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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른 판단을 하려면... (막 1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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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판단을 하려면... (막 15:1~15)


[순간의 선택이 生死 갈랐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2004년 동남아시아에서 지진해일(쓰나미)이 일었을 때, 멀리 해상에서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것을 쳐다보는 관광객과 주민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답니다. 서둘러 피신하는 사람이 있었고 공포에 눌린 듯 발이 땅에 붙어 다가오는 위험을 지켜만 보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재난이 닥쳤을 때 단 몇 초간의 판단과 선택이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답니다.

2001년 9·11테러 생존자들이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에 계단으로 달려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굉음이 전해진 뒤 평균 6분이 지나서였답니다. 이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바른 판단 올바른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저자의 조사의 의하면 신속하게 합리적 행동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타인과의 교류라고 합니다. 우왕좌왕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침착하게 관찰하고 공조한 사람들이 재난을 피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9ㆍ11 테러 당시 살아서 빌딩을 빠져나온 사람 중에 "누군가와 기억할 만한 교감 없이 건물을 빠져나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게 저자 리플리의 조사 결과입니다. 바른 판단을 할 때 주변 사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하고 선택할 때 그 판단을 하게 하는 주변 사람들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재판이 나옵니다. 죄인인 빌라도가 의인인 예수님을 재판하는 장면입니다. 빌라도가 판단을 하는데 주변 사람들에 의해 지극히 잘못된 판단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재판에는 검사, 변호사, 증인, 피고인의 진술, 고소인의 진술 등이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세기적인 재판, 예수님에 대한 재판에서는 빌라도의 판단에 영향을 준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가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입니다. 권력자들,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집권 세력들입니다. 두 번째는 부화뇌동하는 군중들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과 가장 가까이 사는 자신의 아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바른 판단을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부당한 외부 압력을 거절하고 소신대로 바른 판단을 해야 합니다.(부당한 힘이냐 확신하는 믿음이냐?)

빌라도는 재판관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을 재판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나사렛 예수입니다. 나이는 33살입니다. 직업은 무직, 전직 목수입니다. 검사는 산헤드린공회입니다. 죄병은 신성모독죄, 반역죄입니다. 스스로 왕이라고 선언한 반란자, 로마에 대한 반역죄입니다. 변호사는 없습니다. 방청객은 군중입니다. 

공소사실은 자칭 '하나님의 아들'로 행세하면서 무리를 끌고 다니며 사술로 이적을 행하여 제사장과 성전을 함부로 비난하는 등 하나님을 모독하였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유대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행방자인 양 혹세무민하여 대로마 황제에 반역한 자라는 것입니다. 유월절 축제를 하루 앞두고 신성모독과 반역죄 혐의로 체포된 나사렛 예수님이 로마 총독 법정에 섰습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정치적 관심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재판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기억된 사건이 되었고 인류 역사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재판이 되었습니다. 이 재판에서 빌라도에게 가장 영향력을 준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빌라도는 이 재판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저지를 재판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 사건을 배후에서 흉계를 꾸미고 조종하는 자들이 산헤드린 공회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미 어떤 결정을 해 놓았습니까? 

14장 64절을 보십시오. 이미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빌라도 법정에 서게 한 것은 단지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입니다. 빌라도 재판은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빌라도 법정에 세웠습니까? 

죄목은 성전을 부수고 삼일 만에 짓겠다고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성전 모독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참람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유대 율법에 의하면 이런 죄를 저지르면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돌로 쳐 죽이면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이 있기 때문에 사후에 선지자로 억울하게 죽었다고 존경하며 더 추종하는 사람들이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그것을 차단하려고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죽음으로 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무에 달려 죽으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치범으로 몰라 로마의 법에 의해 십자가 형에 처하기 위해 빌라도에게 고발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무슨 죄로 고발했겠습니까? 로마에 대한 반란죄입니다. 단방에 끝내는 죄목입니다. 역사상에 수많은 정치인들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왕이라고 자칭했다는 정치범으로 고발한 것입니다. 반역을 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들의 고소가 정당한지 알기 위해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하였습니다(2). 이 말은 네가 로마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고 말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 18장 36절 이하에 보면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 더 자세히 소개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로마를 반역하기 위한 이 땅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때 빌라도는 진리에 대하여 물어 봅니다. 

