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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을 공부하는 사람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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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공부하는 사람 (고전 13:4~7)


얼마 전 미국 서부 집회를 마치고 공항으로 나가려고 짐을 싸는데 미국 동부에 사는 큰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손녀 딸 민희가 할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유치원을 갔는데 그곳 시간으로 오후 2시가 되면 집에 오니 그때 전화를 주실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는 비행기 안에 있을 시간이어서 전화를 할 수 없었지만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그 말 한마디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해 미국에 전화를 하였습니다. 민희를 바꾸어달라고 하였지만 이놈이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할아버지 전화를 안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하면 된다고 전화를 끊었지만 조금 섭섭했습니다. 사실은 많이 섭섭해야 하는 건데 그래도 명색이 교육을 공부한 사람이니 그때 아이들의 심리나 발달단계를 이해할 수 있어서 조금만 섭섭하기로 한 것입니다.

나이가 별로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할아버지 소리가 이제는 자연스러운 제게 있어서 가장 집중하고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정말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사람이 언제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사랑받지 못하면 병이 듭니다.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하였다고 하여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하고 산다면 그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내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채널을 돌리다가 그 프로그램이 나오면 잘 보곤 합니다. 통제 불능의 아이들이 나옵니다. 울고 떼쓰고 폭력적이고 하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을 예뻐하고 좋아하는 저도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것 같은 아이들이 실제의 케이스로 등장하는데 언제나 보면 별로 어렵지 않게 아이들이 달라집니다. 

통제불능 문제 아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엄마 아빠로부터 자기 받고 싶은 만큼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해서 아이에게 엄마 아빠에게 있는 사랑의 진심을 잘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이 그것을 찾아내고 엄마 아빠에게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들을 몇 가지 가르쳐 줍니다. 그 방법대로 엄마 아빠들이 아이들에게 관심을 표명하고 놀아주고 게임을 하고 말하는 것을 바꾸면 정말 신기하리만큼 아이가 달라집니다.

모든 삶이 180도 달라집니다. 

아이들 중에 중독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쵸코 우유만 고집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네 살쯤 되어 보였는데 쵸코 우유 외에는 아무것도 먹으려고 하지 않아 아이가 발육이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 아이는 벌써 게임 중독에 걸려서 하루 종일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와 같은 중독증세를 보이는 심각한 아이들도 엄마 아빠가 함께 놀아주고 말과 말투를 바꾸고 사랑을 표현해 주면 정말 신기하리만큼 아이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어린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알콜 중독으로 35년 동안을 아내와 자식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술만 취하면 폭력적이 되기 때문에 아내와 자녀들로부터 거의 따돌림을 당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부부가 함께 가정회복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됩니다. 거기서 남편이 어렸을 때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 엄마와 사이가 좋지 못해 힘들어했던 깊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알게 된 아내와 자녀들이 처음으로 자기 남편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남편과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열리게 되고 서로 울면서 끌어안습니다. 그 한 번의 끌어안음으로 35년 동안의 모든 문제가 한꺼번 다 풀리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런 식으로 서로 끌어안게 되면 머지않아 저 가정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알콜중독 남편의 문제도 결국은 사랑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삐뚤어졌고, 그 삐뚤어진 성격 때문에 아내와 자식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사랑받지 못하는 외로움을 술로 풀려고 하다가 알콜중독이 되었고, 술만 취하면 폭력적이 되는 바람에 아내와 자녀들로부터 점점 더 따돌림을 받게 되었고, 따돌림을 받으면 받을 수록 더 외로우니까 술에 집착하게 되었고 그와 같은 상황이 악순환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것이 사랑입니다. 남편과 아버지의 깊은 상처를 이해하고 그 남편과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지는 마음 때문에 흘린 눈물로부터 문제가 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남편과 아내를 끌어 안아주는 일로부터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에 사랑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에게 사랑처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지 못한다면 사람은 절대로 사람답게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사랑이 필요합니다. 충분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가 다 사랑에 서툴다는 것입니다. 보통 서툰 것이 아니라 치명적으로 서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사람들은 대개가 자신이 사랑에 관하여 치명적으로 서툴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 배울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을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에 대하여 치명적으로 무지합니다. 행복하려면 사랑을 공부해야 합니다. 사랑을 연습해야만 합니다. 사랑을 배워야만 합니다. 훈련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위하여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으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은 이런 것이다라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 그것이 무려 15가지나 됩니다. 사랑은 쉬어 보이지만 하나님이 사랑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는 그 15가지를 살펴보면 하나도 쉬운 것이 없습니다. 정말 도통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행복하려면 사랑을 배워야만 합니다. 사랑을 배우려면 오늘 본문 말씀에 도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15가지에 도전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한 번 도전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전하는 순간 여러분의 삶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가정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부부관계가 그리고 자녀와의 사이가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행복해 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모든 것이 완성되었을 때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하여 배우려고 생각과 자세를 바꾸는 순간부터 행복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하나님이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15가지 중에는 서로 중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이 그만큼 어렵고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사랑은 참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성내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람들이 사회적인 능력과 경제적인 능력을 갖게 되면서부터 점점 참을성이 없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회적인 능력과 경제적인 능력이 없을 때에는 왠만한 일을 당하여도 참을 줄 알았습니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살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집살이가 힘들었어도 쉽게 이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이혼한 여자가 살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에는 직장생활이 힘들어도 왠만하면 참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목구멍 포도청이라는 말이 나왔을 겁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다. 다른 살길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일이지만 참으면서 산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참고 살다보니 좋은 날이 오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고 참는 것이다. 얼마나 참아야 하나? 오래 참아야 한다. 참는 것을 넘어서 견뎌야 한다. 언제 참아야 하나? 어떤 것을 참아야 하나?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참아야 할 때 참지 못함으로 잃어버리는 사랑과 행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오늘 말씀 중에 제일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는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입니다. 사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는 ‘禮’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자녀들을 교육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개념 중에 하나가 바로 ‘禮’였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있어서 가장 취약한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이 ‘禮’입니다.

