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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신앙의 무장 (요일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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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의 무장 (요일 3:1~6)


지난 주간에는 후암교동협의회가 주관하는 수련회에 1박2일로 ‘증도’라는 섬을 다녀왔습니다.  앞으로 연육교가 완성되면 좀 더 편하게 다녀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배를 타고 들어갔는데, 연육교의 교각은 다 세워졌고, 상판만 올려놓으면 교각이 완성되어 승용차로 다녀올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증도에 가서 문준경전도사님의 순교비를 돌아보았고, 문전도사님이 설립한 교회 중의 하나인 대초리교회에서 문준경전도사님에 대한 25분짜리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복음화율을 자랑하는 그곳은 바로 전라남도 신안군이라고 합니다.  크고 작은 섬들로만 이루어진 신안군의 복음화율은 35퍼센트로 전국 평균의 두 배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증도라는 섬은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예수를 믿는 전국 복음화율 1위의 섬입니다.  마을 사람 거의 대부분이 크리스천으로 주민 2,200여 명인 작은 섬에 교회만 10개가 세워져 있습니다. 한 교회만 장로교회이고, 나머지는 성결교회들이었습니다.  그 장로교회도 성결교회 교인들이 나와서 장로교회로 속하게 되었으니, 전부가 성결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섬사람들은 토속 신앙을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그들로서는 바다의 신, 바람의 신, 태양의 신이 그들을 지켜준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미신과 토속신앙 때문에 섬사람을 전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런 곳에 어떻게 개신교가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 전국 복음화율 1위의 섬을 만들 수 있었습니까?  

증도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한 사람, 신안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들을 나룻배를 타고 돌아다니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끈질기게 주민들을 설득하고 먹이고 입히고 돌보면서 교회를 세운 사람, 그 사람은 목사도 선교사도 아닌 연약한 한 여인이었습니다.  17살 때에 청상과부가 되어, 광주에 나와 홀로 예수를 믿으며, 경성신학원 (서울신학대학 전신)을 졸업하였는데, 처음 들어갈 때는 청강생으로 들어갔다가 하도 훌륭하고 열정적으로 공부하여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섬마을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그녀가 있었기에, 그녀의 눈물겨운 헌신의 삶이 있었기에, 그녀가 뿌린 숭고한 순교의 피가 있었기에 오늘날 신안군과 증도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문전도사님에 대한 사진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를 기억하는 여러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그를 회고하는 영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초리교회에서 동영상을 보았는데,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한 사람의 여성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그가 들어 들어간 복음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 마디로 감동적이었습니다.  