심문을 마치고 빌라도는 “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요18:38)”라고 말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답변에서 범죄라고 규정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자 일차적으로 무죄를 선언합니다. 그렇다고 대제사장들이 포기합니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합니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돌리고 죽이려고 작정하면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더 자기를 정당화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상대를 정죄하고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3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를 합니다. 갖가지 비방과 모략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백성을 미혹하여 혁명을 일으키려 했고 고발합니다(눅23:2). 선동죄입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 납부를 거부했다고 고발합니다(눅23:2). 납세 거부죄입니다.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 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한 자라고 고발합니다(눅23:5). 소요죄입니다. 한 번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해석하여 죄목을 붙여 고발합니다. 제 입맛에 맞게 확대할 것은 확대하고 축소할 것은 축소하고 왜곡할 것을 왜곡하여 고발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무리들의 빗발치는 비방에도 예수님은 침묵합니다. 그 때 빌라도는 예수님께 변호의 기회를 가지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10).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국 어떤 판결을 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바른 판단을 하려면 힘 있는 자들의 부당한 외부 압력에 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판단을 잘못되게 하는 부당한 힘이 얼마나 산재해 있습니까?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부당한 힘과 확실한 믿음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한 연예인이 자살하여 언론에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연예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 있는 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의 힘을 가진 스폰서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 주어야 합니다. 유명해지기 위해, 무대의 조명을 받기 위해 부당하다할지라도 힘과 결탁해야만 하는 구조라면 얼마나 힘든 세상입니까? 이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군대 문화 중에 회식문화가 있었습니다. 자대 배치를 받고 회식을 하는데 술이 돌아옵니다. 저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술을 거절했습니다. 노래를 부르라고 해서 복음 성가를 불렀습니다. 그날 저녁 고참들에게 엄청나게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부당한 힘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늘 고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믿음을 선택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부당한 힘 앞에 판단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제사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신상 앞에 절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출세할 수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8)”라고 선택하였습니다.


2. 부당한 다수의 여론을 거절하고 진실을 따르는 판단이 필요합니다.(세속적 여론과 진실)

빌라도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군중들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고발한 것도 알았습니다. 사건을 정확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네 번이나 시도를 했습니다. 이것이 진실을 따르는 판단입니다. 첫 번째는 종교문제니 유대인끼리 해결하라고 합니다(요18:31) 두 번째는 사건을 헤롯에게 넘겼습니다(눅23:6-12). 세 번째는 태형만을 가해 석방하려고 했습니다(눅23:16). 네 번째는 오늘 나오는 말씀처럼 예수를 유월절 특사로 내보내려했습니다(6). 

로마 총독에게는 재판에 계류 중인 죄인든 이미 확정된 죄인이든 특별사면을 시킬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권한을 가지로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고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소신 재판을 하려고 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유월절이 되면 총독이 죄수 한 명을 석방해 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빌라도에게 몰려와서 전례대로 죄수 한 명을 놓아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람을 놓아 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습니다. 군중이 힘을 이용하여 제사장들의 요구를 거절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론을 이용하여 권력자들의 요구를 거절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어떻게 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이 군중을 선동합니다. 오늘날 여론도 여론 조작자들에 의해 교묘하게 권력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군중은 쉽게 선동하는 자들에게 넘어갑니다. 예수 대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합니다. 바라바는 유명한 죄수였습니다(마27:16). 민란을 꾸민 자입니다(막15:7). 자신들 생각에는 로마를 대항한 애국자, 독립 운동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라바는 살인자이고(눅23:19) 강도(요18:40)였습니다. 군중은 선동에 판단력이 흐려져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선동에 약합니까?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합니다. 먹는 날에는 정령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탄에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라고 선동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5)”라고 선동합니다. 순식간에 넘어 가버립니다. 누가 장로님 흠을 잡아 말하면 금방 그것이 사실인양 넘어가버립니다. 누가 목사님 흠을 잡아 이야기 하면 그것이 사실인양 넘어가 버립니다. 그 말이 사실인지,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이지, 무슨 목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따져 보지도 않습니다. 자신과 친한 사람, 자신과 성향이 같은 사람이 말하면 얼마나 쉽게 믿어 버립니까? 그렇게 되면 잘못된 판단을 하고 미워하고 교회를 떠나고 상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선동된 군중들은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답답한 빌라도가 죄목이 무엇이냐고 물어봅니다. 선동된 군중은 죄목은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이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제거시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계속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합니다. 여론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마녀사냥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결론을 내어 놓고 합리화시키는 재판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어떻게 합니까? 십자가형에 예수님을 처형하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폭동이 일어날까바입니다. 폭동이 일어나면 자신이 문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총독직에서 물러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권력를 잃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피해가 옵니다. 여론을 무시하고 자신의 자리에 손해를 보면서까지 무죄를 판결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넘어가면 자신의 자리도 안전하게 보장받고 여론의 지지도 받는데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진실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외면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군중에게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해 버렸습니다. 

우리가 바른 판단을 하려면 부당한 군중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좇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진실은 외로울 수 있습니다.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수가 신이 된 세상입니다. 우리는 수를 따르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


3. 이익이 되는 소리만 듣지 말고 양심의 소리를 듣고 판단하여야 합니다.(출세와 양심의 소리) 

세 번째 빌라도의 판단에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부인입니다. 오늘 마가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빌라도가 재판을 하고 있을 때 그 아내가 사람을 시켜 쪽지를 보내었습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마27:19)” 아내가 예수님을 옳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그 사람의 일로 꿈자리가 몹시 사나웠다는 것입니다. 양심을 자극해 주는 아내의 소리입니다. 빌라도는 포악한 사람입니다. 

