시킬 수 있는지, 엄마의 뛰어난 정보력, 정보력만 가지고 안되고 그것을 분석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적기 적소에 결단을 해야 되는 엄마의 놀라운 실력들이 뒷받침 되어야 됩니다. 또 하나 아이러니 하게 되는 조건은 아빠의 무관심입니다. 예, 아빠가 관심 갖기 시작하면 그 자녀는 명문 대학에 백발 백중 못 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내들이 그런식으로 자녀 교육할 때 어느 아버지가 동의를 하겠습니까? 그러니 자녀 때문에 말다툼이 나니까 차라리 모른체 하는게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즘은 오히려 아버지의 자녀 교육의 자리가 점점 적어지는 시대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여러분, 부성애가 얼마나 위대한지 아십니까? 소설가 조창현씨가 쓴 "가시고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가시고기를 읽어보면 남자의 눈에서 참 억누를 수 없는 눈물이 나와요. 사나이들의 눈물 있잖아요. 자기 아들인 다움이가 백혈병을 앓고 있습니다. 다움이를 낳고 난 후 다른 남자를 만나 프랑스로 떠나버린 아내를 대신해서 아들을 극진히 보살피는 것은 아빠였습니다.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서 자신의 희망을 버리고, 오직 자식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아들의 백혈병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한 아빠는 결국 자기의 신장을 팔기로 합니다.

그러나 신장을 팔기 위해 장기 검사를 하던 중, 아빠가 간암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 결국 신장을 팔 수 없는 아빠는 자신의 각막을 팔아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해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간암을 더욱 깊어져 아빠가 죽음을 맞아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빠는 자신의 병과 죽음 때문에 아들이 슬퍼하는 게 싫어서, 아들 다움이를 프랑스에 있는 엄마에게로 보내고, 자신은 쓸쓸하게 죽음을 맞게 됩니다. 아들을 살려내기 위한 아빠의 희생이 아들은 살렸지만, 자신의 몸은 산산이 부셔져 죽어가야 했던 그 모습은, 새끼를 위해서 자신의 몸뚱이까지 먹이가 된 가시고기를 연상시켜 줍니다. 이게 '가슴 아픈 가시고기의 사랑'입니다. 이 작가도 아버지의 이 사랑을 가시고기에 비유했지만, 참 이 '가시고기'는 이상해요. 여러분, '가시고기'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가시고기는 바다에 살다가 이른봄이 되면 산란을 위해서 민물하천으로 올라옵니다. 수컷 가시고기가 민물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동안 암컷은 둥지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며 놀기만 합니다. 둥지가 완성되면 암컷은 '집이 얼마나 잘 지어졌는지'를 확인하고는 마음에 들면 그곳에 알을 낳습니다. 알을 낳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3-4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알을 낳은 암컷은 미련 없이 둥지를 떠나 버립니다. 그러면 수컷은 알을 낳고 도망 가버린 암컷을 대신해서 알을 지킵니다. 알을 빼앗아먹기 위해서 모여드는 침입자들로부터 알을 지켜내기 위해서 1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잠시도 쉬지 않습니다. 만 8일째 되는 날 새끼들이 알에서 부화합니다. 새끼들이 모두 부화했지만, 수컷은 둥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어린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둥지를 짓기 시작할 때부터 약 15일 동안 수컷 가시고기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직 새끼만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붓습니다. 그러고 나면 수컷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맙니다. 주둥이는 다 헐어버리고, 화려했던 몸 색깔은 볼품 없이 퇴색해버립니다. 그리고는 둥지 앞에서 힘없이 몇 번 움직이다 죽고 맙니다. 둥지를 떠났던 새끼들은 죽은 수컷 주위로 몰려들어, 죽은 아비의 살을 파먹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T.V를 통해 보았는데 화가 나더라구요. 새끼들을 위해 자신을 다 쏟았는데 그 놈들은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비의 심정을 손끔 만도 알지 못해요. 그저 그들이 하는 것은 앞 다투어 지 애비의 살을 파먹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성이 섬세하다면, 부성의 사랑은 거룩한 희생이 담겨있어요. 

2.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할일을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바울 사도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권면합니다. 오늘날의 젊은이 세대를 가르쳐 ‘성난 세대’(angry generation)라고 표현한 작가가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성난 세대를 만든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의 자녀들이 그렇게 성난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원인들을 지적할 수 있다면 저는 세 가지 1)방임과 2)과잉 보호, 3)과잉 징계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우리 가정의 자녀들이 거의 방임상태에 버림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언제 여러분의 자녀들과 진지하게 시간을 함께 보내고 인생을 이야기해 보셨나요? 방임 못지않게 나쁜 것이 과잉보호입니다. 과잉보호의 뿌리는 불신입니다. 자녀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런 자녀의 눈에 보이는 부모는 자애로운 보호자가 아닌 자신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폭군인 것입니다. 그리고 과잉징계는 결정적으로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원인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징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과잉징계를 경계합니다. 그것은 자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잃는 것입니다.

성난 자녀를 만들지 않으려면 어떤 경우에도 부모는 성난 상태에서 자녀들을 나무라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감정이 통제 안 된 상태에서의 어떤 이야기도 그것은 자녀들에게 부모의 교육이 아닌 폭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자녀 양육의 출발점은 부모 자신의 감정의 통제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자녀들을 향한 속상한 마음들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 성경적 대답은 ‘성령 충만’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가정에 대한 그의 교훈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엡 5:18을 기억하십시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 충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제력입니다. 술에 취하면 술의 지배를 받고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부모의 감정이 다스려지지 못한 상태는 마치 술 취함과 같습니다. 변덕스런 부모의 감정의 분출을 목격할 때마다 자녀들은 깊은 내적인 혼란과 분노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자녀 양육을 원하신다면 먼저 성령 충만을 구하십시오. 자녀들을 인해 속상한 상태에 계십니까? 그런 상태에서 입을 여시면 안 됩니다. 먼저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성령 충만을 구하십시오. 성령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이 성경적 자녀 양육의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어린이 주일 여러분에게 꼭 들려 줄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석유재벌 록펠러입니다. 그는 백만 평 대지에 12개의 대학을 세워 미국사회에 헌납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시카고 대학입니다. 시카고 대학은 한동안 동양학생들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버드나 예일, 스탠포드 같은 대학에 비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명문 중에 명문입니다. 설립한지 100여년 남짓한 기간에 5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역시 노벨상을 수상한 교수가 29명이나 재직하는 학교가 바로 시카고 대학입니다. 록펠러는 시카고 대학을 비롯해서 12개의 종합대학과 4,928개의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 모든 일을 십일조만으로 이루었다고 하니 그가 소유했던 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시카고 트리뷴]지의 경제부 기자가 물었습니다. "록펠러씨 당신은 지금까지 26년 동안 세계 제일의 부를 누리고 계시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으부터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록펠러 어머니의 유언은 유명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1.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2.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3.주일 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4.오른 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5.아무도 원수를 만들이 말라./ 6.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7.잠자리에 들 기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8.아침에 꼭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9.남을 도룰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10.예배 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아라. 록펠러는 고백합니다. “내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유형의 재산보다 더 풍부한 무형의 재산을 물려줌으로써 아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 준 부모의 인도였기에 가능했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신앙의 유산을 물려 줄 수 있을까요? 이 달이 가정의 달이지만, 이 사회는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마땅히 공경해야 할 부모를 자녀가 공경하지 않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해야 될 부모의 책임을 저버리고 있는 이 세대. 우리 모두 말씀 앞에 가슴을 열고 겸손하게 이 말씀을 받아 무너져 가는 우리의 가정을 지켜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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