문전도사가 고향인 전남 신안군의 섬들에 설립한 증동리교회, 임자 진리교회, 대초리교회, 우진리교회, 병풍리교회, 사옥교회, 장고리교회 등 10여 교회를 세우셨으며, 한국 기독교회를 대표하는 수많은 목회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대학생 선교회를 이끌어오신 김준곤목사님, 성결교회의 총회장을 지내신 이만신 목사, 이봉성목사, 한신대학의 정태기 박사, 총신대학의 신복윤박사 등 30여명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기억을 더듬어 문준경전도사님의 복음전파와 6. 25 막바지에 공산군들이 퇴각하면서 마지막으로 교회를 잔멸하다시피 하면서 문준경전도사를 죽인 상황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성결교회의 유명한 부흥사이셨던 이성봉목사님이 잠시만 피신하였다가 공비를 토벌한 후에 섬에 들어가라고 하였는데도 교역자가 교인들을 두고 어디 숨어 있을 것이냐면서 섬에 들어가셨는데, 그 날로 공산폭도들에게 잡히고 무참히 죽고 말았습니다.  문준경 전도사의 이러한 자기희생적 사랑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문준경 전도사와 함께 백사장의 처형장으로 끌려온 양민들의 행렬 속에는 백정희 전도사도 함께 있었습니다.  백 전도사는 평소에 문준경 전도사를 어머니처럼 섬기며 따랐고, 문준경 전도사도 백 전도사를 딸처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이러한 그녀였기에 문준경 전도사는 공산 폭도들이 자신을 죽창으로 찌르고 총대를 휘두르며 길길이 날뛰는 순간에도 “나는 죽어도 좋으니 제발 저 백 전도사만은 살려주시오. 제발...” 하며 애원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문준경 전도사의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백 전도사는 처형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수련회를 마치고 오는 길에 우리나라에 가장 아름답고 잘 조성된 전원교회라는 고잔교회를 돌아보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요, 전원교회로서 내세울만한 교회였습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세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죽은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예수님과 함께 주어질 천국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롬6:4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망과 죽음을 이기신 분입니다.  사망이 주님을 가두려고 하였지만, 무덤이 주님을 가두려고 하였지만, 우리 예수님은 흑암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고, 주님의 죽으심은 곧 나의 죽음으로 고백하면서 주님과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우리도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새생명을 받은 사람으로, 새생명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11:25-26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죽음의 개념을 분명히 달리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에 우리도 주님의 부활하신 몸에 참여하는데, 주님은 부활의 첫열매가 되십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연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골2:12을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지금 우리도 예수를 믿으므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므로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골3:1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죽으심에만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에도 동참하고 주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여 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엡2:4-6에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요, 죽어도 신령한 몸으로 계속하여 살 것이요, 지금 살아 있어도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예수님과 함께 주어질 모든 영광과 은총이 다 들어와 있으며, 예약되었고,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엄청난 은총에 참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는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죽음과 더불어 부활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주적 차원의 부활이 이 지상에서 영광스럽게 펼쳐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랑의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들려준 말씀입니다.  새번역성경으로 보면 1절 말씀에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아버지께서 베푸신 큰 사랑”이라는 제목을 정하였는데,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받은 사랑은 정말 큰 사랑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다음 주일에는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하겠다고 주보에 예고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사모님이 목사님에게 따지고 물었습니다.  “당신은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할 자격이 없어요,  ‘사랑이 뭐길래’ 연속극도 안보는 사람이 무슨 사랑에 대하여 설교할 수 있다는 말이예요? ”  한 때 ‘사랑이 뭐길래’라는 연속극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주인공 대발이라는 이름의 청년이 나오는 연속극이었습니다. 최민수씨와 하희라씨가 주연으로 나왔습니다. 그 연속극으로 아버지 나온 이순재씨는 연기대상을 받았고, 어머니 김혜자씨도 연기대상을 받았고, 그 후에 이순재는 그 후로 국회의원에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사랑이 뭐길래’의 작가인 김수현씨에게 “도대체 사랑이 뭡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 목사님이 더 잘 아실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면서 사양하다가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주어도 아깝지 않으면 사랑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어도 아깝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말이 정말 공감할 수 있는 사랑의 정의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롬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아들을 주신 것으로 말씀하고, 확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부모님에게 큰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형제의 사랑도 없었다고 하여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큰 사랑은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난 사랑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형벌을 안겨준 죄를 사하여 주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이란 아무리 해도 가족관계를 가지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독생성자 예수님을 허락하여 주시고,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요20:17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서 예수님의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요, 곧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하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말은 주님의 부활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가족관계를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입니다.  주님은 부활의 첫열매가 되시고, 우리는 뒤 따라 열리는 열매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참모습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지으셨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변화받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부활은 막연히 미래의 모습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부활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세례를 받을 때에 시작되었고, 우리의 죽음과 신령한 몸을 입어 구체화될 것이요,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우주적인 부활로 완성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면서 아버지의 집에 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가족의 한 사람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으로 감사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에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소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소망은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산 소망이라고 하셨습니다. 

벧전1:3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에 대한 소망,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이 세상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먼 길도 마나하지 않습니다.  태산이라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어떠한 역경에 환란이 다가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가진 사람만이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제자들, 로마의 원형극장에 끌려가 죽은 수많은 순교자들은 부활에 대한 소망, 확신이 있었기에 그렇게 묵묵히 주님을 바라보면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죽어갈 수 있었습니다.  

초기의 선교사들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죽을 수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목사님, 우리 한국교회가 낳은 수많은 순교자들은 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였고, 부활의 소망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현실은 정말 암담하고 부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경제적으로 힘든 성도들이 있습니까?  소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소망이 없는 민족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이십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악을 물리쳐야 합니다. 

4-6의 말씀을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요한의 편지를 읽어보면 요1:8에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고 하셨고,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현실을 무시하시고 하신 말씀으로 보여지고, 성경 전체적으로 보면 모순되는 말씀으로 보여집니다.  예수를 믿어도 주님 안에서 살지 않으면 범죄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요, 부활의 소망을 잃어버리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발을 내리고 살다보니 범죄할 수밖에 없고, 죄에 넘어지고 만부득이 죄를 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주님을 부인하는 자리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주님을 부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6절의 말씀을 다시 봅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진정으로 주님을 체험하고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범죄를 혐오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죄안에 거하고, 죄를 끌어들이고 죄와 짝하려고 하는 사람은 주님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난 사람이라면 죄 가운데 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그 더러운 죄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분들이 있습니까?  내가 주님을 정말 만났으며, 주님 때문에 구원받았으며,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우리로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어떠한 환란과 역경이라도 딛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죄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셨습니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여 세상을 싸워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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