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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합당하게 행하자 (살전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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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당하게 행하자 (살전 2:1~16)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후, 유대인들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역사했던 복음 사역을 훼방했습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인 교인들을 핍박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 일행도 당시 떠돌며 철학 지식 나부랭이로 돈벌이하던 냉소주의 스토아 철학자들과 같은 부류로 매도하고 악평했습니다. 2장 1-16절은 이런 악의적인 뒷소문들에 대한 변증입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 앞서 빌립보에서 사역했습니다. 그곳에서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었는데, 점으로 소득을 올리던 주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옷이 찢기고 벗겨진 채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고난과 능욕”을 당했습니다(1, 행 16:16-23). 선을 행한 후에 당하는 고난과 능욕은 사람의 마음을 위축시키고 의욕을 떨어뜨립니다. 하지만 바울 일행은 도리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데살로니가에 전파했습니다(2). 이것은 데살로니가 개척 역사가 인간의 힘으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을 힘입어” 되었다는 강력한 논증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행한 바울 일행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나 “궤계”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3). ‘간사’는 오류를, ‘부정’은 순수하지 못함을, ‘궤계’는 미끼로 사람을 꼬이는 방식을 의미하는데, 당시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그들의 구미에 맞추었던 개똥 철학자들의 모습을 특징짓는 단어들입니다. 하지만 바울 일행은 이런 모습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습니다(4). 하나님께서 시험하신 후에 복음을 맡길만한 신실한 청지기로 인정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 없이, 미끼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권면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복음은 능력 있게, 호소력 있게, 매력 있게 역사했습니다.

데살로니가 2장은 변증하려는 목적이 강하지만 그 내용들은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합니다.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맡은 청지기라면 그분의 뜻에 따라 오류 없이 순수하게 복음을 권면하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입어 복음을 전파한다면 강요할 필요도 상대방을 조작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간사와 부정과 궤계는 하나님께 옳게 여김을 받은 교회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청중의 기호를 조사하여 그들의 듣기 좋아할 말씀을 전하며, 그들이 좋아할 미끼를 홍보하는 일들은 복음 전파를 위임받은 자가 가질 자세가 아니지요. 짭짤한 수입을 위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남발하는 것은 미끼로 돈을 따먹는 야바위꾼의 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위임 받은 자라면 우선적으로 그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오류 없이’ 전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마음’을 유지해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살도록 힘써야 하겠지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궤계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할 것입니다(4). 간사와 부정과 궤계가 있는 곳에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라는 열매를 기대한다는 것, 간사와 부정과 궤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겠다는 발상은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청지기로서 간사나 부정이나 궤계가 없는 권면으로써 오직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기 때문이며,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5). ‘아첨의 말’은 듣기 좋은 말을 할뿐 아니라 그것을 통한 반사 이익을 계산하는 말입니다. ‘탐심의 탈’은 복음 전파라는 구실을 내세우면서 실상은 자신의 욕심을 위하는 위선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6)하였다는 말씀은 데살로니가에서 바울 일행의 삶이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과는 상관없는 모습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존중할 터이나”라는 말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4절에서 바울은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복음 전파에 전념하는 자가 생활 문제에서 지원 받는 것은 전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님께서 명하신 것으로서 복음 전파자의 권리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아내를 데리고 다니면서 그런 원리에 따라 살았습니다. 바울 역시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계형 떠돌이 철학자들이 많았던 헬라 지역에서 그 원칙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복음 전파를 생계 수단으로 오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특권을 포기하고 도리어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7) 섬겼습니다. 성도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 목숨까지”(8) 주기를 즐겨할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고난과 능욕과 많은 싸움 속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실상 목숨까지 주기로 작정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복음이 왜곡됨 없이 바르게 전달되도록 하려고 바울 일행은 다시 사랑의 수고를 더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9).

바울 일행의 데살로니가 사역은 은밀하지 않았으므로 거짓되거나 과장될 수 없었습니다. “너희가 친히 아나니”(1), “너희 아는 바와 같이”(2), “너희도 알거니와”(5), “너희가 기억하리니”(9), “너희가 증인이요”(10),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11)라는 표현들은 바울 일행의 삶에 대해 데살로니가 교회가 체험적 증인들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5),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10)라는 표현은 사람이 확인할 수 없는 영역에서조차도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실 만큼 그들이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을 강조합니다(10).

이처럼 강력하게 변증했던 이유와 목적이 11-12절에 드러납니다.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려는 이유이며, 그렇게 해서 그들을 부르셔서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12)하려는 목적입니다. 발신자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그러한 긍지 속에서 계속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려면 그들이 받은바 복음이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들이 선택된 것은 인간에 의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입어 된 것임을 확실히 알아야 했습니다. 복음의 대적자들이 퍼트리는 악의에 찬 비방과 핍박에 흔들려서는 안 되었지요.

발신자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쉬지 않고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 속에 역사했기 때문입니다(13). 1장에서도 발신인들은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복음이 단순히 인간의 말로 전해지지 않고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모두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복음의 대적자가 되어 구원 역사를 훼방하며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15-16). 이를 생각하면서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되었습니다. 사도가 전한 말씀은 오늘날 성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다는 것은 언제나 쉬지 않고 감사할 제목이 됩니다.

말씀의 역사와 함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아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동일한 고난을 받았습니다.(14). 하나님께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유대인들로부터 집요한 핍박을 받을 때,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발신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은 고난은 모든 참 교회가 동일하게 경험하는 것임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날도 참 교회는 복음으로 말미암는 고난을 받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명목상의 하나님 백성들에게서 더욱 고난을 받는다는 점도 동일한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사는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말씀이 먼저 들어와 역사했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교회는 미성숙하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이는 교회성장 프로그램이 부족하거나 기도가 부족한 탓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잘못된 기도들, 그리고 간사와 부정과 궤계에서 나온 프로그램들은 이미 차고 넘칩니다. 부족한 것은 복음 자체의 권면입니다.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역사하는 일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지속적인 권면과 위로와 경계가 필요했습니다. 한국 교회 역시 말씀을 통해 권면과 위로와 경계를 받으면서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기를 배워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하는 것이 성도에 대한 권면과 위로와 경계의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삶에 바탕이 되는 것은 사도들을 통해서 전파된 복음이 하나님을 힘입어 된 것임을 분명히 하는 일입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전파되었던 말씀이 왜곡되지 않고 유지되는 일입니다. 열심히 말씀을 전하지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성도가 되도록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한다면, 비록 축복하려는 좋은 마음에서 그리했다 할지라도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오류 없이 순수하게 미끼로 삼지 않고 권면한 것은 아니라고 평가해야 옳을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이상하게 비춰지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주소라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들은 바 말씀대로 살기 위한 고난을 회피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복음 전파자로 삼아주시길 기도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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