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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 (마 1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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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 (마 14:13~2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큰 힘을 얻습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용기를 얻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로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제자들이 당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느 날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 곳은 빈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쳐주셨는데, 그러던 중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리들을 보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이 말씀은 누가 생각해도 타당한 것입니다. 이젠 시간도 많이 갔고, 해도 져 가고, 집에 돌아갈 때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제자들은 무리들이 배가 고플 것을 염려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 돌려보내서 각자 사 먹게 하자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말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1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은 <너희가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제자들을 절망하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제자들의 과제 자체가 절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눈앞에는 한 백여 명의 사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남자만 5천명이나 되고, 부녀자들까지 하면 상상도 못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둘째로, 주변 상황이 절망을 가져왔습니다. 이미 해는 저물었고, 그 곳은 빈들입니다. 사람이 몇 명 안 된다고 하더라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습니다. 돈이 많아도 음식을 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셋째로 가장 심각한 것은 제자들의 형편입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제자들을 가난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노숙할 때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몇 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상황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열역학에 <임계점, Critical point>이라는 게 있습니다. 임계점이란 액체와 기체의 상이 구분될 수 있는 최대의 온도와 압력의 한계를 말합니다. 임계점이 넘어가면 액체와 기체를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도 임계 상황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버틸 수 있지만, 그 한도를 넘어가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마지막 선이 있습니다. 

살다보면 임계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 정도면 얼마든지 해 낼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서 여유를 가질 때도 있지만, 어느 선을 넘어서면 도저히 불가능해집니다. 그 때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합니다. 공부를 하다가 도저히 따라잡기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 자살을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남편의 구박과 학대를 참고 참다가 어느 선이 넘으면 아내가 가정을 버리고 가출합니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끝까지 참고 대화를 하다가 도저히 못 참을 상황이 되면 판을 뒤엎어 버립니다. 

이런 상황은 성경의 인물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엘리야 선지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온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 등의 우상에 몰입해 있었습니다. 아합 왕과 왕비인 이세벨을 비롯한 온 나라가 우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혼자서 그들과 맞섰습니다. 갈멜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임을 보이면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여전히 우상 숭배 세력은 건재했고, 특히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려고 찾아다니자, 엘리야는 혼자 버티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는 결국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차라리 죽게 해 주십시요>라고 합니다. 

본문의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게 말씀하셨다면 제자들도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너희가 주라>는 말씀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리고 받아들이려 해도 그럴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더구나 제자들이 섭섭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사정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르시는 게 없습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제자들의 주머니가 텅 비었다는 것, 그리고 주변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참기 힘든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아무리 주님의 말씀이지만, 이건 너무하시다!> 이게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을 참고해 보면, 빌립이 다분히 반항적인 어조로 말하기도 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므로 이백 데나리온을 만들려면 제자들 모두가 17일 정도 일해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서 모아도 이들에게 조금씩 주는 것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 당장 어디서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음식을 찾는다는 말인가?> 이런 항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제자들은 더 이상 참기 힘든 상황에 이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면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첫째는 사명감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의 6장의 병행 구절에 의하면 이 때 예수님과 제자들은 너무 바빠서 식사도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쉬고자 빈들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 일행의 그런 사정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먼 길을 걸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때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우선 무리들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할 만큼 했다, 이젠 우리도 좀 쉬어야겠다. 우리도 피곤하다.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돌려보내거나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환영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 오늘도 우리는 주님께 나왔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따뜻한 주님의 사랑이 임하시길 바랍니다. 빈들의 무리들이 가르침을 받은 것처럼 마음의 귀가 열려 가르침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무리들이 고침을 받은 것처럼 우리 모두의 영과 육이 고침을 받길 기원합니다.

영접하시는 모습, 이게 바로 예수님의 사명감에서 나온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이들을 위해 세상에 왔다. 아무리 피고하고 힘들지만, 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주님의 가슴에는 사명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명감을 제자들에게 불어넣고자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힘들다는 것을 내가 왜 모르겠느냐? 너희들이 줄 게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너희가 아니면 누가 주겠느냐? 저들을 돌보는 것이 너희의 사명이다. 내가 떠나면 너희가 저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 그런데 돌려보내면 되겠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의 자리를 지키시길 바랍니다. 부모는 끝까지 자녀를 돌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자녀가 희망이 없어 보여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남편이 실직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어도 아내가 그 남편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남편을 지키고, 힘을 북돋우어 재기하도록 하는 게 아내의 사명입니다. 남편들은 쓰러진 아내를 버리면 안 됩니다. 끝까지 돌보아야 합니다. 많은 복음 사역자들이 사역 현장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버리면 안 됩니다. 