빌라도는 주후 26년에서 36년까지 유대를 통치하였습니다. 팔레스틴 땅 전역을 로마식으로 통치하고 반로마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였습니다. 로마 정부에 잘 보이기 위해서 로마의 국기를 성전 안으로 반입하려다가 유대인의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수로 건설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성전의 헌금을 유용하기도 했습니다. 출세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가족의 말에는 인간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얼마전 많은 여인을 죽인 살인법도 자기 아들을 걱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입니다. 인간에게 양심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랄한 인간도 양심이 있습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이 죄가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14). 빌라도가 이렇게 소리칩니다. “그가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이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예수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양심의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잘못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확신과는 정반대의 판결을 내리고 맙니다. 양심을 배반하는 결단을 합니다. 자기 양심을 따라갈 수 있는 결단력과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손을 씻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자신은 무죄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마 27:24)” 왜 빌라도가 양심의 소리를 거역합니까? 민란이 날까봐서입니다. 반로마적인 데모를 하지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면서도 양심의 소리를 거역한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따라 예수님을 석방시키면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것 같아서 양심의 소리를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출세에 지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게 하는 말은 요한복음 19장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19:12)” 

유대인들이 만약 예수를 놓아 주면 빌라도가 로마 황제의 반역자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 그는 자기 입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 자신의 미래, 자신의 출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를 외면한 빌라도의 인생이 보장되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도 신경을 할 때마다 빌라도의 수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 가장 부끄러운 재판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많은 인간이 무죄한 예수님을 재판하는 모형이 되어 버렸습니다. 올바르게 재판을하여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선언하여 당시 공회가 얼마나 부패하였으며 종교라는 탈을 쓴 위선집단임을 백일하에 드러낼 기회를 잃어 버렸습니다. 출세를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 눈치를 보았던 빌라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대의 유명한 역사가 요셉푸스에 의하면 사마리아 학살사건으로 로마의 정부로부터 소환 당하고 빌라도가 소환을 받자 이제는 자기의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하려하자 유대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27:25)”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히틀러에게 600만명이 살해되고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방황하며 산 것이 이 고백의 대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판단을 할 때 내 양심의 소리를 깨우는 사람을 만날 때 있습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우려야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우리 내면의 양심의 소리는 내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판단하고 선택할 때 출세에 너무 눈이 멀어서는 안됩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내 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회가 그래도 살만한 것은 사람 속에는 선한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양심은 인간에게 주어진 고유한 것입니다. 양심이란 인간 내면에 있는 "선한 의지"입니다. W.S. 몸은 "양심이란, 그 사회가 자체의 유지를 위하여 발전시켜 온 규율의 개인적인 보호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J.J. 루소는 "에밀"에서 "양심! 양심! 신성한 본능이여! 불편의 하늘의 소리여, 지성 있고 자유로운 한 존재의 확고한 안내자여, 선악에 대한 올바른 심판자여, 인간을 신과 닮게 하는 자여, 그대야말로 인간의 본성의 우수성과 인간의 행위의 도덕성을 낳게 하는 자다. 그대가 존재하지 않으면 단지 규율 없는 오성(悟性)과 원리 없는 이성의 도움을 빌어서 잘못만을 저지르는 슬픈 특권을 느낄 뿐이며, 그때 나는 하나의 동물일 따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양심은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내면의 소리입니다. 양심의 라틴어 어원은 ‘더불어 산다(Con+scientia)’라고 합니다. 더불어 사는데 양심이 필요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양심을 지키는 것이 괴로운 시대가 되면 그 사회는 미래가 밝은 사회는 아닙니다. F. 리블레는 "양심 없는 지식은 인간의 영혼을 멸망시킨다."라고 했습니다. 

양심은 인생의 등불이 됩니다. 양심은 우리 인격과 생활의 등불입니다. 일찍이 칸트는 "하늘에는 별들이 있고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양심은 인생의 올바른 안내자입니다. 양심은 우리 인생들의 바른 삶의 좌표와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여 바로 안내하여 주는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교육자 루소는 "인간의 양심은 인생의 안내자다. "고 하였습니다. 양심은 인생의 엄한 법관입니다. 

우리 나라 국어사전에 양심은 "사물의 선악과 행동의 정사를 판단하고 명령하는 기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리겐은 "양심은 정의의 근원이라."고 했고 톨스토이는 "양심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라고까지 하였습니다. 화인맞은 양심이 아닙니다. (딤전4:2). 죄에 오염된 더러운 양심이 아닙니다.(딛1:15) 청결한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딤후1:3). 예수 안에서 거듭난 신자로 밝고 깨끗하고 온전한 기능을 발휘하는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양심 없는 믿음은 파선한 배와 같다고 했습니다(딤전1:19,) 가룟 유다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6)”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 3:21)”

바른 판단을 하려면...

1. 부당한 외부 압력을 거절하고 소신대로 바른 판단을 해야 합니다.(부당한 힘이냐 확신하는 믿음이냐?)
2. 부당한 다수의 여론을 거절하고 진실을 따르는 판단이 필요합니다.(세속적 여론과 진실)
3. 이익이 되는 소리만 듣지 말고 양심의 소리를 듣고 판단하여야 합니다.(출세와 양심의 소리)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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