‘禮’에도 약점이 있습니다. 禮가 虛禮로 바뀌기 쉽다는 것입니다. 권위주의적으로 변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점점 민주적이 되어가면서 권위주의와 허례는 그 자리를 점점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함께 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뜻밖에 그런 실수를 많이 합니다. 사람들은 虛禮를 버리다가 禮까지 함께 버렸습니다. 권위주의를 버리려고 하다가 권위까지 함께 내다 버렸습니다. 그것은 우리 높은 뜻 교회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목사만 주의 종이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목회자들이 너무 지나친 권위의식을 가지고 허세 부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목사인 제가 그것을 싫어하는 것을 우리 교인들은 좋아합니다. 우리 교인들의 대부분은 그와 같은 목회자의 허세가 싫어서 우리 교회에 오신 분들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 높은 뜻 교회의 장점인 동시에 약점입니다. 목회자에 대한 虛禮를 버리다가 목회자에 대한 禮까지 함께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잘 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하는 말인데도, 그것이 자기를 위하여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삐뚤어져서 말을 안 듣는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습니다. 옳은 말과 바른 말을 하는 부모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가 바로 禮의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서도 禮를 갖추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부모들을 자식에게 대하여 무례합니다. 함부로 말합니다. 예의 없이 말하고 행동합니다.

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어오고 싶으시면 그냥 들어오시면 됩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고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노크를 하시고 우리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는 그것을 하나님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옳은 일이라고 하여도 함부로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그가 아무리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하였다고 하여도 그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절대로 그의 인격을 건들거나 그의 자존심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쉽게 말해서 욕을 하거나 어떤 모양으로든지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참 너무 폭력적입니다. 물리적인 폭력만이 폭력이 아닙니다. 언어적인 폭력도 폭력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물리적인 폭력 못지않게 언어적인 폭력도 살인적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시고 지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아들이 대학교 2학년 때 귀걸이를 하였습니다. 당시 저의 수준으로서는 그것을 용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내가 용납할 수 없다고 함부로 아이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르기는 해도 아이도 나 때문에 귀걸이 하고 싶은 것을 참다가, 참다가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이가 참았다면 나도 참다가 말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참다가 이야기를 해도 내 의견을 이야기하고 권할 뿐이지 절대로 폭력적으로 그것을 떼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을 통하여 둘째와의 사이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릅니다. 서른 살이나 된 자식이 처한데 치댑니다. 제 무릅팍을 베고 눕기도 하고 함께 여행을 가자고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감사합니다.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믿고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뢰하는 것입니다. 미국 위싱톤에서 아주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미국에 홀로 유학을 갔는데 염세주의에 빠져 히피가 되었답니다. 그 아버지는 장군 출신이시고 전역하신 후에도 대학 총장과 기업의 대표를 역임한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아버지가 미국에 오실 때에도 아들을 히피의 모습을 한 채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차를 몰고 나가 아버지를 맞았답니다.

그래도 그 아버지는 자식을 꾸짖지 않으시고 꼭 이 말만 하셨답니다. ‘나는 너를 믿는다. 너는 크게 될 놈이다.’ 결국 그 아들은 그 아버지의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기대대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함부로 남편과 아내를 그리고 자식과 부모를 남의 남편과 아내와 부모와 비교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워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큰 고래를 조련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칭찬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오늘 본문 중에 있습니다. 사랑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위하여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이 공부 잘하여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다 자식을 위하여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그것이 다 자식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랑하고 싶어서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 욕심이 들어가게 되면 변질 됩니다. 그러면 비교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고 그것을 상대방에 표현하게 됩니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고 신뢰해주고 그리고 기대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짧은 설교 시간에 사랑에 대하여 모든 것을 다 말씀 드릴 수 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성공하고 출세를 하여도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랑에 관하여 치명적으로 무지합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하여 치명적으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공부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욕심을 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위하여 사랑을 공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위하여 노력하십시다. 그리하여 사랑을 쟁취하십시다. 남편을 사랑할 줄 아는 아내, 아내를 사랑할 줄 아는 남편, 자식을 사랑할 줄 아는 부모, 부모를 사랑할 줄 아는 자식이 되십시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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