끝까지 거기 서 계십시오. 그 자리를 사수하십시오. 아버지의 자리, 어머니의 자리, 자녀의 자리, 학생의 자리, 사장님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힘들고 어려워도 진지를 이탈하면 안 됩니다. 그게 사명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능력이 없는 것이었을까요? 돈이 없는 것이었습니까?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주님은 한 번도 <왜 너희는 그렇게 가난하냐? 왜 힘이 없느냐? 왜 빽도 없느냐?>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미 주님은 그런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불러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문제는 엉뚱한 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교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교만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면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능력인 것처럼 우쭐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면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지식인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기도 했고, 능력자인 것처럼 행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서 애를 먹는 무능자였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교만했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면서도 <누가 더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심각한 교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교만을 깨뜨리는 데 많은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갈수록, 십자가를 질 시간이 가까울수록 제자들에게 <겸손할 것>을 강력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는 제자도의 기본이 자신을 부인하는 겸손임을 가르쳤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또 어린아이를 데려다 보여주시면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 날 저녁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제자들을 겸손하게 하는 것, 이게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줄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좌절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 우리가 아무리 주려고 해도 줄 수 없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된다. 우리가 대단한 능력을 가진 줄 알았더니, 우리는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이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좌절은 겸손을 가져옵니다. 더 이상 <내가 주겠다. 내가 하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어려우십니까? 그렇다면 그 순간을 통해서 겸손을 배우십시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정말 적음을 고백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적음을 생각하십시오. 교회에서 목회자를 청빙할 때도 그렇습니다. 교인들은 모셔오는 목사님이 교회를 크게 부흥케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입니다.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일뿐입니다. 오히려 목회자에게 기대하지 말고, 그 목회자를 도우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 개인의 조건을 보면 안 됩니다. 그 목회자가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동행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겸손하길 바랍니다. 탈무드는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창조의 순서를 생각해 보라. 사람은 모든 창조물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졌다. 심지어 파리 한 마리도 사람 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겸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가식의 화법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내가 나라를 부흥케 하겠다, 내가 지역구를 번영하게 하겠다, 내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나를 도우시는 주님 안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게 옳은 말인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너희가 주라>는 말씀을 통하여 제자들이 주님을 체험하길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좌절의 쓴 잔을 마신 후에, 주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거기 모인 모든 무리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부스러기를 열 두 광주리나 모았습니다. 이게 다 주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 좌절할 때, 주님은 시작하십니다. 사람이 자신에 대하여 <노!>라고 말할 때, 주님은 <예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님이 먹이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을 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힘드십니까? 포기는 하지 마십시오. 포기하는 대신에 <맡김의 신비>를 배우십시오. 그리스도인은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맡기는 사람입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베드로전서 5장 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정이 힘드십니까? 포기하지 말고 맡기십시오. 기업이 힘드십니까? 포기하지 말고 맡기십시오.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을 포기하지 마시고 맡기십시오. 저도 본 교회를 주님께 맡기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언제나 무에서 일을 시키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을 이루어 가셨다.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은 수면 위로 운행하시면서 말씀으로 하나하나 일을 이끄셨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맡아서 진행해 나가므로,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자로 맡겨진 사역만 잘 감당하면 되지 않는가!> <예도해> 목사님의 <구름이 가면 나도 가고>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그 후 제자들은 행복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음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때 제자들은 행복해서 절로 춤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기뻤을까요? 주고자 하면, 줄 게 없어도 줄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너 자신에 대해서는 포기하라! 그러나 사명을 포기하지는 말라! 포기하는 대신에 믿음으로 내게 맡기라! 내가 너를 사용하여 내 일을 이루리라!> 이렇게 쓰임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삶에 이런 주님의 은총이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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